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탄생 220주년, 세계적 위상 윤이상 음악, 푸치니 스토리텔링 오페라 ‘라 보엠’

2020년은 음악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해다. 악성(樂聖) 루드비히 판 베토벤(1770~1827)의 탄생 25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도기를 이끈 최초의 직업적인 음악가로서, 악성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대한 음악사적 업적을 쌓았다.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하이든, 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에 입각했고, 문학계의 동시대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았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추구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국 음악계를 포함해 전 세계 음악계는 2020년을 맞아 위대한 악성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음악회와 연주회를 준비하고 있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힘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베토벤의 작품에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며, 자신이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는 여러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들에 대해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음악 형식에서도 위대한 혁신가였으며, 특히 교향곡 9번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성악과 기악을 한데 결합시켰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개인적 삶은 병든 귀에 대한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중요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간 작곡된 것이었다.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사라진 때에 살았던 베토벤은 악보 출판과 작곡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지만, 더욱 위대한 작품을 창작하는 인간정신을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베토벤은 17701217일 요한 판 베토벤과 마리아 마크달레나 판 베토벤 사이에서 태어나 독일 북서부 본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들 사이에 생존한 자식 중 맏아들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인 그의 가문은 할아버지 때 처음 본에 정착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쾰른 대주교 선제후의 궁정 합창단에 들어가, 음악감독의 자리까지 올랐다. 아버지 역시 선제후 궁정 합창단의 가수였으므로 18세기에 흔히 볼 수 있던 대로 베토벤도 음악가 가문에서 태어난 셈이었다. 가문은 처음 얼마간 매우 번창했으나, 1773년 할아버지가 죽고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 증세를 보이게 됨에 따라 점차 가난해졌다. 베토벤은 11세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고, 18세에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아버지 요한은 베토벤이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것을 파악하고 그를 혹독한 훈련을 통해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키우려 했으나 이러한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고, 베토벤은 청년기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783년 베토벤은 스승인 네페의 도움을 받아 현존하는 최초의 작품인 <드레슬러에 의한 행진곡 주제에 의한 변주곡>(Variations on March by Dressler)을 만하임에서 출판했다. 1783년 본 오페라단에서 계속 저음을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연주자로 임명되었고, 1787년에는 1784년 이래로 대주교 선제후로 있었던 막시밀리안 프란츠의 후원을 받아 빈으로 가 모차르트에게 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14세 때 궁정 극장의 하프시코드의 연주자가 된 그는 17세 때 빈으로 여행하여 처음으로 모차르트를 만나 그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의 뛰어난 연주솜씨는 모차르트를 깜짝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22세 때는 하이든에게 음악을 배운 뒤 알브레히츠베르거에게 사사한 그는 빈에서 피아니스트로서 인정을 받고 인기를 모으는 음악가로 성장해나갔다.

중년 이후에 음악가로서는 가장 소중한 귀가 점점 들리지 않게 되었다. 여러 방법으로 고쳐 보려고 애를 썼으나, 귓병은 점점 더 심해져만 갔다. 한때는 자살할 생각으로 유서까지 썼으나, 이 괴로운 운명과 맞서서 싸워 이긴 그의 영혼의 부르짖음은 오히려 더욱 훌륭한 음악을 창작하게 했다. 베토벤은 완고하고 고집스러웠으며 거친듯한 외모를 지녔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인데다 애정과 유머가 가득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 자연을 무척 사랑했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높은 교양을 쌓기 위해 노력하는 유형의 음악가였다.

베토벤은 모차르트나 슈베르트처럼 악상이 샘솟듯이 떠오르는 천재형 작곡가는 아니었지만, 진정으로 노력한 음악영웅으로 평가받는다. 악상이 떠오르면 적어 두었다가 작곡 구성의 동기로 이용했던 그의 음악은 주제가 완전하며 아름답고 완벽하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그는 고전적 현실을 충분히 존중하였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내용을 창의적으로 적용했고, 이를 통해 빈 고전파 음악을 최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으며, 더 나아가서는 낭만파 음악의 길을 열었다.

