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발로 선 돼지가 정상인가

모처럼 꿀 같은 하계휴가를 보내면서 칼럼도 구상하고 취재도 하려 했지만 모두 어그러졌다. 괴로우니 이유는 묻지 마시라. 시골에서 바다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는 상상을 출근한 오늘에서야 하다가 문득 ‘왕따’가 떠올라 급하게 글 하나 배설, ‘급똥’할까 한다.

학창 시절 필자는 ‘핵인싸’였다. 성적은 최상위권에 운동도 잘했고, 리더십도 있어 언제나 친구들과 선생님들 사이에서 중심인 ‘그런’ 아이였다. 첫사랑 선생님을 향한 순정은 전교(全校)에 퍼졌고, 불의한 선생의 폭력에 대항해 수업 거부를 주도하다 결국 그 선생을 타 학교로 전교(轉校)시킨 일화로 유명하다. 도식적 교육 체계가 싫어 차석으로 입학한 고등학교를 반 학기 만에 자퇴하고 지리산으로 잠적하자 친구들과 선생님은 몇 달을 찾아다녔다고.

요즘 말로 일진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너링(Inner-ring)’의 중심이었다. 자연히 이 세력에 끼고 싶어 하는 친구들은 많았지만, 그 숫자가 많아지면 ‘핵심’이라는 의미는 사라진다. ‘왕따’가 당시 신조어로 등장했는데 필자도 몇몇을 왕따시켰다. 물론 단순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행동거지 추레하다고 하는 품격 없는 이유에서는 아니다. 우리 조직(?)의 룰은 의외로 간단했는데 이중적이거나 거짓말하거나 뒤에서 험담하는 못된 버릇 가진 녀석들, 짜고 치는 게 뻔히 보이는 한통속인데도 아니라고 잡아떼는, 한마디로 지질하고 좀스러운 것들을 멀리했다.

두 발로 선 돼지들의 뇌 속에는 본디 도의적 책임이란 게 없다. 복서가 일한 노동의 대가, 그 ‘말판’을 깔아놓은 것일 뿐 개인의 죽음과 관련 없다고 한다. 과연 개인사적인 게 전부인가? 이미 제보와 글, 자료는 차고 넘친다(사진= https://www.easons.com 갈무리).
두 발로 선 돼지들의 뇌 속에는 본디 도의적 책임이란 게 없다. 과연 개인적인 게 전부인가. 이미 제보와 글, 자료는 차고 넘친다(사진= https://www.easons.com 갈무리).

이렇게 쌓인 친분이란 건 참 무서워서 성인이 된 후에도 ‘학연’, ‘지연’ 등으로 성장해 건전한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가장 암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몸 안에서 기생하고 있어도 아픈 줄 모르고, 오히려 건강에 좋은 부분이 있다고까지 긍정하니 심각하다. ‘장원 농장’의 겁먹은 동물들처럼, 잘못된 만남인 걸 알면서도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 바보가 된 집단 ‘멘붕’ 상황이랄까.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그것도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기자질 하면서 업보 때문인지 필자도 여러 무리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 본업인 감시와 비판에 열중하니 취재원도 ‘혹 나에게까지?’란 경계심을 품고 소원해진다. 거마비 안 받고 언론 공정을 외치니 꽁한 비즈니스 전문가들은 연락 두절이다. 말 많은 이곳에서 소신 한마디 했다가 그대로 기사화되니 입을 닫고 잠적한다. ‘진짜’ 인간들은 응원하고 격려하는데 ‘가짜’ 동물이 그렇다는 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필자도 “네 다리는 좋고 두 다리는 더 좋다!”는 양들의 화답에 두 발을 딛고 일어선 돼지, ‘나폴레옹’을 자처한 건 아닌지 늘 성찰한다. 무능한 인간을 추방하고 평등한 돼지 세상을 만들었는데 두 발로 서서 감시만 하는 돼지가 된 건 아닌지, 그 돼지 집단을 초래한 건 아닌지 말이다.

지난주 조성곤 기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젊고 유망한 청년, 스포츠 스타의 죽음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팬들은 그를 ‘경마를 진정으로 사랑한 유능한 기수’, ‘선량하고 앞장서서 활동하는 성실한 한 사람’으로 기억했고, 추모했다. 감히 비유하자면, 그는 모든 동물의 영웅이자 먼저 일하며 어려움을 헤쳐나간 충성스러운 말(馬), ‘복서’이지 않을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복서는 돼지 집단의 잘못을 목격하고도 단지 “삶이 끝날 때까지 풍차가 돌아가는 걸 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앞장서 전투에 나섰다가 결국 다쳐 버림받게 된다. 인간과 영합한 돼지와 앞잡이 개들은 그를 폐마 도살업자에 팔아넘겼고, 어리석은 농장 동물들은 그가 행복하게 죽었다고 믿는다.

지질하고 좀스럽고 무지몽매하면, 한통속으로 똘똘 뭉친 돼지들이 시키고 지시하는 대로 믿고 따르고 굽신거리기 마련이다. “나폴레옹은 항상 옳다”고 믿다가 불의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야 의심을 하게 된 복서도 사실 이미 늦었다. “잘해보려 했지만” 이미 혼자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사실, 충성스럽고 우직하고 진중한 이를 혼자 내버려 둔 농장 동물들이 더 원망스럽다. 앞장서 일한 그를 왕따시키고 외면했다. 얼마나 많은 상실감이 그를 지배했을까.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의 ‘두 마리 말.’ “무지개색을 훔친 화가”는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다 동물, 특히 말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산업화로 상실한 인간성 회복의 상징으로 동물의 순수함을 선택했다. 그에게 말은 곧 영적 지식으로 향하는 통로였다고.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 프란츠 마르크(Franz Marc)의 ‘두 마리 말.’ “무지개색을 훔친 화가”는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다 동물, 특히 말의 눈에 비친 세상을 그림에 담았다. 그는 산업화로 상실한 인간성 회복의 상징으로 동물의 순수함을 선택했다. 그에게 말은 곧 영적 지식으로 향하는 통로였다고.

이유야 어찌 됐든 관리사, 임직원, 기수까지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는 건 이 조직에, 우리 말산업 농장에 문제가 있다는 분명한 사인이다. 구정물에 살며 인간인 척하는 개돼지들이야 대국민 사과는커녕 도의적 책임도 못 느끼고 관련 없다고 잡아떼지만, 말 제대로 못 하고 웅성웅성하기만 할 뿐 순종이 미덕인 줄 아는 ‘양무리’, 피지배층 동물들은 정말 자존심도, 힘도, 입도 없는가? 현실에서 목격한 복서의 죽음 앞에서도 언제까지 집단 침묵할 것인가? 약자 앞에서 강하고, 강자 앞에선 약한 개돼지들을 색출하려면 인간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추모 영상에서 인터뷰하다 울컥하는 생전의 그, 팬들의 응원에 멋쩍게 웃는 그를 보고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는 우리 경마계에서 팬덤을 형성한 유일한, 진실한 기수였다. 특정 집단에서 일한 사람이 떠난 이유, 삶을 포기한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일 수 없다는 게 필자 주관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말산업저널 이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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