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생명력의 상징이자 동시에 유순함의 상징이기도 한 “말”. 이들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며 오랜 시간 인류의 역사를 함께 걸어왔다. 하지만 주로 수레를 끌거나, 탈 것, 혹은 군수용으로 쓰였던 탓에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시기가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 중기를 지나며 지나치게 폐쇄적인 유교문화가 자리잡았고, 여성과 말의 거리감은 더해졌다. 게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서는 “말띠 여성은 기가 세다”는 낭설까지 퍼지며 여권을 억누르는 수단으로까지 악용되며 골은 더욱 깊어만 갔다.

반면 말 산업이 보편화된 나라는 우리가 개와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처럼 말이 키워지고 있다. 말과 여성간의 거리감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 여성인권이 높기로 유명한 호주는 남녀 할 것 없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과 친구처럼 지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말 관리 업종에서는 여성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고.



올 초 호주에서 열린 골드코스트 1세마 경매 당시에도 목장을 대표해서 나온 스태프들은 반 이상이 여성이었다. 당시 본지와 인터뷰를 가졌던 바라물 스터드의 여성관리사는 “여성이 말 일을 하는 것에 대해서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는 신기한 일이다.”며 “힘이 세고 안 세고는 여성과 남성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 능력의 차이일 뿐이다.”고 말했다. 또 “호주의 여성들은 강인하고 남자들에게 뒤지지 않는 정신력이 있다.”며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말과 함께 지냈고, 10대 때 목장일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크게 어려움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끝으로 “중요한 것은 말을 얼마나 잘 알고 진심으로 대해줄 수 있는가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당시 경매에 참석한 목장 관계자 중에서는 10대의 소녀들이 아주 많았고, 이들은 대부분 능숙하게 말을 다루는 모습이었다. 호주의 가장 큰 대회인 멜버른컵에서 여성 기수가 우승을 차지한 것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75년 이옥례 기수가 등장해 세계에서는 세 번째, 동양에서는 첫 번째로 여성 기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지만 그 명맥은 오랜 기간 끊어지며 퇴색됐다. 부경 여성기수의 자살에 이어 여성관리사 성추행 사건까지 이어지며 여권 신장에는 먹구름이 낀 듯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악재를 이겨내고 제1호 여성 조교사로 거듭난 이신영 조교사를 비롯해 여성 기수로서 최초로 통산 100승 고지를 넘어선 김혜선 기수, 해외 여성기수 초청경주에서 당당히 우승을 차지한 이금주 기수 등이 당당히 선전하며 편견을 조금씩 허물어가기 시작했다. 환경적 문제로 말에 덜 노출되어있을 뿐, 충분히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음을 몸으로 증명해내고 있는 셈이다.


외부에서 화려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경마관계자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말산업 곳곳에는 여성들이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으며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여성으로서”가 아닌 “여성”이라는 특성을 살린 한 명의 “역군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여전히 수는 적지만 그녀들이 이뤄온 일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다. “여혐”, “여권신장”, “남녀평등”이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지금, 불모지인 이곳에서 말(馬)하고 있는 그녀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번 창간특집호에서 만나 볼 첫 번째 말(馬)하는 그녀는 경마를 대중 속으로 끌어낸 주역, 김수진 馬나운서다. 국내 최초 여성 경마중계아나운서는 물론 최초의 여성 경매사, 최근에는 쇼트트랙 장내아나운서까지, 김수진 아나운서가 걸어온 길은 모두가 최초, 최초다. 선구자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만 가시덤불에 찢긴 상처는 몸속 깊숙이 남는 법. 그녀가 헤쳐나가야 했던 마도(馬道)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녀, 말(馬)을 만나다]

