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와 도박에 관한 소고(小考)

제목만으로, 말산업 전문 언론이라고, ‘경마는 도박이 아니’라고 생떼 쓴다고 오판하지 않기를. 필자는 경마 베팅을 거의 하지 않는다. ‘8번’, ‘3번’이 들어온다는 일명 ‘소스’가 있어도 내기는 안 한다. 경마가 도박이라고 생각하는 소신 때문이 아니라, 재미없다는 단 하나 이유 때문이다. 망아지 때부터 눈 여겨왔던 녀석이 경마장에서 질주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 빼고는.

<말산업저널> 사이트 개편 등으로 바빠 이번 주는 시간이 부족해 이전 기사–네이버·카카오 제휴 이전 기획-를 수정, 보완하는 거로 이번 칼럼을 갈음한다. 안 드러나는 중요한 일을 할 뿐 놀고 있는 건 아니다. 아마도 대중도, 말산업 종사자들도 이해 못 할 내용일 것이다. 늘 그렇듯 제삼자 입장에서, 필자가 좋아하는 철학가, 문학가들 관점에서 도박의 의미를 천착했다.

“내가 보기에는 도박에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이 어리석고 터무니없다는 고루한 생각, 모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생각이 더 우스운 것 같다. 도박이 다른 돈벌이 수단들보다, 예를 들어 장사보다 더 나쁘다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인가? 백 사람 중에 한 사람만이 돈을 따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름꾼』 중에서

러시아의 세계적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노름꾼』에서 한 말이다. 그는 당대의 사회·철학·종교적 문제들에 관한 인간 존재의 성찰을 다루며 ‘도박’의 본질을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결여, 현실 도피와 같은 정신적 공허함, 자기 비하의 쾌락, 마음속 선과 악의 투쟁, 광기에 가까운 강한 욕망들로 그려냈다.

도박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들과 도박을 하는 속칭 ‘꾼’들이 도박을 정의하는 내용은 다르다. 이 문제는 경마가 도박이냐 아니냐 하는 지리한 평행 논쟁의 시발점이다. 따라서 도박에 대한 정의 정립과 경마의 본질에 대한 공통된 이해 없이는 한국마사회가 사회 공헌을 많이 하고, 압도적으로 세수 기여를 하고, 세계적 레저 스포츠라고 떠들어도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라는 동물의 능력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경마의 특수성을 모른다느니, 국가가 세수 증대를 위해 합법적으로 하는 사업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일부’ 중독된 사람들과 한국경마사의 특수성 때문에 경마가 도박이라는 인식, 편견을 갖게 됐다는 말도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도박이란 무엇인가. 도박의 사전적 의미는 “요행수를 바라고 불가능하거나 위험한 일에 손을 대는 것”이다. 여기에는 ‘돈’이나 ‘재물’의 개념이 빠져 있다. 인생은 도박과 같다느니, 천국에 갈지 지옥에 갈지 이생에서의 삶을 걸고 도박한다느니 하며 도박이라는 단어를 삶, 철학 등의 개념과 연결해 사용하기도 한다. 요행이나 운을 바라는 ‘사행’의 의미에도 물론 ‘돈’이나 ‘재물’ 개념이 빠져 있다.

‘내기’나 ‘노름’의 정의는 더 포괄적이어서 돈과 재물의 개념을 포함한다. 이외에 미국의 익명도박자협회는 도박을 ‘자기를 위해서나 타인을 위해서 혹은 돈을 위해서건 아니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결과가 불확실한 우연 등에 의존하고 내기를 거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도박의 광의를 종합하면, “돈 혹은 가치 있는 소유물을 잃거나 따는 의식적 자발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도박의 정의와 고전적·현대적 의미 변화, 분류 방식, 동기와 중독 단계 등을 차치하더라도 이를 종합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도박의 확대된 의미는 돈 또는 재물과 결부돼 요행을 바라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주식이나 카지노, 로또, 토토, 화투, 마작, 경륜, 경정, 소싸움 등은 도박이다.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 돈을 걸고 베팅하는 경마 역시 도박이 맞다.

인간은 우연적(accident) 동물이다. 창조됐든 진화했든 인간은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우연히 태어나 우연한 시대와 장소에서 우연한 삶을 산다. 스스로 삶을 아무리 계획하고 개척해도 우연한 사건과 사람으로 인해 비우연적인 삶을 산다.

