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체제 개선작업(1960~1965년)

뚝섬 서울경마장의 모습. 마감 3분 전이라는 전광판이 보인다.
한국마사회법 공포 직후 민자유치·공영제 적극 검토

광복 후 한국마사회로 임의 개칭 18년만에 법적 탄생
군사정부, 승마 특수체육 종목 채택… 마사공원 개장

1963년 경마 안정세 회복… 경영개선 노력 호평 받아
민자유치로 활로 적극 모색 경마운영체제 일대 전환기

5·16으로 민·참 양원과 각급 지방의회가 해산된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가 입법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 군사정부는 1961년 가을부터 혁명과업의 일환으로 구법일소작업에 착수했다.

■ 한국마사회법 공포

광복 후 15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법령을 제정하지 못하고 제령 또는 부령으로 남아 있거나 일본법 그대로 각계에 통용되고 있는 구시대의 잔재들을 말끔히 쓸어내는 작업이었고 조선마사회령이 바로 그 대상 중 하나였다.
마사회는 농림부의 지시에 따라 즉시 한국마사회법 기초작업에 착수했다. 당초 경마 전반을 규정하는 한국경마법과 시행체인 한국마사회법으로 분리시켜 2개의 법안을 기초하자는 의견이 제시됐으나 작업시간이 촉박할 뿐 아니라 당장은 서울 단일경마장임을 감안해 한국마사회법으로 단일화하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마사회가 기초해 농림부에 제출한 한국마사회법은 농림부의 검토를 거쳐 그해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접수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1962년 1월 18일 제5차 회의에서 이 법안을 통과시켰다. 전문 51조, 부칙 5조로 통과된 한국마사회법은 당초 전문 52조 부칙 5조로 기초해 제출한 것인데 최고회의상임위원회 심의과정에서 제22조 법인해산조항(마사회의 해산에 관하여는 따로 법률로 정한다)이 불필요한 사족이라는 의견이 제기되어 삭제되면서 전문 51조가 됐다.
최고회의상임위원회를 통과한 한국마사회법은 1962년 1월 20일 법률 제1012호로 공포와 동시에 시행됐다. 이어 2월 26일 마사회 정관의 개정, 3월 27일의 시행령(각령 제580호)의 공포로 효력을 발생하게 됐다.
이로써 마사회는 광복 후 한국마사회로 임의개칭(1945. 9. 24)해 새 출발한 지 18년만에, 대한민국 정부(농림부)가 명칭변경을 공식으로 인가(1949. 9. 29)한 지 13년만에 비로소 법률적으로 탄생한 것이다.
한국마사회의 부칙에는 ① 본법 시행 당시의 조선마사회는 본법 시행일에 본법에 의하여 설립한 한국마사회로 본다. ② 본법 시행 당시의 한국마사회의 임원은 본법에 의하여 임명된 것으로 본다. 단 그 임기는 본법 시행일로부터 기산한다고 규정하여 한국마사회는 조선마사회를 승계하였음을 명확히 밝혔다.
그러나 법인격은 비록 승계한 것이라 하더라도 국방상 또는 산업상 필요한 마자원의 확보를 주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조선마사회와 경마의 시행을 주목적으로 한 한국마사회는 근본적으로 설립목적을 달리하고 있으므로 마사회는 한국마사회법의 제정으로 비로소 거듭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도 조선마사회령과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① 마사회는 마사의 진흥을 도모하여 국방 및 산업상 필요한 마자원의 충실확보를 기한다는 구법의 마사회 설립목적에서 “국방 및 산업상 필요한 마자원의 확보”를 삭제하고 “마필의 개량증식과 마사의 진흥, 축산의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현실화하였다. 이는 마필이 이미 전쟁자원이 아닐 뿐 아니라 산업상의 역할까지도 소멸한 시대적인 변천을 말해주는 것으로서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② 마사회임원의 결격사유로서 금치산자, 파산자, 수형자 등 민형사상의 결격사유 뿐 아니라 경주마의 마주나 국회의원, 지방의원, 공무원을 비롯하여 정당의 간부까지도 임원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신설하여 마사회 운영과 경마시행의 공정성을 꾀하였다. 이는 자유당·민주당시대의 마사회 운영실태가 보여준 경험론적인 규정이라 하겠다.
③ 손실보전준비금과 특별적립금제를 신설하여 경마사업의 부진기에 대비케 하였으며
④ 면세조항을 삽입하여 특수공익법인의 육성을 꾀하였으며 제도적으로 실효를 거두지 못한 부회장, 평의원 등을 두지 않았으며 상주 감리관을 폐지하고 필요에 따라 감독원을 지명하도록 하는 등 제도의 개선에 노력했다.
한국마사회법은 정부수립 후 일찍이 국회에서 제정되어야 할 것이었으나 6·25동란으로 늦어졌다가 군사정부의 구법일소작업에 힘입어 비로소 제정된 것은 때늦은 아쉬움은 있으나 그래도 다행한 일이었다.