-맨 처음 이곳과 인연을 맺었던 순간을 돌이켜보자. 생소한 직업인데 어떻게 접하게 됐는지?
방송 쪽 일을 하게 된 것은 중학생 때 우연히 들어가게 된 방송반의 영향이 컸다. 당시 피디나 아나운서, 엔지니어까지 다양한 경험을 해보았는데 너무나 재밌었고 적성에도 잘 맞아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회에 나올 무렵 때마침 한국마사회에서 여자 아나운서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당시만 해도 경마에 대해서는 막연하게만 알고 있을 뿐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것이 사실이다. 어디든 직장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시험을 보게 됐고, 그렇게 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당시만 해도 경마계는 그야말로 여성 불모지였다. 맨 땅에 헤딩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텐데?
마사회에도 여직원이 몇 없었는데 마사지역은 오죽했겠나. 여성 기수도 당시에는 없었고, 말 그대로 금녀의 구역이었다. 하루는 뜨거운 여름날이었는데 취재를 위해 방송용 차량을 타고 마사지역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투표소 앞 말 샤워장 앞에 내렸는데 관리사분들이 너무나 편안하게 샤워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단체로. 못본 척 하며 지나갔다. (웃음) 여자가 전혀 없는 구역이다보니 당시에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급한 취재 때문에 경마일 아침에 마방을 방문할 때면, 연세가 제법 있으신 분은 “여자가 오면 재수가 없다”며 호통을 치시기도 했다.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한편으로는 “이거 재밌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 노력에 따라 이러한 문화가 조심씩이나마 불식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때부터는 정말 열심히 발로 뛰며 취재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여성의 희소성이 도움이 될 때도 있더라. 역으로 그분들에게는 나라는 존재가 특이했고, 관심이 많이 모이다보니 취재 요청이나 협조를 구하는 것도 좀 더 수월했던 것 같다,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 같다.
기본적인 성향 자체가 기존에 늘 하던 것보다는 항상 새롭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편이다. 사실 이것저것 좋은 의도로 시도는 많이 하는데 마무리를 못 짓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10가지 중에 1가지라도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도전 없이 그 자리에 머물렀을 때보다 분명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이고 그것이 내게 에너지를 주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좀 힘들어해서 문제지.(웃음)

-그 때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해왔는데, 가장 기억에 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경마 전문 방송 프로그램이 전무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점심시간에는 가족오락관과 동물의왕국을 송출했다. 우리만의 경마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는 회의 끝에 처음으로 방송 기획에 도전했는데, 당시 내가 처음 제작했던 방송이 15분짜리 다큐멘터리였다. 나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첫 작품이다. 얼마 전 2000승을 거뒀던 박태종 기수가 당시 한국 경마에서는 처음으로 시즌 100승을 거둬 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기로 하고 한 달을 쫓아다녔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따라다니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과 열정을 쏟아 부었던 것 같다. 박태종 기수는 지금도 인터뷰 때면 많이 쑥스러워 하시지만 그 당시에는 한 마디를 하기 위해서 100번을 찍을 정도로 부끄러움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친해지기도 많이 친해져 나중에는 박태종 기수가 카메라 앞에서 장난도 칠 정도였다. 한 명의 사람을 방송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오롯이 알아가는 과정은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했다.




그밖에도 현장탐방이라는 타이틀로 진행했던 시리즈물이 기억난다. 이곳에 일하며 항상 느끼는 거지만 팬분들은 아무래도 돈을 걸며 경마를 관람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오해와 불신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당시는 그 정도가 정말 심해서 그분들에게 살아있는 현장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내가 담아내는 관계자들의 구슬땀과 의지, 열정, 고충들이 팬분들의 오해를 조금이라도 불식시킬 수 있길 바랐다. 말이나 인물을 주인공 삼아 만드는 15분짜리 방송이었는데, 그때 정말 많이 뛰어다니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성장할 수 있었던 시기라고 본다.

-지금의 경마방송을 탄생시킨 선구자 역할을 한 셈인데?
당시는 방송팀에 아나운서만 있었고 피디나 작가, 심지어 편집하는 분들도 없었다. 그래서 급할 때는 내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촬영도 했었고, 편집이나 연출, 구성까지 직접 하기도 했다. 카메라 감독과 함께 뛰어다니며 하나부터 열까지 말 그대로 방송을 만들어냈는데, 그게 너무나 재밌었고 덕분에 다른 곳으로의 이직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의 두근거림과 열정은 그대로 남아있다.



[말(馬)을 말(言)하다, 국내 첫 여성 중계아나운서의 탄생]



-그 열정으로 약 10년 가까이 현장을 누볐는데, 별안간 국내 최초의 여성 중계아나운서에 도전하게 됐다. 방송과 중계는 확연히 다른 분야인데 도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나조차도 여자가 경마를 중계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경마사랑방에 경마팬 몇 분이 우스갯소리처럼 “여자가 중계하는 것은 어떨까”라고 올렸는데 당시 김용철 팀장님께서 그걸 발견하셨다. 김용철 팀장님은 우리와 함께 경마방송 콘텐츠의 모태를 모두 만들어내신 분이다. 내가 9년 동안 열심히 뛰어다녔던 모습을 쭉 지켜봐오셨기에 믿음을 가지셨는지 제안을 하시더라. 처음에는 여자가 그렇게 순발력 있게 말을 할 수 있을지, 혹은 흥분해서 톤이 올라가게 되면 듣기 싫은 소리가 나오지 않을지 다른 사람과 똑같은 편견으로 망설였던 게 사실이다. 제안을 받은 후 선배들이 한 중계영상을 보면서 멘트를 해봤는데, 심장이 뛰더라. “아, 이거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때부터 열심히 연습했던 것 같다. 다른 나라에도 사례가 별로 없다보니 그야말로 혼자와의 싸움이었다. .

