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시행된 박태준 장군배 조랑말 경주 기념촬영 장면.
말산업저널이 ‘한국 경마가 달려온 길’을 이번 호부터 연재한다.
말산업저널의 ‘한국 경마가 달려온 길’ 기획과 연재는 한국 경마가 곧 100년 역사를 기록하게 된다는 인식과 그 시점이 우리나라 경마산업계 뿐만 아니라 말산업계 전반에 걸쳐 새로운 출발점인 동시에 획기적인 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동기였다.
본지는 창간 특집호 발행 직후 말산업저널과 자매지 경마문화신문 취재 및 편집기자로 팀을 편성, 수차례의 기획 및 편집회의를 통해 기획 의도와 취지를 공유한 가운데 자료 발굴과 확보를 본격화했었다.
아울러 경마 유관 기관 및 단체의 전?현직 임직원들의 생생한 증언과 기록으로 남아 있는 회고담 수집에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본지는 ‘한국 경마가 달려 온 길’이 단순한 기획과 줄거리, 내용에 불과하지 않도록 소재와 줄거리를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연대순으로 정리 기술하는 한편 다소 충격적일 사실들을 가감 없이 다루기로 했다.
또 역사적 기록으로서, 자료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는 사진, 특히 희귀한 흑백사진들을 KRA(한국마사회) 등으로부터 입수, 편집에 적극 반영함으로써 발자취를 보다 입체적으로 돌아보고 실감할 수 있도록 지면을 구성키로 했다.
말산업저널이 취재와 자료 발굴을 병행하며 연재할 ‘한국 경마가 달려온 길’이 한국 경마산업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하나의 동기를 부여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과 경마 유관 기관, 단체 관계자 여러분께 많은 관심과 제보를 부탁드린다.


한국마사회 60년사 제1편 1920~1948 ‘산고와 기다림의 긴 여정’

Ⅰ. 최초의 경마시행과 경마체계의 확립(1914~1932)

1. 서구식 경마도입과 조선경마구락부의 설립
1)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

우리나라는 조선말 쇄국정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서구식 경마의 전래가 늦어졌고 청·일, 러·일 전쟁 이후 주로 일본인으로부터 경마가 전파됐다. 이는 1780년 영국에서 현대 경마의 기원인 제1회 더비경마가 시작된 이후 100년이나 더 늦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서구식 경마는 1898년 5월 28일 구 동대문운동장 자리인 훈련원 광장에서 개최됐던 관립 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의 나귀경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 후 1907년과 1909년 우리나라 근위대 기병들의 기병 경마가 시행됐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1914년 4월 3일 조선공론사가 주최한 조선경마대회가 용산 구연병장에서 열렸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라고 할 수 있다. 조선경마대회는 1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할 정도의 대성황을 이뤘으나 마권과 경품권이 배제된 축제행사와 같은 경마로, 개화기의 새로운 풍물로서 경마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고 경마 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민간인에 의해 경마가 활발히 추진된 것은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 이후였다. 경성승마구락부 회원들을 주축으로 경성대경마회를 개최하고 본격적인 경마를 시작하려 했으나 3·1만세운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태여서 조선총독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1920년 5월과 11월 지방(평양, 대구)에서 지역 승마인들이 주최한 경마대회가 열렸다. 승마구락부회원들에 의한 경마가 실현된 것은 1921년 봄과 가을에 두 차례 개최된 전선경마대회(全鮮競馬大會)로, 비록 일본인 주도로 이뤄졌지만 완전한 경마의 형태를 갖춘 한반도 최초 근대경마의 시작이었다. 이 해부터 서울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수일간씩 경마가 시행됐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마는 서울을 기준으로 1921년부터 시행됐다고 할 수 있다.