■ 마사공원 개장

5·16 후 마사회와 서울경마장 추진사업의 제1호로 등장한 것이 마사공원의 개장이다. 마사회는 승마장 건설을 마사회재건 5개년계획(1963~1967)의 일환으로 계획했으나 계획보다 앞당겨 1962년에 서둘러 승마장을 건설한 것은 정부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군사정부는 체육진흥과 대학생들의 스트레스 해소방안의 하나로 승마를 특수체육종목으로 채택해 학생들에게 장려했고, 문교부가 마사회에 그 시설과 교육을 의뢰함에 따라 승마 보급에 필요한 승마장 건설을 급히 서두르게 된 것이다. 당시 마사회로서는 재정적인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1962년도 축산기금 500만 원(6·3 통화개혁 후)을 융자받아 그 중 200만 원으로 사무실과 B관람대 자리에 100m×60m 규모의 승마장과 마사 2동 및 치료소 등을 건립했다. 축산기금 500만원 중 나머지 300만원은 제주산 조랑말(경마용) 구입자금으로 전용했다.
마사공원은 이 해 겨울부터 대학생 승마교육을 시작했는데, 학생교육 외에도 틈틈이 주한 미군장병에게 공원을 개방해 마사공원 수입은 경마 휴식기인 겨울철의 마사회 운영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후 마사공원은 1973년 관람대 현대화 계획과 더불어 추진된 마사지역 일원화 방침에 따라 뚝섬경마장 서쪽 제방 밑으로 이전하면서 시설을 확충, 국제규격의 승마장과 사무실, 마사를 갖추었다. 마사공원은 1979년 7월 승마공원으로 개칭했고 1984년 4월 다시 승마훈련원으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1986년 11월 승마훈련원은 국제수준의 현대식 시설과 마장을 갖춘 과천올림픽 승마경기장으로 이전하게 됐다.

■ 승마보급 본격화

승마의 보급은 최초의 승마시행체인 옛 경마구락부 때부터 경마에 다음가는 법인의 주요사업이었다.
1962년 초부터 군사정부의 장려로 대학생들의 집단 승마교육을 전담하게 된 마사회는 1964년 정관 제3조(사업)에 승마의 보급 및 마필이용의 지도장려를 마사회 사업종목으로 추가함으로써 승마의 보급은 정관에 명시된 목적사업이 됐다. 마사회의 승마 사업은 1942년 조선마사회 발족 이후에는 조선마사회령이나 마사회 정관에 승마의 보급을 명문화하지는 않았으나 마사진흥 차원에서 승마의 보급에 계속 주력했다. 조선마사회가 조선경마구락부를 승계하면서 그 산하에 있던 기도훈련소(전경성승마구락부·서울 신당동 233)도 인수, 운영했다.
광복 후 한국마사회는 이곳을 서울기도훈련소 또는 마사훈련소로 부르면서 전국학생마술대회와 원승회(遠乘會) 등을 개최하고 승마강습을 실시하면서 승마보급을 계속했다. 또 안암·서대문 등 서울과 부산·대구·개성 등 지방소재 승마단체(기도회)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6·25 후 승마장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자 1955년 기도훈련소의 운영을 서울승마구락부에 위임했다가 1958년 승마장과 그 시설을 동 구락부에 매도하고 한동안 승마보급사업을 중단 했다.
한편 승마장건설과 함께 마사회는 1962년 농림부의 국고보조금 200만원으로 일본 규슈에서 개량종 승용마 25두를 도입했다. 마사회의 승용마는 마필수급계획에 따라 승마전용으로 마필을 수입하거나, 경주마에서 용도 변경된 마필로 충당됐다.
마사회의 연도별 승용마 보유현황을 보면 1962년 마사공원 개장이후 1972년 기수양성소가 부설되기 전까지는 연평균 23.5두, 기수양성소 부설 이후 1981년까지는 기수후보생 교육마필을 포함해 연평균 32.6두를 보유했다. 1972년 이후 후보생 교육생 마필을 고려하면 마사회의 승용마필 보유두수는 1962년부터 1981년까지 거의 증가가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1982년 이후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필대회로 승마보급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마필보유두수도 증가하게 되어 1982년부터 1992년까지 연평균 63.3두의 승용마를 보유했다.
5·16후 한때 군사정부 주변에서는 마사회에 대한 존폐논쟁이 전개됐다.

