천막 농성 1,000일째…정방 대표님께 보내는 서한

저 때는 사진도 저렇게 찍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배척할까, 도박꾼에 기레기로 치부할까 두려웠던 건 사실 아닙니다. 제가 몸 담았던 진보, 개혁 진영의 헛헛한,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들에 환멸했기에 그 잔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를 또 대변해야 한다면, 그게 언론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벌써 1,000일째입니다. 용산화상경마도박장 추방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천막 농성에 접어든 지 말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013년 10월 24일, 한국마사회 국정감사가 있던 날 한국농어촌공사 앞에서 대표님을 만났었지요. 평범한 주부, 누군가의 엄마아빠인 대책위 관계자분들은 자녀들의 교육과 주거 환경을 걱정하며 거리로 나앉았습니다.

이날 저와 했던 대화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어디 일간지나 지역 신문 기자인 줄 아셨지만, 기자라고 하자 한국마사회가 발행하거나 그쪽 편만 드는 매체 아니냐고 걱정하셨었죠. 본래 저 역시 진보, 개혁 진영에서 활동하다 지금은 이곳에 있노라고, 누구의 편을 드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이 문제가 어떻게 될까, 얼마나 오래 갈까 걱정하시며 저에게 다시 물으셨습니다. 제 대답은… “여론의 힘이 무서운 시대다. 너무 걱정하시지 말라, 좋은 때가 올 거다”라는 무책임한(?) 답을 했습니다.

그러던 게 벌써 1,000일이 지났습니다. 지난합니다. 2016 한국마사회 국정감사가 있던 지난 10월 6일,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에서 대표님을 봤습니다. 참고인 신분으로 증언한 대표님은 현명관 회장에게 “양심에 손을 얹고 화상경마장이 레저라고 생각하는지” (…중략.) “사행시설이고 도박장이기에 규제하고 있는 것”이라며 아이들이 ‘화상경마장’에 노출된 사례들을 언급했고, 국감에 참석한 의원들에게 화상경마장이 주택가에 있지 못하도록 기필코 막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취재 때문에 인사도 제대로 못 건넸지만, 아마도 저를 기억하시지는 못할 겁니다. 많이 지쳐 보이셨습니다. 국정감사 취재가 끝나고 나오던 길에 렛츠런파크 부경 입구 버스 정류소에 일행들과 서 계셨던 모습을 봤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그 먼 곳까지 또 고생하며 오셨을 생각하니 당장 카메라와 짐 모두 빼고, 후배들 내리라고 하고 대표님과 일행들을 모시고 서울까지 내달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용기 없는 저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게 또 죄송했습니다. 글 쓰는 일로 먹고살면서, 최소한 ‘기레기’는 아니라고 자부했는데 그날 저는 기레기가 됐습니다. 저 먹고사는 일, 해야 하는 일 때문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신적 명령을 계속 외면했다는 자책 때문입니다. 말과 관련해 아픔을 겪고 있는 대표님과 반대 측 분들에게 소홀했다는 자성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용산’이라는 곳은 2009년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로 재개발 보상을 요구했던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사망한 대참사가 있었던 특별한 곳입니다. 끝까지 망루 위에서 시위하던 철거민은 전원 유죄 판결을 받았고, 그해 말 협상이 타결된, ‘국가폭력’의 전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죠. 또한 제주 강정마을처럼 국가 공권력의 ‘정당성’ 아래 우리 힘없는 개인들은 무차별 ‘학살’을 당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 똑똑한 보수들과 위정자에 휘둘리는 우리들은, 대표님 말씀대로 평범한 가정 주부이자 누군가의 엄마아빠입니다. 사회정의니 공의니 하는 대단한 의식과 가치를 위해 싸우는 진보 진영, 개혁가들도 누군가의 엄마아빠입니다. 저 역시 우리 인간으로는 참된 개혁은 어렵다는, 좌절과 부끄러움을 안고 내 갈 길을 박차고 간 한 사람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회 조직이라는, ‘그 위대한 힘’ 아래 힘없는 개인일 뿐, 뭉친다고 해결되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돈, 자본이라는 맘몬은 우리를 길거리로도 내몰고 기레기로도 만들고 비리도 저지르게 합니다. 좀 더 나은 세상을 외치는 건 나이브한 이상일 뿐, 특정 집단과 국가 권력의 행태, 구조화된 악은 여전합니다.

한국마사회는 왜 용산에 화상경마장을 세워 미래의 주역인 우리 아이들의 교육권을 침해하고 주거권을 ‘찬탈’하는 걸까요. 한편으로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라며 유소년 승마를 도입하고, 말산업은 농어촌의 미래라며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데 말입니다. 국정감사 당시 몇몇 의원들이 지적했듯 단순한 인식, 시각 차이 또는 수익 창출에 ‘혈안’이 됐기 때문일까요. 근본 문제,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왜 그 때문에 수많은 시비가 발생하고 지지부진한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요.

개인 양심이나 책임 문제로만 돌린다면, 관행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말했듯, 집단 이기주의는 개인의 이성이나 양심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반대 측이 집단 이기주의나 ‘님비’라는 게 아닙니다. 양 측이 싸울 수밖에 없는 더 큰 의미의 구조적 문제, ‘집단 이기주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 물음을 하는 것입니다.

황주홍 의원은 이날 공공 갈등을 언급하며 평균 지속 기간이 4.3년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만남을 거부하고 갈등이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하면서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제3기관에서 대화를 열면 참여 의지가 있는지”라며 농해수위에 이 문제를 다룰 소위원회 설치 제안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골든타임’이라고 했지만, 정말 기적적으로 해결이 될 수 있을까요. 제3자로, 중립적 입장에 있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상하게 들리실지 모르지만, 우리 삶, 우리 행동에 대한 최종 심판은 다른 누군가, 어떤 특정한 인간이나 심지어 법의 몫은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이 그렇듯, 저들도 누군가의 엄마아빠로 먹고살 궁리를 해왔고, 해왔습니다. 조직 내에서 외부를 향해 ‘착한 일’을 하면 욕을 먹습니다. 경마=도박이라는 사회적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는 저들은 이 세대 그리고 ‘헬조선’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에서는 어쩌면 끝나지 못할 일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희망이고 사람만이, 우리 개개인이 가치가 있는 것 아닐까요. 개인이 하나로 뭉쳐 공동체를 이루고, 선으로 화합하며 악에 맞서는 일만이야 말로 우리 존재의 유일한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양비론도 아니고 특정 단체를 감싸는 것도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저는 광고나 입지로 누군가를 ‘빨아주는’ 기사를 쓰지 않습니다. 구마지심(狗馬之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馬)이 그 주인에게 충성하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자신의 진심을 겸손하게 낮추어 표현하는 말입니다. 저에게 ‘주인’은 누구일까요. 분명 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분은 바로 취재원입니다. 그리고 그 취재원은 말과 관련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재소통의 중심에 저희도 나서고 싶습니다. 조만간 인터뷰 하러 직접 찾아뵙겠습니다. 모처럼 아니, 처음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서 속이 시원합니다. 날이 많이 추워졌습니다. 부디 몸 건강히 승리하십시오. “늘 잊지 않겠습니다.”

▲저 때는 사진도 저렇게 찍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배척할까, 도박꾼에 기레기로 치부할까 두려웠던 건 사실 아닙니다. 제가 몸 담았던 진보, 개혁 진영의 헛헛한, 말과 행동이 다른 모습들에 환멸했기에 그 잔상을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누군가의 목소리를 또 대변해야 한다면, 그게 언론이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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