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쉬 FEI 장애물 담당이사, “프랭크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 의미”
올림픽 장애물 종목에 6번 출전한 승마선수이자 미국 승마팀 국가대표 장애물 코치였던 프랭크 채펏(Frank Chapot)이 현지 시각으로 6월 20일 미국 뉴저지에서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5년간 프랭크 채펏은 미국 장애물 팀에서 주요 역할을 맡아 직무를 수행했다. 장애물 부문에서 미국 승마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1932년 태어난 프랭크 채펏은 1947년, 중학생 때부터 매클레이(Maclay) 선수권 대회를 우승하는 등 실력이 뛰어났으며 프로로서 놀라운 경력을 경신해나갔다. 프랭크 채펏은 1956년 미국 국가대표 승마팀(USET, the United States Equestrian Team)에 입단했다.
프랭크 채펏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 말 ‘벨에어(Belair)’와 함께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 데뷔했다. 당시 미국 올림픽 장애물 팀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으며 그의 어머니가 3천5백 미국달러(한화 405만 원)에 구입한 ‘벨에어’와 함께했다. 멜버른 올림픽는 당시 오스트레일리아가 엄격한 검역 정책을 펼친 탓에, 승마 부문만 따로 스톡홀름에서 개최됐다. 이후 2년간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총 6번의 올림픽에서 뛴 프랭크 채펏은 1960 로마올림픽과 1972 뮌헨올림픽에서 장애물 종목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1974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개인 동메달을 획득했다. 이외에도 FEI 네이션스 컵의 팀 부문 46번의 우승 기록을 갖고 있으며 프레지던츠 컵, 뉴욕 그랑프리, 영국 킹 조지 V 골드컵 등 다양한 승마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프랭크 채펏은 2005년 은퇴하기 전까지 24년간 베르탈란 드 네메시(Bertalan de Némethy)와 함께 미국 국가대표 승마팀을 이끌었다. 그의 리더십으로 미국 장애물 팀은 올림픽 메달을 9개 획득했다. 특히,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는 미국팀 최초로 금메달을 획득해 기록을 세웠다. 금메달은 이후 20년이 지나 2004 아테네 올림픽에서 획득했으며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수상했다.
프랭크 채펏은 미국 대표 장애물 말인 ‘젬트위스트(Gem Twist)’을 육성해낸 것으로도 유명하다. ‘젬트위스트’는 1988 서울올림픽에서 팀 부문과 개인 부문에 은메달을 안겨주었다.
1965년 프랭크 채펏은 매리 매어스(Mary Mairs)와 결혼했다. 매리 매어스 또한 올림픽 승마선수로, 1964 도쿄올림픽과 1968 멕시코시티올림픽 2번의 올림픽에서 프랭크와 함께 활동한 바 있다. 부부에게는 웬디(Wendy)와 로라(Laura)라는 두 딸이 있는데, 둘 다 승마선수다. 로라는 2007 팬아메리칸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프랭크 채펏은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기 전까지 정력적인 활동을 지속해왔다. 프랭크 채펏은 유명한 코스 디자이너이자 심판이었으며, 승마의 통합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1년 미국승마협회는 승마 발전에 기여한 점을 인정하고 프랭크 채펏에게 공로상을 수여했다.
존 로쉬 국제승마협회(FEI) 장애물 담당이사는 보도자료를 통해 “프랭크는 그야말로 전설이었다”라며, “그는 진정한 호스맨이었으며 언제나 말에게 흥미로운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었다. 승마선수로서도 뛰어났으며 트레이너로서도 놀라운 경력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서 승마 스포츠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한 시대의 끝을 의미한다”라며 죽음을 애도했다.
▲전 미국 올림픽 승마선수이자 장애물 코치였던 프랭크 채펏이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사진= Collection Poudret 홈페이지 갈무리)
작 성 자 : 황수인 nius103@krj.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