■ 민영화 시도

도박의 속성을 지닌 경마는 혁명정신에 위배되며 혁명과업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경마의 폐지와 마사회의 해산을 주장하는 강경론이 있는가 하면, 2차대전 후 경마는 세계적으로 시민여가생활에 큰 몫을 차지하는 레저종목으로서 경마폐지는 자유진영국가로서의 이미지에 손상이 간다는 온건론이 맞섰다. 그러다가 한국마사회법까지 제정되면서 중론은 경마존속으로 기울어져 존폐의 시비에서는 벗어났으나 장기간 누적된 경영적자에서는 쉽게 헤어나지 못했다.
1962년 9월 국정전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농림부로 하여금 마사회에 대한 획기적인 운영쇄신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농림부는 이때 마사회의 법인격을 순수 경마단체 또는 승마단체로 전환시킨다는 전제하에 다음 6가지 운영형태를 놓고 검토했다.

① 마사회의 법인재산을 국유화하여 정부와 민간이 공동출자하는 경마법인의 설립 ② 마사회재산(토지, 시설)을 매각하여 민영화 ③ 재산을 매각한 자금으로 관광공사로 하여금 건설중인 워커힐 부지내에 경마장시설 설립 ④ 경마장을 문교부에 이관하여 학생승마훈련용으로 전환하고 경마는 연간 봄·가을 2~3회 시행 ⑤ 민간자본으로 제반시설을 운영하고 마사회가 경마를 시행하는 공영형태 ⑥ 경마장을 서울시에 이관

마사회는 이중 ⑤ 민자유치에 의한 공영형태를 최선의 방안으로, ③ 관광공사와의 제휴를 차선의 방안으로 선택할 것을 농림부에 건의했다.
그러나 농림부는 정부와 민간이 공동출자하는 반관반민 형태나 마사회와 민자유치에 의한 공영은 민영과 대동소이하고 관광공사와의 제휴는 장차 경마발전을 저해할 우려가 있으므로, 차라리 사업의 창의성 발휘를 위해서는 민영화가 최상책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농림부는 1963년 3월 민영화 방침의 확정을 마사회에 통고했다. 동시에 민영화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므로 마사회는 종전대로 경마를 시행하되 시설확장이나 사업의 신규투자는 보류할 것이며 채권채무의 정리와 계류중인 소송사건의 정리를 서두르도록 지시했다.
농림부가 민영화 방침을 보류한 것은 경마사업의 인수희망자를 비공식적으로 타진해 본 결과 희망자가 예상외로 적은데다 농림부의 민영화 방침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수희망자가 없는 것은 그만큼 경마가 불황이었기 때문이고 민영화에 반대하는 의견은 경마장 토지만 없애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다. 1963년이 되면서 경마는 비교적 안정세를 회복하고 있었다.
5·16으로 내려진 비상계엄이 1년 만에 해제(1962. 12. 6)되고 민정이양 준비가 진행되면서 사회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짐에 따라 경마도 서서히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사회도 신규부채 발생시는 임원이 공동책임을 지는 임원공동실보증제를 실시하는 등 경영개선에 비장한 각오로 노력해 좋은 평가를 받게 됐다.

