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마크의 가슴에 품은 '한국인' 재일교포 유도선수 김임환·조목희 선수의 이야기

일제 강점기 약 200만 명에서 현재까지도 약 43만 명의 재일교포들이 일본 땅에서 뿌리를 기억하며 지내고 있다. '자이니치'라는 단어로도 익숙한 그들은 분명한 우리나라 국민이지만,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일본이라는 낯선 땅에서 삶을 영위해야 했다. 또한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 온전히 속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추성훈과 안창림 선수처럼 일본 귀화 유혹을 뿌리치고 태극마크를 가슴에 단 재일교포 선수들이 있다. 바로 남자 -66kg급 김임환 선수(세계랭킹 12위. 이하 ‘김’)와 여자 -63kg급 조목희 선수(세계랭킹 30위. 이하 ‘조’)다. 재일교포 3세로 항상 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지내왔다는 그들은 각 2016년, 2019년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 유도 국가대표로 활약해왔다. 도쿄 올림픽과 광복절을 맞아, 일본과 대한민국의 경계에서 두 국가를 잇는 재일교포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두 선수는 고등학생 시절 전국체전 '재일동포 선수단'으로 처음 한국에 방문했다. 그곳에서 많은 재일교포 선수들과 교류하며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꿈을 키워왔다.

 

2019년 몬트리올 그랑프리 63kg급 우승한 조목희 선수(사진=국제유도연맹)

Q.재일교포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많았을 거 같다, 우리나라 유도 선수로 활약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김] 경계인으로서 '재일교포'라는 건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힘들어요. 일본에서는 한국인, 한국에서는 일본인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렇지만 저는 한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되는 것을 줄곧 당연하게 생각해왔습니다.

[조] 원래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자란 제가 대한민국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사실 몰랐는데요. 전국체전에 재일동포 선수단으로 출전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 국가대표로서 올림픽 역시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습니다.

 

Q.한국에 처음 왔을 때 느낌이나 인상을 기억하는가? 언어나 문화에서 적응에 힘들진 않았는가?

[김] 고등학교 때 전국체전에 참가하며 처음으로 한국에 방문했는데요. 일본과 비교해 물가 특히 택시비가 저렴했던 것을 기억해요.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생활하며 언어나 문화가 다른 점은 조금 고생스러웠지만, 선생님들이나 동료, 주변 분들이 많이 도움을 줬습니다. 주말에도 '뭐하냐, 밥은 먹었냐'고 챙겨주시는 등 많은 분들이 마음 써주셔서 지금까지 잘 적응하고 있어요.

[조] 사실 많이 힘들었습니다. 같은 팀 사람들이 많이 도와줬지만, 한국에 왔던 첫해에는 전혀 한국말을 할 줄 몰라서, 같은 재일교포 선수의 존재가 컸습니다. 만나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한국마사회 유도단 김임환 선수(사진=한국마사회 제공)

■ '수백 번, 수천 번 설명...' 한국어는 서툴러도 한국인이라는 자긍심에 사는 '국가대표'

김임환 선수는 "태어난 건 일본이지만 국적은 한국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가대표입니다."라는 설명을 지금까지 '수백 번, 수천 번'해왔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혹자들은 너무도 쉽게 그들을 '일본인'이라고 명명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한국인'으로 자긍심을 가지며 '태극마크'의 무게를 느끼는 국가대표다.

 

Q.'한국인 김임환', '한국인 조목희'로서의 정체성을 언제 체감하는가?

[김] '한국인 김임환'은 언제나 체감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가대표로 시합에 나갈 땐 그 정체성을 뼈저리게 체감합니다.

[조] 항상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특히 대표선수로서 가슴에 태극기를 다는 순간 그 무게를 크게 느낍니다.

 

Q.8월 15일은 광복절이다. 두 선수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의미인지, 또 대한민국 국가대표의 의미는?

[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저의 뿌리이자, 조상들이 만들어 낸 기적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태극기를 달고 처음 시합에 나갔을 때 정말 기뻤고, 그 책임감 역시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조] 광복절은 재일한국인으로서 꼭 알아야 할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에서 자랐다는 것과는 상관없이, 국가를 등에 지고(대표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영광이고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기획1 2019년 세계선수권대회 66kg급 은메달 김임환(사진=국제유도연맹)

Q.선수 생활 중 가장 짜릿했던 순간, 가장 영광의 순간은 언제인가?

[김] 2019년 도쿄에서 세계선수권이 열렸는데요. 일본에서 열린 만큼, 시합에 가족과 친척, 선생님 등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응원해주었어요. 그것이 힘이 많이 되어 남자 66kg급 은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태극마크를 달고 시합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 있어 기뻤고, 저 자신에게 또 대한민국 유도에 좋은 성적으로 보답할 수 있어 기뻤습니다.

[조] 포디움에 서서, 제일 위에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애국가를 들었을 때 가장 짜릿하고 영광스러웠습니다.

 

■ 아쉬웠던 도쿄올림픽. 안창림 선수 계기로 재일한국인에 대한 관심 이어졌으면···

아쉽게 두 선수는 도쿄올림픽에 선수로서 참가할 수는 없었지만, -73kg급 동메달 안창림 선수를 계기로 재일한국인에 대한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Q.두 선수를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의 활약으로 재일한국인 학교 등에 대한 관심이나 후원도 많아진 거 같다. 감회가 남다를 거 같은데?

[조] 지원문제 같은 것들이 언론에서 많이 이야기 되고 있는데요. 관심을 모으고 있는 지금, 재일한국인학교의 현황을 많은 사람들에 전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재일한국인에 대한 존중이 있고, 살기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 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많이 이야기 하고, 노력하고 싶습니다.

 

김임환 선수 인스타그램(안창림과 김임환)

Q.안창림 선수가 김임환 선수에게 동메달을 걸어준 사진이 SNS에서 화제가 됐다. 안창림 선수와의 우정이 특별한 거 같다, 두 사람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됐나?

[김] 저희 어머니가 창림이 학교 선생님이라는 인연을 가지고 있어요. 특히 중학교때 저는 유도 명문중에서 단체전 전국 3위하는 정도의 선수였고, 창림이는 당시엔 유도를 그리 잘하진 않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창림이를 몰랐는데 창림이는 저를 알고 있었어요. 이렇게 오래된 인연이다 보니, 창림이가 도쿄올림픽 준결승에서 졌을 때 처음으로 남의 시합을 보고 울었어요. 시합 후에 창림이가 '동메달을 걸어줄게'라고 했을 땐 제 메달이 아니니까 부끄러워서 "아니야 됐어~"라고 말은 하는데, 몸은 자연히 걸어달라고 머리를 숙이더라고요. 인생의 대부분을 함께 고생해온 친구가 올림픽에서 빛을 발해서 저 역시 기분이 좋았습니다.

 

2주간의 도쿄올림픽은 끝났지만 선수들의 뜨거운 열정은 국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 열정을 기억하기에 돌아오는 22년 항저우 아시안게임과 24년 파리올림픽이 기대될 수밖에 없다. 세계대회를 목표로한 김임환 선수 역시 다시 몸을 만들어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다. 조목희 선수는 유도선수로서의 인생 1막을 올해 마무리 짓는다. 다음 목표로 어학 공부를 위해 괌에 갈 예정이다. 그는 괌에서 유도클럽 코치를 병행, 대학에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할 계획이다. 비록 방향은 달라졌을지라도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고 살아갈 그들의 다음 활약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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