-선례가 많지 않은데, 중계는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연습했나?
경주 흐름이야 오랫동안 근무하며 봐온 것이 있다 보니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다만 쉬지 않고 순발력 있게 상황을 묘사하고 해설해야 한다는 점이 정말 어려웠다. 그래서 평소 가만히 앉아있을 때에도 주변 상황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연습을 했다. 운전할 때가 최고의 연습 타이밍이었다. 도로 위의 상황이 사실 경주와 다를 바 없지 않나. “아X테가 1차선에서 2차선에서 접어들고 바깥쪽에서 티X가 추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하는 연습을 하며 어떠한 비상 상황에서도 당황하거나 실수하지 않도록 아예 몸에 배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당시 데뷔를 앞두고 대고객 설문을 가졌다. 김수진 아나운서가 주행검사를 중계하는 영상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중계 가부에 대한 투표를 했는데, 사실 남자였다면 거치지 않아도 될 평가를 받게 된 거 아닌가? 기분이 어땠나?
워낙 금녀의 공간이었고 팬들 자체가 남성의 비율이 압도적이다 보니 터부시하던 경향이 심했던 것이 사실이다. 마사회 입장에서도 그만큼 조심스러웠고 나도 그 점에 충분히 공감했다. 팬들이 충분히 수긍했을 때 데뷔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고 정말 감사하게도 70퍼센트가 넘게 찬성을 해주셨다. 오히려 내게는 그 투표가 무기가 되었다. 70퍼센트의 팬들을 등에 업고 중계에 임하는 셈이 됐으니 말이다.

-첫 중계경주가 기억나나?
당연하다. 너무 긴장을 많이 했다. 실수를 안 하겠다는 것보다는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 싶어서 공부를 정말 많이 했다. 누가 앞에 나서고, 두세 번째는 누가 갈 것이고 눅가 추입을 시도할 것이다. 실제로 첫 중계경주가 시작되자 예상대로 전개가 펼쳐졌고 안심하며 준비한대로 진행을 해나갔다. 그런데 별안간 선두를 가던 말이 4코너를 돌며 외곽으로 기대며 화면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가 준비한 각본에 의하면 이 말은 그대로 결승선까지 선두를 유지해 우승을 해야 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계속해서 그 말이 선두를 달리고 있다고 외치다 가까스로 결승선 통과 순간에 제대로 해당 말을 호명했다.

-생중계다보니 아찔한 순간들이 많았을 것 같다.
번호를 잘못 보게 되는 경우는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중간에 재빨리 바꿔 방송해야한다. 특히 결승선 통과 순간은 매우 예민하기 때문에 집중해야한다. 가장 곤란할 때는 비가오고 나서 모래가 뭉쳐서 날아올 때다. 모자색을 보고 마번을 파악하는데 모래가 달라붙으면, 특히 1번과 11번, 2번과 12번과 같은 10번대 이상의 번호는 구별이 힘들다. 그럴 땐 다음으로 기수복을 보고 구별하는데 그런 날씨에는 모래 범벅이 되어 기수복ㄷ 구분하기 힘들 때가 많다. 기수복이 비슷한 기수들도 제법 있지않나. 아예 결승선을 통과할 때까지 다른 번호를 호명한 적도 있다. 사과방송을 몇 차례나 하고 사과글도 올리고, 인터넷에 올라가는 동영상은 수정 후 재녹음을 해서 등록했다. 최근에는 HD로 중계회면이 바뀌며 훨씬 수월해졌다.

-최근에 신입 아나운서들이 중계에 도전하게 됐는데, 본인의 데뷔시절이 많이 생각날 것 같다.
아무래도 그렇다. 부러운 점도 많다. 앞서 말했던 HD화질 부분도 그렇고, 옛날에는 인터넷 베팅이 이루어지고 있어서 중계음성이 굉장히 중요했다. 때문에 조금만 실수가 있어도 거친 항의가 들어오곤 했다. 아무래도 좋은 환경, 많이 갈고 닦인 환경에서 데뷔를 하는 점이 좋은 것 같다. 후배 아나운서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중계를 할 때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담아 주길 바란다. 나 역시 그렇게 하고 싶고.