용산 신연병장 경마
1921년 5월 7일과 8일 용산 신연병장에서 개최됐던 전선경마대회는 경성 승마구락부가 주최하고 조선군사령부와 총독부 경무국 후원으로 열렸다. 주최 측은 대회 준비를 위해 총무, 설비, 서무, 회계, 마필 등 담당 부서를 두었으며 유력인사들과 언론기관 대표들을 상담역으로 위촉했다.
대회는 일본에까지 방송으로 선전해 규수 방면에서도 경주마가 참가하도록 했으며, 전국 각지에서도 100두 가까운 말이 모였다. 대회기간에는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남대문역에서 청량리까지 임시열차가 운행됐고 대회 당일에는 연병장과 한양공원(남산)에서 오전 8시부터 폭죽을 솨 널리 알리기도 했다.
첫 날인 5월 7일에는 경마를 구경하려는 인파들로 인해 연병장으로 통하는 길목과 경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 위까지 만원을 이뤘다. 입장권은 1등부터 4등까지 4종류로 등수에 따라 금액이 차등 지급됐고, 승마 투표는 주최 측이 3회 지정하여 실시했는데 하루 12경주가 시행됐다. 예시장이 따로 있지 않았으므로 투표하는 경주가 지정되면 번호를 붙여 둔 말 앞에 가서 관찰할 수 있었고, 승마 투표에서 적중되면 상품권을 줘 미리 지정해 둔 곳에서 현물과 교환하는 식이었다.
기수 중 일부는 일본에서 초빙해 왔으나 숫자가 부족해 목장 등에서 말을 돌보면서 승마가 가능한 일꾼 중 체격과 체중이 적합한 사람을 임시 기수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최초의 기수인 김용백도 이 중 하나였다.

여의도 경마
경성승마구락부 주최 제2회 경마대회는 그 해 가을인 1921년 9월 23일과 1주일 후인 10월 1~2일, 사흘간 여의도에서 개최됐다. 용산 신연병장에서 경마대회를 개최한 결과 밀려드는 인파로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아 여의도로 장소를 옮긴 것이다.
대회 장소는 일본인 아라이가 경영하는 목장으로 소와 양을 기르던 잡초가 무성한 목초지였으나 러시아에서 말 40두를 수입한 이후 마산목장을 겸하고 있었다. 이 목장 앞에 말뚝을 박아 새끼줄을 치고 1마일 규모의 원형 주로를 만들어 경마를 시행했다. 임시 관람대는 판자로 만들고 3등석은 모래벌판에 가마니를 깐 정도의 엉성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철도국에서는 경마를 위해 남대문로에서부터 임시열차를 운행했고 이촌동과 여의도 사이에서는 나룻배를 준비해 입장권 소지자를 실어 나르는 등 경마에 대한 열기가 대단했다. 신용산 전차종점에서 이촌동 나루터까지 자동차가 운행되기도 했으며, 경성우편국은 노량진과 대회장간 임시 전화를 가설해 관람객의 편의를 도모했다.
여의도 경마가 시행되던 9월 23일은 관공서의 휴일이기도 해 가을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이날은 일본 다치아라이 비행장에서 광주까지 장거리 시험 비행을 하는 비행기가 여의도에 착륙할 예정이어서 경마장은 비행기 구경을 겸해 나온 1만여 명의 시민들로 대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23일 내린 폭우로 한강물이 불어 24~25일의 경마가 연기되면서 10월 1,2일에 경마를 속행했으나 이날 입장객은 2,000~3,000명 정도로 초반 열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여의도 경마에서는 일본 훗카이도에서 신마 20두를 구입해 승마구락부회원들이 추첨으로 나눴는데 이것은 한국에서 실시된 추첨마제도의 효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연병장경마보다 출주한 말이 적었으므로, 일당을 주고 마차를 끌던 말 등을 빌어다가 겨우 70두를 채울 수 있었다.
승마 투표도 역시 지정한 경주에만 실시하고 적중자에게는 상품권을 줬는데 이것은 당시 일본에서 마권 발매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기수들은 대체로 마권발매금지 조치로 불황에 빠져 있던 일본 지방경마장에서 온 6~7명의 기수들과 임시 기수들이었으며, 몇 명의 한국인 기수들이 처음으로 기승하기도 했다.

