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잔 출연 와이스뮬러, 49개 금메달 펠프스, 주부 선수 맥코믹 등

7월 12일 시작된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 경영 종목이 시작하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올림픽, 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와 함께 메가 스포츠 행사로 인정을 받고 있기도 하다. 또한 수영은 육상과 더불어 1896년 1회 아테네 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돼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세계수영선수권대회는 대회 마다 수많은 스타를 배출해 오고 있다. 이제까지 세계 수영계의 역사를 바꿔놓거나, 많은 화제를 모았던 수영 선수들은 누구일까? 5대 수영 종목 기인(奇人)들을 만나보았다.

원조 타잔 조니 와이스뮬러, 올림픽 금메달 5개나 따내

우리에게 타잔 영화로 너무나 잘 알려진, 조니 와이스뮬러는 원래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다. 조니 와이스뮬러는 1924년 파리올림픽에 출전해서 메달을 4개나 땄다. 자유형 100m와 200m 그리고 800m 계주에서 모두 금메달을 딴 후 수구 경기에도 출전해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당시만 해도 일정이 맞으면 경영 선수가 수구 경기에도 출전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조니 와이스뮬러는 4년 후에 벌어진 1928년 암스테르담 올림픽에서도 남자 자유형 100m와 8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러니까 두 번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와 동메달 1개 등 모두 6개의 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그 가운데 수구 종목 메달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후 조니 와이스뮬러는 수영복 장사로 나섰다. 수영복 장사를 하러 돌아다니던 어느 날 헐리우드 MGM영화사로부터 밀림영화 주인공 타잔 역할에 응모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그러나 조니는 영화배우를 할 생각이 없어서 거절했다.

MGM 영화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클라크 케이블과 점심 자리를 마련할 테니 나와 달라고 해서 할 수 없이 응했고, 점심을 먹은 후 그들에 이끌려서 MGM 스튜디오로 가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았다. 타잔 역 응모자는 무려 150여 명이나 되었다.

조니는 그 후 자신이 타잔 역에 응모했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고 수영복 세일에 몰두했는데, 드디어 MGM 영화사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았다. 조니 와이스뮬러는 1932년부터 48년까지 17년 동안 무려 12편이 타잔 시리즈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조니 와이스뮬러는 1984년 1월20일 멕시코에서 사망했는데, 국제수영연맹(FINA)은 조니 와이스뮬러를 1950년대 이전 최고의 수영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유대인 출신 마크 스피츠

유대인 출신의 마크 스피츠는 마이클 펠프스 이전 세계 최고의 수영 선수였다. 마크 스피츠는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남자 자유형 100m, 접영 100m 등 7종목에서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금메달 7개를 땄다.

마크 스피츠는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도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따서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9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등 모두 11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마크 스피츠는 키는 183cm로 별로 크지 않지만 유난히 다리가 길었다. 다리가 너무 길어서 마치 휘청거리며 걷는 듯했다. 그리고 22살의 치과대생답지 않게 콧수염을 길러서 나이가 들어 보였다.

마크 스피츠는 유대인답게 은퇴를 한 후 면도기, 우유 회사 등의 CF모델을 하며 당시로는 거금인 500만 달러를 벌었고, 그 돈을 바탕으로 부동산, 의류, 금융 회사를 차려서 사업에도 성공을 했다.

마이클 펠프스 선수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따낸 금메달만 무려 49개다. 모두 61개나 된다.
마이클 펠프스 선수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따낸 금메달만 무려 49개다. 모두 61개나 된다.

메이저대회에서만 49개 금메달을 딴 마이클 펠프스

미국의 마이클 펠프스는 세계 스포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 가운데 한 명이다. 육상의 우사인 볼트와 견줘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업적을 남겼다.

마이클 펠프스는 박태환 선수가 첫 금메달을 딴 2007 멜버른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7관왕에 올랐다. 그리고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8관을 차지했다. 이 기록은 당분간 깨지지 않을 것 같다.

마이클 펠프스는 올림픽에서만 금메달 23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 등 모두 28개의 메달을 땄는데 역시 이 기록도 역시 불멸의 기록이 될 것 같다. 그리고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금메달 26개, 은메달 6개, 동메달 1개 등 모두 33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마이클 펠프스가 올림픽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따낸 금메달만 무려 49개다. 모두 합하면 61개나 된다.

마이클 펠프스가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이유는 타고난 체격 조건을 빼놓을 수가 없다. 1m93cm, 90kg의 수영선수로서 알맞은 체격, 긴 팔(윙 스핀이 201cm나 된다) 그리고 320mm나 되는 긴 발은 마치 오리발을 낀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그리고 상상을 넘어서는 엄청난 훈련 량이라고 할 수 있다.

부상 병동, 주부 다이버 패트 맥코믹

육상의 마라톤과 10종 경기를 가장 힘든 종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수영의 하이다이빙과 스프링보드 다이빙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종목이다.

1950년대 세계 다이빙계의 최고 선수였던 미국의 패트 맥코믹 선수는 1950년, 건강검진을 받았다.

