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에 마을에 사는 부인이 어린 손녀 둘을 데리고 올라왔다. 일곱 살 난 큰 손녀는 추위로 손등이 터진 빨간 손에 할아버지 드릴 우유를 병에 담아 들고 왔다. 종일 혼자 있던 영감님은 손녀 둘을 번갈아 껴안고 뽀뽀하고 쓰다듬고 코 닦아 주고 하면서 귀여워 어쩔 줄 몰랐다.

 

무레다라에서 파탈레파티를 향하는 언덕에서 바라본 설산 연봉. 사진 오른쪽 설산 연봉 어딘가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가 하얀 머리를 내밀고 있다. ⓒ김희수 

 

조랑말들은 쌀을 지고 살레리 마을로 이동하고 있다. ⓒ김희수 

 

아침 730분에 무레 다라를 나섰다. 날씨가 좋아서 설산들이 후련하게 보였다. 파탈레 파티를 향해서 오르막을 걷는 중에 하얀 자루들을 운반하는 조랑말들과 마부들을 만났다. 자루에 든 물건들은 대부분 쌀이고, 설탕이나 밀가루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전 날 오컬둥가에서 출발하여 파탈레 파티에서 자고 이 날은 살레리를 향해서 이동한다고 했다. 다사인 티하르 축제 기간의 방학을 집에서 식구들과 보내고 살레리의 학교 기숙사로 돌아가는 어린 학생들도 만났다.

10 시 경에 파탈레 파티에 도착했다. 돌포 바잘만큼이나 큰 장이 서는 마을이라고 했다. 늦은 아침을 먹느라고 1 시간 쯤 지체했다. 장 서는 마을은 장이 서야 사람 사는 마을 같다. 보통 때는 쓸쓸하다 못해 음산하다. 그래도 햇살이 따사로웠다. 따사로운 햇살 속에서 토종닭들이 흙을 파헤치며 벌레를 잡아먹고 있었다.

 

파탈레 파티에서 딱조아로 가는 사거리의 문과 이정표 ⓒ김홍성 

 

사거리의 불탑 한쪽 면에는 석판에 탱화를 그려 넣었다. ⓒ김홍성 

 

11시 경부터 다시 걸었다. 파탈레 파티에서 오컬둥가로 가는 고개 위에 올라서니 주변 지형이 대충 파악 되었다. 우리가 서 있는 능선은 북쪽의 피케에서 뻗어 내려와 오컬둥가로 이어지는 주능선이었다. 오컬둥가로 갈라지는 갈림길에서 북쪽의 피케로 이어지는 능선 길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은 내가 봄에 하루 묵었던 자프레로 이어지는 길이며, 자프레에서 세 시간을 더 걸으면 우리가 열흘 전에 묵었던 불부레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우리는 피케를 중심에 두고 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거의 돌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노부부와 두 손녀. ⓒ김홍성 

 

손녀들은 종일 보고 싶었던 할아버지 옆에서 떠날 줄 몰랐다. ⓒ김홍성 

 

1시 경, 딱조아(일명 시가네)에 이르렀을 때 앙 다와 씨가 '오늘은 여기서 쉬자'고 했다. 부지런히 걸으면 해지기 전에 자프레에 도착할 수 있겠다 싶어서 내친 김에 자프레까지 가고 했으나 앙 다와씨가 심한 오르막으로 세 시간을 걸어야 한다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우리보다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들어 주어야 했다. 자칫하면 그를 혹사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마냥 복종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전망 좋은 능선 위에 자리 잡은 딱조아에는 두 채의 주막집이 있었는데, 앙 다와는 우리를 첫 집으로 안내했다. 능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본가가 있다는 늙수그레한 영감 혼자 올라와 지키는 주막집이었다.

우리는 이층의 기도실을 쓰기로 했다. 여장을 푸는 중에 밖에서는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창문이 덜컹거렸다. 땀이 마르자 추위가 느껴졌다. 침낭 속에 들어가 있으면 덜 춥겠지만 대낮부터 침낭에 들어가 자다가는 긴긴 밤을 어찌 보내누 ……. 어쩔 수 없이 부엌 아궁이 옆에 앉아 장작불을 쬐면서 락시를 마셔야 했다.

저녁 무렵에 마을에 사는 부인이 어린 손녀 둘을 데리고 올라왔다. 일곱 살 난 큰 손녀는 추위로 손등이 터진 빨간 손에 할아버지 드릴 우유 병에 담아 들고 왔다. 종일 혼자 있던 영감님은 손녀 둘을 번갈아 껴안고 뽀뽀하고 쓰다듬고 코 닦아 주고 하면서 귀여워 어쩔 줄 몰랐다. 영감님의 부인과 손녀 둘은 저녁마다 올라와 자고 아침에는 다시 마을로 내려간다고 했다. <계속> 

 

 무레다라의 고원지대에서 필자와 김 선생.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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