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초 마사회 대대적 사업 구조, 조직 개편 앞두고 혁신 의지 엿보여

[말산업저널] 이용준 기자= 진중한 사람은 조급하지 않다. 대개 철학자나 예술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공통된 성품이다. 오래 사색하고 고민한 결과물인 ‘통찰(insight)’에 대해서도 숙고하고 반추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종종 말실수를 한다. 평소 생각, 본심과 전혀 다른 말이 본인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다. 그러다보니 가까운 주변인들조차 오해한다. 다른 생각을 한다거나, 일을 안 한다거나, 사람을 가까이 않는다고. 서양 철학을 전공했고, 종교와 사람에 관심이 많고, 글을 쓰며 음악 하는 기자도 이런 부류라 그 심정을 안다.

깜짝 놀랐다. 한국마사회가 2018 말산업박람회 기간 선보인 말 문화 공연, ‘라이드 포 라이프(Ride For Life)’ 둘째 날인 17일 저녁. 공연은 시작했는데 김낙순 한국마사회장의 자리인 VIP석은 비어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승마복을 갖춰 입고, 관람객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막상 공연이 시작하니 사라졌다. 인사만 하고 자리를 비운 걸까.



한 번 더 놀랐다. 오프닝 무대에 그가 나타난 것. ‘클레오’와 함께 김낙순 회장은 무대 한 가운데 홀로 섰다.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있다고 했는데 무대 위 그는 비장해 보이기까지 했다. 관람객을 향해 으레 환영 인사를 한 뒤 예정에 없었던 에피소드를 전하며 소통했다. 원래 ‘클레오’와 함께 공연 한 부분도 준비했는데 미국 브리더즈컵 출장을 다녀오니 배역이 바뀌어 강력히 항의했다고. 그래서 이렇게라도 자리에 서게 됐다고 했다. “멋있어요!”라며 박수를 보낸 관람객들을 뒤로 하고 그는 “조용히 가보겠습니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클레오’와 함께 유유히 무대를 빠져나갔다.

아직까지도 승마를 한다, 경마장 간다, 말을 탄다고 하면 동네 사람부터 일반 국민에게까지 욕을 먹는 시대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결과는 지금도 그렇게 유효하다. 그런데 그가, 대한민국 말산업 수장인 그가 우리를 대표해 말에 올랐다. ‘말을 탔다’와 ‘말에 올랐다’는 다른 표현이다. 용기, 의지가 분명 담긴 행동이다. 취임 이후 꾸준히 승마를 배우고 있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라이드 포 라이프 공연 오프닝에서 볼 줄이야.

사실 처음 마사회에 ‘워라밸’을 도입한다고 했을 때 ‘제정신인가?’라고 생각했다. 경마도 승마도 모두 죽어가는데 제 식구만 위하려고 산업 현장을 외면한다고 오해했다. 각종 위원회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전문가는 어디 있고, 현장 사람들은 어디 있나, 푸념했다. 취임 백일을 맞이해 발표한 6대 혁신 과제의 속도는 더디기만 했고, 내부 조직을 보면 아직도 제대로 청산 안 된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다. 심지어 유족을 만난 자리에서 실례했고, 일부 임직원들은 회장이 일을 안 한다고 불평한다.

오랜 궁금증 여럿. 이런 사실을 다 알 텐데 왜 눈에 보이는 변화가 없는 걸까. 왜 국정감사 현장에서 임원들은 침묵했나. 역시 과거 마사회장들처럼 이 자리는 국회의원 출마 등 다른 일자리를 위한 디딤돌로만 여기는 걸까.

사실 변화는 감지되고 있었다. 마사회 분위기는 올해 더 달라졌다. PA(경마 지원직)부터 청소, 주차 및 관리하는 분들까지 임직원들은 고객을 맞이할 때 좀 더 개방된 모습이다. 삶에서 찾은 자유로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세대교체 되는 모습은 만나는 사람마다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더 나은 삶을 위한 도약(Ride For Life)이었던 걸까.

위로부터 시작한 변화는 전체를 뒤흔들고 있다. 성급하지 않고, 속도보다 방향을(Slowly But Steady) 우선시하면서 근본적인 혁신을 꾀하는 걸까. 안으로는 여전한 저항에 부딪히고 대외적으로도 여전히 인식 전환의 기미가 없자 일종의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한국마사회는 사업 구조 및 조직 재설계를 위한 컨설팅 용역이 한창이다. 대내외적인 악재로 경영 실적이 악화되고, 마사회를 향한 혁신 주문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근본적으로 조직 체질을 개선하고 중장기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한 차원으로 내년 초 대대적 사업 구조와 조직 개편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큰 그림을 그리고, 진중한 황소걸음을 꾸준히 걷고 있는 김낙순 한국마사회장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다. 취임 후 공평한 인사 발령 및 조직 운영 등 ‘신의 한수’를 보였던 그 통찰이 다시 빛을 발할 것이다. 한 가지 더. 현장과의 소통 물꼬를 직접 터주기 바란다. 그 자산을 쌓아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면 말산업계 종사자 모두가 상생할 꽃길이 펼쳐질 것이다.

이용준 기자 cromlee21@horsebiz.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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