“머리 가죽이 15cm나 찢겨 졌다가 아물었고, 척추를 비롯해서 등 밑의 여러 곳이 금이 가 있고, 목뼈에 찰상(擦傷), 발과 목에 열상(裂傷)을 입었다. 갈비뼈 한 개도 부러졌다가 아물었고, 손가락 한 마디가 부러졌다. 턱뼈가 느슨해졌고, 윗니가 쪼개졌다.”

패트 맥코믹을 검진한 의사는 “건물이 무너져서 밑이 깔려 있다가 구조된 부상자 말고는 이렇게 험악한 부상을 입은 사람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다이빙 선수들이 물새 같은 예쁜 동작과 묘기를 연출하기까지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주부 선수였던 패트 맥코믹은 그 같은 험한 몸으로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 출전해서 스프링보도 다이빙과 하이다이빙 2관왕을 차지했다. 맥코믹이 올림픽 2관왕에 오르자 프로선수로 전향하라는 권유와 함께 CF 제의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맥코믹은 “나는 주부로서 집안을 가꾸는 것과 4년 후 멜버른 올림픽에서 또다시 2관왕을 차지한 후 은퇴하는 것이 목표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멕코믹은 그 후 4년간 주부 역할을 착실히 하면서 일주일에 교회에 가는 일요일을 뺀 6일 동안 하루에 스프링보드 다이빙 50번, 하이다이빙 50번 등 100번씩 뛰어내렸다.

맥코믹은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스프링보드 다이빙과 하이다이빙에서 모두 금메달을 딴 후 “이제 나의 도전은 끝났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은 가정에서 훌륭한 주부 역할을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뒤 곧바로 은퇴했다.

완벽한 금메달 세리머니 준비한 조오련

고(故) 조오련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스포츠맨 가운데서도 가장 쇼맨십이 뛰어난 선수였다.

조오련 선수는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할 때만 해도 거의 무명선수였다. 당시 한국 선수단에서는 조오련 선수를 메달 후보에 넣지 않았었다. 그러나 조오련 선수는 남자 자유형 1,500m에서 아시아 최강인 일본 선수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따내더니 400m에서도 다시 금메달을 획득해 2관왕에 올랐다.

깜짝 금메달을 딴 것보다 더 사람들의 의표를 찌른 것은 언제 준비했는지 하얀 한산모시로 산뜻하게 지은 한복을 몸에 걸치고 태극마크가 선명한 천을 머리에 두르고 당당하게 시상대 위에 올라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니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수영 종목은 메달 세리머니를 할 때 으레 유니폼 한 벌 달랑 입고 시상대에 오르는 것이 보통인데, 하얀 모시로 지은 한복에 머리에 태극마크를 둘렀으니 보는 사람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조오련은 4년 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다시 2관왕을 차지한 후 은퇴를 해서 패션모델로도 나서고, 대한해협을 건너거나 독도를 30바퀴 도는 이벤트 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도 했었다.

조오련 선수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 1500m를 2개 대회를 연속 우승하고 시상식에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두르고 섰다(사진=연합뉴스).
조오련 선수는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자유형 400m, 1500m를 2개 대회를 연속 우승하고 시상식에 태극기가 그려진 머리띠를 두르고 섰다(사진=연합뉴스).

마이클 펠프스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끝으로 은퇴를 했다.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이 열리기 직전, 2016년 6월13일 미스 캘리포니아 출신 니콜 존슨과 결혼했고, 그 한 달 전인 5월에 첫아들 부머 로버트 펠프스를 낳았다. 미국의 <USA TODAY> 기자가 2019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마이클 펠프스 집을 찾았다.

기자 ; 집이 너무 좋다. 숲속에 있어서 피톤치드도 풍부하고.

펠프스 ; 그 피톤치드 때문에 이 집에서 오래 살고 있다. 내가 어렸을 때 ADHD(주위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을 앓은 것이 피톤치드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해서.

기자 ; 바로 그 ADHD 덕에 훌륭한 수영 선수가 되지 않았는가.

펠프스 ; 하긴, 수영을 하면 ADHD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은가 했는데, 딱 맞아떨어진 경우다.

기자 ; 광주 세계수영선수권대회가 열리게 돼서 마음이 설레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겠고.

펠프스 ; 카엘렙 드레셀(2017년 대회 7관왕), 케이티 레더키(5관왕) 같은 훌륭한 후배들이 있어서 조금도 섭섭하지 않다.

기자 ; 그런데 2세 로버트 펠프스가 이제 4살인데 수영시킬 생각은 없나?

펠프스 ; 글쎄, 로버트가 아직 ADHD 증세를 보이지 않고 있어서 지켜보는 중이다.

<말산업저널>는 국내 최초의 스포츠 칼럼니스트, 기영노 기자의 ‘스포츠 평론가 기영노의 콩트’를 연재합니다. 상상력을 바탕으로 쓴 기영노 콩트는 축구, 테니스, 야구 등 각 스포츠 규칙을 콩트 형식을 빌려 쉽고 재미있게 풀어쓰는 기획 연재입니다. 기영노 기자는 월간 <베이스볼>, <민주일보>, <일요신문>에서 스포츠 전문 기자 생활을 했으며 1982년부터 스포츠 평론가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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