■ 공영제 모색

□ 민자공모 실패
1963년 12월 군정이 2년 반 만에 끝나고 10·15대통령선거에 의해 제3공화국이 출범할 때 마사회도 군정기간에 재임한 한영주 회장이 물러나고 다시 김덕승 회장을 맞았다.
김덕승 회장 부임 후 마사회는 민자유치를 다시 검토했다. 경마가 다소 활기를 띠기 시작했으나 경주마의 수입이나 시설의 현대화는 마사회 자체재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다시 민자유치를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이 계획에 따라 마사회는 1964년 1월 한국경마진흥주식회사를 투자업체로 한 공영형태의 민자유치안을 농림부에 제출했다. 농림부는 이를 검토한 끝에 마사회안의 불합리성을 지적하고 다음과 같은 투자조건하에 투자업체를 공모하도록 지시했다.

① 투자형태는 공동경영이 아닌 시설임대 형식으로 하며 ② 투자자에 대한 이익배당은 마권매출액의 6%이내, 기타 수익(오락시설 등)의 50%를 시설임대료로 지불한다.

마사회는 이 지침에 따라 1964년 3월 14~15일 신문에 공고하고 서울경마장 시설투자 희망자를 모집했으나 응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때만 해도 경마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할 뿐 아니라 투자조건도 좋은 편이 아니라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 회장의 개인재산투자
마사회가 제시한 한마진흥과의 공영안이 농림부에 의해 거부되고 농림부 지침에 따른 투자희망자 공모가 좌절되자 마사회는 1964년 4월 이번에는 다음과 같은 김덕승 회장의 사재투자에 의한 운영개선책을 농림부에 제출했다.

① 김덕승 회장이 사재 650만 원 한도에서 투자해 관람대와 마사 등을 재보수하고 ② 투자액은 5년간 매출액의 5%이내에서 상환하며 ③ 임원연대손실보증제로 마사회를 운영하며 구채무는 앞으로 5년간 분할 상환한다.

농림부는 1964년 4월 20일 이 안을 승인함으로써 1955년 개수한 이래 10년간 손을 보지 못했던 목조관람대를 신축하고 마사 등 노후시설을 재보수했다. 그러나 공인인 마사회장의 사재투자는 그 평가액을 두고 농림부와 견해가 대립되어 약 1년간 시비가 계속되다가 1965년 7월 새 민자유치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 민자 유치

□ 민자유치로 활로 모색
그러나 경영면에서는 여전히 영하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존폐의 기로에서 헤매다가 1966년 결국은 민자유치로 활로를 모색하게 됐다.
덕마흥업㈜의 시설투자로 경주마가 수입되어 조랑말경마가 개량마경마로 바뀌고 시설이 한결 개선되는 등 경마는 진일보했다.
때마침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5차년도에 들어선 1966년경부터 서서히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고, 아울러 한일협정의 타결, 월남전 참전 등으로 국가경제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면서 레저산업에도 호황이 미쳐 뚝섬경마장은 개장 이래 처음으로 현저한 매출신장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자유치에 의한 경영의 이원화는 날이 갈수록 문제점을 파생시키고 매출신장에도 불구하고 마사회는 적자경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 덕마흥업과의 계약
시설물 소유권에 관한 약정서가 교환된 1965년 10월 8일 마사회는 동시에 덕마흥업㈜과도 서울경마장 시설물 및 경주마임대차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농림부는 마사회가 이미 시달한 농림부의 계약지침을 어겼다는 이유로 이 계약을 인가하지 않았다. 농림부가 재강조한 것은 덕마흥업㈜은 한 명만을 마사회 임원으로 참여(2명으로 계약)시키고 보증금은 700만 원(500만 원으로 계약), 임대료를 연 4회 분할지불(연 1회 결산지불) 하라는 것 등이다.
덕마흥업㈜은 이장표, 김치곤, 박건만과 김덕승의 합자회사로서 4명이 25%씩 균등출자하는 형식으로 발족한 것인데 현물투자로 참여한 김덕승의 기존시설은 덕마에서 455만 원으로 평가됐다.
이렇게 시작된 덕마에 의한 시설임대체제는 1972년 8월까지 약 6년 9개월 동안 계속됐는데 이 체제의 공과는 별론으로 하고 우리나라 경마운영체제의 일대전환기였음에는 틀림이 없다.

기획취재팀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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