1920~1921년 경마대회 개최 상황
연월일 / 대회명 / 장소 / 개최일수 / 주최
1920년 6월 6일 서선경마대회 평양연병장 1 마차상승마회
1920년 11월 28일 대구경마대회 대구금정광장 1 승마회
1921년 4월 4일 전선경마대회 부산진매축지 3 승마회
1921년 4월 23일 대구경마대회 대구금정광장 2 승마회
1921년 5월 7일~ 전선경마대회 용산신연병장 2 승마회
1921년 5월 21일~ 서선경마대회 평양연병장 2 승마회
1921년 9월 23일~ 경성추계경마대회 여의도 3 승마회
1921년 가을 북선경마대회 원산관교동광장 3 승마회

2) 조선경마구락부의 탄생
1921년 춘계 전선경마대회가 끝난 후인 7월 경성승마구락부는 조선총독부에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의 설립인가를 신청해 1922년 4월 5일 인가를 받았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경마법인 조선경마구락부다. 승마구락부는 경마의 오락성을 즐기는 한편 승마구락부의 재정난을 경마수입으로 해소한다는 목적에서 경마를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경마구락부가 법인체로 발족하면서 승마구락부는 경마구락부 산하에 들어가 재정적 뒷받침을 받게 됐다. 조선경마구락부는 1922년 5월 훈련원 광장에서의 경마를 시작으로 그해 가을에는 이촌동 한강상설경마장을 건립했고, 1923년 봄부터는 경마법인으로서 경마시행을 본격적으로 주관했다. 조선경마구락부는 1922년부터 1942년까지 20년 동안 조선마사회가 설립되기 전까지 경마 시행을 주관했다.

한강상설경마장의 개설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가 발족하게 되면서 조선경마구락부 측은 1922년 5월 20~21일 이틀간 첫 경마를 개최했다. 법인 경마구락부 발족과 동시에 한강 상설경마장을 만들기로 했던 주최 측은 미처 준비가 되지 않아 춘계경마를 훈련원 광장에서 치르게 됐다.
훈련원은 도심에서 가깝고 비교적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으므로 당시 좋은 구경거리 중 하나였던 경마를 보러 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해 가을인 1922년 9월 23~24일에는 서부이촌동 백사장에서 추계경마가 실시됐다. 공사가 완료되지 못한 허술한 가시설이었지만, 그간 훈련원과 용산의 연병장, 여의도 등을 전전하던 서울의 경마가 마침내 상설경마장인 이촌동 백사장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컸다.
이듬해인 1923년 봄에는 백사장 주로 내 모래언덕을 완전히 제거해 주로의 대부분이 어느 정도 경마장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경마 시행 면에서도 1923년은 여러 가지 발전적인 변화가 있었던 한 해였다. 우선 개최일수를 2일에서 3일로 늘리는 한편, 한 경주의 편성을 구락부 지정마, 신마, 외국산마로 따로 편성하는 등 편성의 다각화를 통해 흥미를 돋우었으며, 복표를 발행해 입장객 동원에 한 몫을 하기도 했다.
수해가 나기 전인 1925년부터는 춘추로 약 4일간 경마를 시행하면서 한강 경마는 장족의 발전을 보였다. 1926년 가을에는 평지구보경주 외에 속보(速步) 경주를 추가했으며, 1927년에는 창덕궁상전경마를 신설하고 평양레이스구락부 추첨마 경주를 따로 벌이는 등 경주 내용을 한결 다채롭게 해 경마장을 찾는 입장객수는 해마다 증가했다. 출주마수도 1926년에는 111두가 출주함에 따라 최초의 100두 돌파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1927년에는 승마투표권의 발매액도 1원에서 2원으로 인상하게 됐다.

3) 승마 투표의 공인
우리나라에서 1923년 이전에 시행됐던 경마에서는 지정된 경주에만 투표를 해 적중자에게 상품권을 교부함으로써 환불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러한 승마 투표는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 뿐만 아니라 지방 도시의 모든 경마대회에서도 이용됐다.
그러다가 1923년 3월 일본에서 경마법이 통과되고 승마 투표권 제도가 법제화됨으로써 일본의 경마 제도를 답습하던 우리나라에서는 일본의 경마법이 공식으로 시행되지는 않았으나 준용하는 형식으로 승마 투표가 인정받게 됐다. 마권 발매를 인정받음으로써 서울의 조선경마구락부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해가 갈수록 경마를 개최하는 곳이 많아져 승마 투표의 공인은 경마 대중화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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