베토벤의 작품은 수법이나 경향으로 보아 보통 3시기로 나눈다. 1기는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영향을 많이 받은 시기고, 2기는 제 1기의 뒤를 이어 그의 개성을 충분히 살린 시기며, 3기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가 펼쳐진 시기로 낭만파 초기의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활동했던 때다. 베토벤으로 인하여 피아노 소나타나 교향곡 등에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다. 베토벤의 교향곡 중 교향곡 제3<전원>, 교향곡 제9<합창> 등은 가장 유명한 곡들이다. 특히 교향곡 제9<합창>은 청각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감각을 초월한 제 3기 시대의 작품으로 최고의 예술이라고 일컬어진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음악과 더불어 일생을 마친 베토벤은 1827326 일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음악계를 포함해 전 세계 음악계는 2020년을 앞두고, 위대한 악성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각종 음악회와 학술대회 등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차지하는 세계음악계에서의 위상과 권위, 세계인들이 그와 그의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 수 있는 지점이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스토리텔링 오페라 ‘라 보엠’을 통해 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보내며 낭만과 소망, 치유와 힐링을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모두 모여 푸치니의 오페라를 즐기고, 연말을 윤이상과 베토벤의 아름답고 감동 가득한 음악으로 나누면 어떨까?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스토리텔링 오페라 ‘라 보엠’을 통해 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보내며 낭만과 소망, 치유와 힐링을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모두 모여 푸치니의 오페라를 즐기고, 연말을 윤이상과 베토벤의 아름답고 감동 가득한 음악으로 나누면 어떨까?

 

윤이상을 통해 한국을 본다! 탄생 103주년, 타계 25주년

2020년은 또한 한국이 배출한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탄생 103주년이자 타계 25주년이 되는 해다. 1917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자란 윤이상은 시인 윤기현의 3대 독자로 음악공부를 반대하는 아버지를 피해 17세에 일본으로 유학, 오사카(大阪)음악원에서 첼로·음악이론·작곡 등을 배웠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온 그는 화양학원의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와 작곡을 독학했으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발표했다. 1939년에는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이케노우치 토모지로우(池內友次郞)에게서 대위법을 배웠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하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8·15해방 후에는 부산시립고아원의 소장이 되어 전쟁고아들을 보살피기도 했다.

1948년 통영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있었고 1953년 서울에 있는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 있으며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이즈음 가곡과 실내악 등의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6년에는 <현악4중주 1><피아노 트리오>로 서울시 문화상을 받았는데, 이 수상을 계기로 선진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배우기 위해 1956년 유럽으로 떠났다.

이후 프랑스국립고등음악원에서 P. 르벨과 T. 오벵, 서베를린음악대학에서 R. 슈바르츠 쉴링, J. 루퍼, B. 블라허에게서 음악이론과 작곡기법을 배웠다. 1959년 네덜란드 빌토벤에서 <피아노를 위한 5개의 소품>, 다름슈타트 음악제에서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이 초연되어 열광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그의 이름이 세계 음악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0년 서독 프라이부르크에서 중국·한국의 궁중음악에 대한 라디오 방송을 했고 1962년에는 관현악곡 <바라(婆羅)>가 베를린 라디오 방송관현악단에 의해 초연되었다. 1963년 북한을 방문했고 1965년 서독 하노버에서 <오 연꽃 속의 진주여!>를 초연했다.

그러나 1967, 1963년 예술적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했던 일이 중앙정보부에 포착되었고, 한국 중앙정보부는 그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체포해 서울로 송환했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동베를린사건으로 인해 간첩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68, 1969년의 2번에 걸쳐 10년이 감형되었다가 동료음악가·교수들의 국제적 항의와 독일정부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감옥에서도 오페라 <나비의 미망인>(1967)을 작곡하고 그밖에 <>·<영상> 등을 작곡했다.

19692월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그는 서독으로 건너가 하노버음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2년 뒤인 1971년부터가족들과 함께 서독에 귀화했다. 1971년 뮌헨 올림픽의 문화행사로 위촉받아 작곡한 오페라 <심청>은 그에게 세계적인 작곡가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1977년에는 모교인 서베를린예술대학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을 접한 그는 이듬해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관현악 작품 <광주여 영원히>를 발표했다.

1988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민족합동음악축전을 제의했는데, 2년 뒤 199010월 북한을 방문해 분단 이후 최초로 범민족통일음악회를 주도해 남북한 문화교류의 첫장을 열었다. 늘 고국을 그리워했던 그는 복권이 이루어진 19949, 서울·광주·부산에서 개최된 '윤이상음악제''한국창작오페라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고국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와의 갈등으로 끝내 귀국하지 못했다. 199511월 지병인 당뇨병, 기관지천식, 신부전증이 악화되어 결국 그리던 고향땅을 밟지 못한 채 베를린에서 숨을 거두었다.

