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트 개편 ‘말산업저널’, 콘텐츠 보강 ‘말산업저널’가 가는 길

<말산업저널> 사이트를 대대적으로 개편한 지 벌써 두 달 반 넘었다. <말산업저널> 사이트(바로 가기)도 전문 기자들이 쓴 양질의 기사, 영상 등 콘텐츠를 송출하고 사이트를 꾸미는 일이 한창이다.

필자 기명이 나가는 기사는 매주 한 편씩 쓰는 ‘말산업 칼럼’이 전부지만, 출판하는 모든 기사를 검토하고 승인하고 포털에 송출하기까지 필자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만큼 편집 비중이 높아졌다. 종이신문을 만들 때나 PDF 버전을 제작할 때와 다르게 매일매일 마감이다.

모니터와 핸드폰으로 사이트를 수시로 체크하는 등 주 7일 밤낮없이 매달려도 알아주지 않고, 책상에 앉아 현장과 마주하니 답답하지만, ‘악마의 편집’이라는 말처럼 기사 편집이 주는 묘미는 대단히 매력 있다. 가치에 따라 기사 배치하고, 헤드라인 새로 뽑고 사진 편집하고 담당 기자와 연락하고 등등···. 사실 10여 년 전 같은 일을 전담한 적 있어서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당시 시민(전문) 기자들이 올리는 기사는 훨씬 많았고 주제도 어려운 편이었으며 요구도 다양했다. 작가를 발굴하고 기획하는 일 역시 필자의 몫이었다.

뉴스 콘텐츠·스탠드 제휴 심사가 한창이 지금, 필자를 애태우는 건 그래서 ‘조회 수’다. 기획과 편집 능력은, 단순한 취재보다 조회 수에 직격탄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에는 포털과 뉴스 검색 제휴가 없었어도 평균 수만 건이었다. 사이트 개편 이후 기본 조회 수가 안 나와 유혹이 드는 것도 사실. 제목 일일이 고쳐달고 광고 기사들처럼 선정적 문구를 붙이거나 세태에 영합하는 류의 기사 쓰는 건 일도 아닌데 물리적 시간은 한정돼 있으니 안타깝다.

고뇌하는 편집자가 가끔 웃을 땐 좋은 기사에서 위트 있는 문구나 생각을 읽었을 때다. 그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 고의적 오타나 불손한 문구나 보며 혀 차며 손 놓다가 양질의 기사를 대하니 숨 쉴 것 같다(자료= 말산업저널 홈페이지 갈무리).
고뇌하는 편집자가 가끔 웃을 땐 좋은 기사에서 위트 있는 문구나 생각을 읽었을 때다. 그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다. 고의적 오타나 불손한 문구나 보며 혀 차며 손 놓다가 양질의 기사를 대하니 숨 쉴 것 같다(자료= 말산업저널 홈페이지 갈무리).

한정된 시공간을 뛰어넘는 건 철학자 또는 그 아류인 시인이나 가능한 일. 그렇다고 기사 편집이 ‘주작’이 되는 순간, 또는 취재 기사가 ‘주작’이 되는 걸 방치하는 순간 공멸하리라. 가짜뉴스가 횡횡하고 가상 세계가 일상이 된 요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주작(做作)’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일종의 ‘조작’을 의미하는데 ‘관종’이나 ‘유하’, ‘버억’처럼 줄임말이거나 무너진 세태를 비관하는 자학적 표현인 줄 알았더니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든다’는 근본 있는 표준어다.

다행인 건 15%대에 머물던 재방문 비율이 40% 이상 늘었다는 점. 질 좋은, 잘 쓴 기사 조회 수는 여전히 높다는 점, 회원 가입이 꾸준히 늘고 있는 상황을 보면 기회는 살아 있다. 두 달 반 전, 필자는 이미 칼럼을 통해 “늦었다는 사실도 알고 추진력이 붙을지 걱정된다”고 했지만 “독자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일 없다”고 했듯 가능성은 남아 있다. 결국 문제는 우리 자신,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관행, 근본 구조를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단한 소명 의식, 바라지도 않는다.

기사의 가치 판단, 기획부터 취재와 편집까지 전 과정 모두 중요한 1순위 작업이다. <한겨레> 고경태 편집기자는 “인간의 사고체계가 구현된 말과 글을 편집하는 일은 수많은 편집 행위 중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라며 “인생도 지난한 편집의 과정”이기에 창조적일 것과 재미있을 것을 주문했다. 물론 윤리의식을 잊어서도 안 되지만.

스스로 행복을 찾고 재미를 느끼고 보람되려면 맥락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 편집처럼 인생도 맥락이다. 일관성이며 성실이며 자기 존재를 출판하는 일이다. 이 맥락(context)이 주류(mainstream)로 자리할 때, “문자가 생각을 지배한다”는 발터 벤야민의 금언처럼 떠벌리는 말보다 문자가 왜 중요한지 알지 않을까. 잠 못 잔 상태에서 써놓고 보니 허황한 꿈이요, 형이상학이다. 시처럼 쉽게 표현하자면, 열심히 하되 잘하겠다는 '메타포'다. 고전만 듣고 읽는 나르시스트로서 이제는 좋음(arete)만 마주 보고 싶다.

말산업저널 이용준 기자

저작권자 © 말산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