도박은 우연적 인간 존재와 삶을 가장 잘 드러낸다. 그 가운데 살아 있는 생물인 말을 이용한 도박, 경마는 이를 더 잘 드러내는 매력적인 ‘도박’이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나 확률상 밑지는 것이 없으므로 신을 믿겠다는 파스칼의 내기 이론(Pascal’s wager)처럼 도박 행위는 우연을 사는 인간 존재가 할 수 있는 행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제삼자가 직접 개입하는 게 아니라 제삼자인 말과 그 말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인간의 활동이 집약된 경마는 베팅하는 당사자가 개입해 주관적 확률을 계산하는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 총체적 활동이 경마산업이다.

경마산업의 본질은 훌륭한 경주마를 생산, 육성한다는 가장 큰 목적 아래 다양한 시설 건설, 관련 일자리 창출, 경마 예상지와 같은 정보 전달 매체 파생 등 모든 산업이 집약된 총체적 산업이라는 데서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경마 베팅에는 우연성이 담보된 도박 행위라는 요소가 있지만, 베팅 그 도박 행위가 경마산업의 본질이 아니라는 말이다.

따라서 경마, 정확히 말하자면 경마에 베팅하는 그 행위는 도박이지만 명절에 가족이 도란도란 모여 화투하는 일, 일개 직장인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로또를 사는 일, 개미들이 피를 보면서도 모니터 수치에 매달리며 주식하는 일과 같은 ‘도박’일 뿐이다.

사회적 이슈가 돼 잠잠할 날 없는 ‘화상경마장’ 역시 경마 베팅을 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곳에는 마권을 발매하고, 청소하며, 예상지를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모인 경마산업의 한 단면, 산업체이자 합법적인 장외발매소다. 복합적인 개념을 마녀사냥 하듯 한 단면만 부각하는 건 사회적 불평등의 한 단면이자 차별이며 공정이나 공의의 개념과 반대된다. 이 또한 논쟁이 되겠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합법이냐 불법이냐는 공적 합의가 더 중요하다.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흔히 범주(categories)를 혼용해 편견이나 잘못된 인식을 하게 되는 이 문제는 경마산업의 특수성과도 맞물려 경마는 곧 도박이라는 일반화를, 건강한 사람들의 집단적 착각과 환상을, 만만한 대상에 대해 낙인찍기를 즐기게 만든 주범이다. 경마산업은 도박꾼을 양성하는 산업이 아니며, 경마 또한 노름꾼을 만들기 위해 생기지 않았다. 우리나라 초창기 경마는 해외에서 우리 국민에게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러 온 선교사들이 당나귀 경주를 하며 파생됐다는 이야기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 땅에서는 경마팬이 성적소수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산다”고 일침을 가한 최현우 마주의 외침도 한 귀로 흘려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번, 경마는 ‘도박’이지만 도박이 아니다. 경마는 건전한 레저스포츠이고 많은 사람이 주말을 이용해 그저 쉽고 편하게 즐기는 게임이지만,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들어 내는 ‘어떤 이것(tode ti)’은 아니다. 즐기지 못한 책임은 우연히 태어나 우연성에 기대는 당사자에게만 있다. “경마는 논리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너무 많이 걸면 말(馬)이 진다”라는 찰스 부코스키의 ‘딜레마’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신은 삶도 거부했고, 자신과 사회의 이익도 거부했고, 시민과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의무도 거부했고, 자기 친구도 거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을 따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목표들도 단념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추억까지도 단념하고 말았습니다. 전 당신이 삶의 치열하고 힘찬 순간들을 살아가던 때를 기억합니다. 이제 당신의 꿈과 절실한 희망이란 고작 홀수와 짝수, 검은색과 빨간색 그리고 가운데 열두 숫자들 같은 것들에 지나지 않게 되어 버렸어요.”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노름꾼』 중에서

▲미국의 시인이자 작가로 최근 국내에도 잘 알려진 헨리 찰스 부코스키(Henry Charles Bukowski, 1920~1994)는 하층민의 국민 시인이었다. 그의 아내 린다와 경마장을 찾은 사진. 부코스키에게 경마는 곧 지난한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고 글쓰기의 원천이었다. 도박이란 삶을 이어가는 여러 도구 중 하나일 뿐이지 삶 자체가 될 수 없다는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이 많다.

말산업저널 이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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