작품으로는 네편의 오페라 <유동의 꿈>(1965), <나비의 미망인>(1967), <요정의 사랑>(1969), <심청>(1971)와 피아노를 위한 <다섯 개의 소품>(1958), 플루트를 위한 5개의 <연습곡>(1974) 등의 독주, 교향시 <광주여 영원히>(1981)<교향곡 제1~4>(1982~85), 성악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6) 등 다수의 협주곡과 실내악곡이 있다. 그의 음악세계는 동양적 직관과 서양적 분석, 한국의 전통음악과 서양음악의 기법이 변증법적 긴장관계로 만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유럽의 평론가들로부터 '20세기의 중요한 작곡가 56', '유럽에 현존하는 5대 작곡가', 독일 자아브뤼겐 방송이 선정한 '20세기 100년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그는 통영에 윤이상기념공원과 기념관이 건축되어 있고, 윤이상 국제음악콩쿠르가 열리는 등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이끈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주의 오페라의 거장, 탄생 122주년, 라 보엠의 힘

2020년 또한 이탈리아의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1858~1924)의 탄생 122주년, 타계 96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사실주의 오페라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푸치니는 2세기에 걸쳐 루카에 있는 산타마르티노 성당의 음악감독을 배출했던 가문의 마지막 자손이었다. 그는 5세 때 아버지의 사망 이후로 루카 행정 당국이 소액의 연금으로 푸치니의 가족을 부양할 정도로 가난에 시달렸으며, 가업을 잇기 위해 음악에 입문했던 그는 성년에 이르기까지 성당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담당해야 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의 제자였던 두 사람의 음악가로부터 배웠으며 지방의 작은 교회에서 오르간을 연주했다. 1876년 피사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Aida)를 관람하고는 오페라가 진정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1880년 가을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는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실내악 작곡가인 안토니오 바치니와 오페라 <라 조콘다>(La gioconda)를 작곡한 아밀카레 폰키엘리에게 배웠다. 1883716일에 학위를 받았으며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기악곡 <카프리초 신포니코>(Capriccio sinfonico)는 밀라노의 영향력 있는 음악계의 주목을 끌었다.

같은 해 그는 단막 오페라 경연대회에 출품한 <요정 빌리>(Le villi)는 작곡가이자 대본가인 아리고 보이토가 이끄는 친구들의 모임이 이 작품의 공연을 위해 보조금을 지급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고, 1884531일 밀라노의 달 베르메 극장에서 있었던 이 작품의 초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요정 빌리>는 극적인 힘과 오페라적인 선율이 두드러졌으며 관현악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바그너 오페라의 영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악 출판업자인 줄리오 리코르디는 2막으로 확대한다는 조건을 명시하고 즉시 판권을 사들였으며, 라 스칼라에서 공연할 새 오페라를 푸치니에게 의뢰했고 월급도 지급하는 등 성공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푸치니와 리코르디 사이의 오랜 협력관계가 시작되었으며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충실한 친구이자 조언자가 되었다.

어머니가 죽자 푸치니는 유부녀인 엘비라 제미냐니와 함께 스캔들을 일으키며 루카를 떠났고, 그들은 밀라노 근처 몬차에 보금자리를 꾸몄고 그곳에서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1890년 그들은 밀라노로 거처를 옮겼고 1891년에는 토스카나의 마사추콜리 호숫가에 위치한 어촌인 토레델라고로 이사했다. 푸치니에게 이 집은 삶의 피난처가 되었으며, 죽음을 3년 앞두고 비아레조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1889년 프랑스의 작가 알프레드 드 뮈세의 시극에 곡을 붙인 푸치니의 2번째 오페라 <에드가>(Edgar)가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으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코르디는 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독일의 바이로이트로 보내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Die Meistersinger von Nürnberg)를 듣게 했다.

푸치니는 오페라 <마농 레스코>(Manon Lescaut)에 대한 계획을 품고 바이로이트에서 돌아왔다. 대본은 아베 프레보가 쓴 18세기 소설을 기초로 했으며, 프랑스의 작곡가 J. 마스네도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오페라 <마농>(Manon)을 작곡했다. 이 오페라를 작곡하면서부터 푸치니는 오페라의 주제를 선택하는 데 신중을 기하게 되었고 대본작업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여주인공인 마농 레스코의 심리적 묘사는 이 작품에 이어 발표된 푸치니의 다른 오페라들의 극적인 성격을 지배한다. 청중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던 그는 그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작품을 써나갔으며 그것이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주었다. 극적인 면에서 생동감을 가지고 있는 <마농 레스코>의 악보는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서부의 아가씨)(1910) 등 성숙기에 작곡된 오페라들에서 찾을 수 있는 세련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고 있다. 이들 네 작품들 역시 감동적인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고, 여주인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비극적인 결말을 담고 있다. 아울러 네 작품의 관현악 또한 모두 정제되고 투명한 어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주제를 상기시키는 섬세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라 보엠>·<토스카>·<나비부인>에서 그는 작가인 주세페 자코사, 루이지 일리카와 함께 공동작업을 했다.