-결승선을 통과한 후 복기하는 중계를 들어보면 거침이 없다. 준비를 많이 하고 임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마력이 어정도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다. 평상시에도 워낙 관심이 많고, 매 경주를 앞두고 여전히 공부도 하고 있고. 이번 주의 이슈는 뭘까, 만약 이 말, 혹은 관계자가 선전했을 때 팬들에게 줄 수 있는 정보는 무엇일지 항상 가정을 해놓고 공부한다.

-앞으로 추구하고 싶은 중계스타일이 있다면?
말 이름을 불러주는 중계를 완전히 정착시키고 싶다. 우리나라는 베팅 위주로 경마가 진행되다보니 중계 자체도 지나치게 번호 위주였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된 경마 선진국을 향해 진일보하려면 말 중심의 경마가 이루어져야하고 그 시작에는 말 이름을 연호하는 중계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 외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수복색과 모자색을 활용하고 있어 중계하기는 훨씬 쉽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에는 마주복색으로 바뀌어야하는 부분이라고 보고. 현재 1,2등급의 말들은 워낙 잘 알던 말들이라 외우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은데 하위등급의 경우는 굉장히 어렵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중계는 외국처럼 감정과 혼을 실은 중계다. 어떤 말이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을 때는 감탄사도 외치고 싶고, 대단하다고 소리도 지르고 말이다. 아직은 나아가는 단계지만 그렇게 팬들에게 그 걸음의 위대함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다.




[도전은 언제나 진행형, 국내 1호 여성 경매사]



-또 다른 도전이 시작됐다. 아나운서와 경매사. 이 역시 생소한 연결인데?
방송제작을 하다 보니 경매 취재도 많이 다녔다. 자연스럽게 혈통에도 관심이 생겨 공부를 하다보니 경매를 보는게 재밌어지더라. 그게 발전해서 아 경매를 진행하다보면 이 말에 대해서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도 좋겠다, 저 모마에게는 이런 스토리가 있는데, 하는 생각에서 출발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처음이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기존의 경매가 워낙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진행되어왔기에 굳이 새로운 사람을, 거기다 여자 경매사를 투입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다행이 몇몇 분들께서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동조해주셨고 기회의 길이 열리게 됐다.

-2015년 3월 국내산마 경매에서 경매사로서의 첫 데뷔를 가졌다. 그 현장을 직접 지켜봤는데 많이 준비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끝나고 박수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을 보는 법에 대해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경매 책자에 나와 있지 않은 혈통적 잠재력과 가능성들을 많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외국과 달리 우리는 다소 루즈하게 진행되는 감이 있어 손동작도 넣어보고 톤에도 변화를 줘 보고 다양한 시도를 했다. 아직은 떨리기도 하고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내야 하는 만큼 경험이 많이 필요한 것 같다. 보는 사람도 재밌고, 그 말에 대한 정보에 무릎을 탁, 칠 수 있게 하는, 분위기가 다운됐을 때 끌어올릴 수 있고, 지나친 과열시에는 안정시킬 수 있는 그런 경매 진행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馬나운서, 김수진]



-또 다른 도전을 해볼 생각은 없나?
아나운서로서 경마 중계를 계속 발전시키고 싶다는 욕심. 방송도 우리 내에서 수용되는 걸로 그치지 않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재밌는 방송을 만들고 싶다.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점차 늘려나가 정말 살아있는 콘텐츠가 정착됐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글로벌산업학과 대학원에 재학하며 스포츠마케팅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다. 우리 경마의 경우 후원이 없어 프로스포츠와 대등하게 규모를 키워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말이나 기수, 조교사나 마주와 스폰서쉽을 연결해서 경마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일들을 해보고 싶다는 계획을 갖고 공부 중이다.

-馬나운서 김수진에게 말이란?
마사회 입사 전에 어딘가에서 손금 봤는데 “말로 먹고살겠네” 하더라. 당시에도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그러려니 했는데 마사회에 입사하고 보니 그 말이 계속 맴돌더라. 말이 뛰는 곳에서 말로 먹고 사는 거 아닌가. 두 말 다 나의 생계를 유지시켜주는 수단이다. (웃음)단 한 글자, “말”이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이자 죽을 때까지 평생 갖고 갈 딱 한 글자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작 성 자 : 조지영 llspongell@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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