<서부의 아가씨>19101210일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뉴욕 시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으로 그는 완숙기의 끝에 서게 되었다. 1917년 모나코의 몬테카를로에서 오페라 제비 La rondine가 초연되었고, 1918년 뉴욕 시에서 멜로드라마 <외투>(Il tabarro), 감상적 오페라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희극적 오페라 <잔니 스키키>(Gianni Schicchi)를 발표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 <투란도트>18세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희곡 <투란도트>를 토대로 하는 투란도트의 전설을 기초로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은 이탈리아 오페라 중 유일하게 인상주의적 양식으로 작곡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의 2중창을 작곡하지 못하고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겼다. 인후암을 앓았던 그는 수술을 위해 브뤼셀로 옮겨졌으나 며칠 후 투란도트의 미완성 악보를 손에 쥔 채 눈을 감았다. 그의 사망후 1926425<투란도트>는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는데, 초연의 지휘를 맡았던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죽기 전 작곡했던 지점에서 작품을 마무리했다. 마지막 두 장면은 푸치니의 스케치에 따라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는 푸치니를 위한 엄숙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그의 시신은 토레델라고로 옮겨졌으며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엘비라와 안토니오 역시 그곳에 묻혔다. 그곳에 있는 푸치니의 집은 현재 박물관과 자료보관소로 사용되고 있다.

대다수의 푸치니 오페라들은 '사랑을 위해 살았던 자는 사랑을 위해 죽었다'라는 주제를 제시하며, 균형잡힌 극적 구조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으로 그는 연기·감동·갈등만이 오페라의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안식·명상·서정성의 계기들이 내포되어야 함을 제시한다. 이러한 계기들을 마련하기 위해 독창적인 선율을 만들었는데, 그와 같은 선율들은 밝고 정열적이지만 병적인 성향이 내포되어 있다. 그는 관현악단에 보다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가수 중심으로 전개되는 전통적인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고수했으며, 여러 가지 면에서 전형적인 세기말적 예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푸치니는 사실주의 오페라의 가장 위대한 대가로 자리잡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스토리텔링 오페라 라 보엠’, 음악의 힘으로 힐링을!

124~5일에는 비영리예술단체 뉴뮤직컴퍼니(N.M.C.)' 주최로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라 보엠이 스토리텔링 오페라로 음악팬들을 찾는다. 스토리텔링 오페라는 음악애호가뿐만 아니라 일반대중들도 클래식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도록, 편안하면서도 수준 높은 음악회에 초점을 맞춘 행복한 음악회를 표방하고 있다.

남자주인공 로돌포 역에는 테너 김은국·오상택, 여자주인공 미미 역에는 소프라노 이소연·박소은 등 정상의 성악가들이 열연하며, 로돌포와 미미의 비극적인 사랑을 관객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한다. 이번 스토리텔링 오페라는 오페라의 본질과 푸치니가 의도했던 극적 요소를 재현하는 한편 3개월 동안 매주 4회 이상 강도 높은 연습과 리허설을 통해 구축한 음악적 기량과 수준 높은 곡 해석을 담고 있다. 특히 뛰어난 성악가들의 기량과 독특한 캐릭터 및 연주 포부, 연습장면과 회의모습, 공연장의 생생한 열기를 그대로 전할 제작노트를 매일 관객과 음악을 애호하는 시민들에게 전하고 있다.

공연 장면, 주요 등장 성악가들의 인터뷰, 현장 동영상 등을 통해 공연 당일로 끝나는 오페라가 아니라, 음악가와 대중이 함께 하는 소통과 공감을 만들어내는 오페라로 선보일 예정이어서 음악팬들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음악과 예술을 사랑하는 우리 시민들이 스토리텔링 오페라 라 보엠을 통해 다사다난했던 2019년을 보내며 낭만과 소망, 치유와 힐링을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모두 모여 푸치니의 오페라를 즐기고, 연말을 윤이상과 베토벤의 아름답고 감동 가득한 음악으로 나누면 어떨까? 청년실업 등 사회적 풍파와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 전 세계적인 사회적 양극화로 고통받아온 이들이 함께 오페라를 즐기며, 새로운 성찰과 각오, 발전과 성장을 다짐해보면 어떨까? 음악의 힘으로, 예술의 꿈으로 갈등과 대립을 딛고 대한민국이 더욱 행복하고 멋진 나라로 21세기 세계사를 주도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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