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11)


새롭게 구성된 경기도승마협회
1987년. 난 대학교 2학년이 됐다. 아시안게임의 좋지 않은 기억을 가슴에 묻고 다시 승마를 시작한 것이다. 당시 경기도승마협회 회장님이 바뀌면서 승마장의 위치도 바뀌었다. 새로운 회장님이 운영하는 승마장에서 다시 운동을 하게 된 거다. 새로운 구성된 경기도승마협회에는 여러 마리의 말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호주에서 수입되어 온 ‘제네랄리’란 녀석과 다른 두세 마리를 기승하며 운동하게 됐다. 당시 경기도승마협회에서 운동하는 것은 이제까지 어느 곳에서 운동하는 것보다도 훨씬 좋은 분위기였다. 운동만 열심히 할 수 있는 분위기였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얼마든지 더 많은 말들을 탈 수가 있었다.

‘제네랄리’ 녀석의 체고는 그리 크진 않았다. 하지만 약간 통통한 체격을 가졌고 속보의 반동이 빠르고 크지 않아 속보 운동할 때는 약간 밋밋한 맛이 났다. 개인적으로 반동이 밋밋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나는 녀석의 속보가 지루하게 느껴졌다.

1987년, 스포츠지를 장식하다
녀석은 성격이 조금 급한 편이었다. 당시 내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가끔 구보운동이 제어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용감하고 조심성이 많아 좋은 말이라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난 녀석에게 많은 정성을 쏟았다. 녀석의 점핑능력은 표준 장애물 정도인 듯했다. 특히 120클래스에서는 아주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더러브렛 품종이 대부분 그렇듯 장애물 훈련 시에는 급하게 장애물을 넘었고, 장애물을 넘고 난 다음에도 제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회에 출전해서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줬다. 1987년에 녀석과 함께 출전해 5번이나 1등을 했으며, 스포츠지에 매번 게재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매번 스포츠지에 실리면서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내게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던 중 학교에서 담당 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며칠 뒤 아침 일찍 수원 시내에 있는 한 호텔로 오라는 말씀이셨다. 아침 일찍은 예정된 시각에 맞출 수 없을 것 같아 전날 호텔 근처에서 하룻밤을 묵어야만 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기도 하고 잠자리도 바뀌고 해서 잠을 설쳤지만 왠지 좋은 일일 것 같아서 조금은 설렜다. 약속 당일 아침 경기도지사님의 조찬 모임에 참석해 표창장을 받았다. 내 개인에게 특별한 경험이었고 크나큰 영광이었다.



명마를 만나는 건 행운
지금도 같은 생각이지만 좋은 말을 만나면 개인의 영광이며, 이는 가문의 영광이 될 수도 있고 국위선양에 한몫을 단단히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한다. 특출한 능력을 보유한 말을 만나기는 쉽지는 않지만 말을 선택할 때 심사숙고해 좋은 말을 선택하면 즐거운 승마와 더불어 행복한 인생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무부대 입대하다
1987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난 경기도승마협회에서의 생활을 뒤로 하고 군 입대를 위해 상무부대에 가서 운동을 하게 됐다. 2학년을 마치고 입대를 하려고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군 입대 전 상무부대에서 장정 생활을 1년 6개월가량 하게 됐다. 당시 상무부대에는 장정생활을 하는 종목이 여럿 있었고 승마도 그중 하나였고, 난 그 일원이었다. 군대를 다녀온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는 밤을 새워가며 해도 끝나지 않듯이 내 군대 시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외롭고 힘들고 짜증 나는 일들을 다 나열해 말할 수는 없지만, 내 군 생활이 힘든 군대생활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선배의 도움으로 함께한 ‘멜로디민스트랄’
힘든 군대 장정 생활을 하던 중에 한 고마운 선배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호주에서 건너온 ‘멜로디민스트랄’이란 말을 도움받은 것이다. 상무부대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내 명의로 된 말이 필요했다. 당시 감독님께서 선배에게 부탁을 했고, 선배의 도움으로 난 녀석을 타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처음 녀석의 등에 올라타 장애물을 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큰 보폭을 가진 녀석
녀석은 아주 큰 보폭을 갖고 있었다. 처음 장애물을 넘는데도 착지 지점이 정말 멀었다. 보통의 말들은 2m 전후로 착지를 하는데 녀석은 착지 지점이 3m이상은 더 될 정도였다. 일반적으로 2연속 장애물(7.5m)을 넘을 때는 정상적인 보폭은 앞장애물을 넘고 착지 후 한발을 딛고 장애물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녀석은 보폭도 크지만 착지점이 너무 멀어서 착지 후에 바로(bounds) 장애물을 아무렇지 않게 넘었다. 그래서 앞장애물과의 거리를 8m 정도로 아주 멀리 벌려놓고 시도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할 수 없이 장애물 간격을 더 벌려 정상적인 발돋움이 되도록 해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 장애물 연습은 횡목을 많이 이용해 cavallette훈련을 많이 시켰다. 장애물 구간마다 횡목을 바닥에 깔아서 녀석이 멀리서 뛰거나 착지가 멀어지지 않게 해 천천히 녀석을 고쳐나갔다. 치열하게 훈련을 시켰지만 녀석의 항상 연속 장애물에서 실수하곤 했다.

변산 전지훈련의 추억
한번은 채석강으로 유명한 전라북도 부안 변산으로 하계 전지훈련을 가게 됐다. 그때는 군인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마냥 신나기만 하지는 않았던 기억이 난다. 그냥 아무 일 없이 군 생활을 하는 것이 제일 좋을 때였으니까. 우리는 전지훈련을 해야만 했고 전지훈련은 말 4마리와 함께 하게 됐다. 당시 전라북도승마협회의 선배분이 변산 해수욕장 한편에 소나무가 우거진 아주 좋은 위치에 간이 마사를 설치해줘 그곳에서 모진 극기 훈련을 하게 됐다. 아주 무더운 여름, 말과 함께하는 해변 전지훈련은 누가 생각하면 시원하고 낭만적이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내 신분은 전지훈련을 나온 군인이었다. 그 많은 말장구며 사료, 건초, 거기다가 무거운 장애물 세트까지 챙겨야했고, 텐트 치는 일부터 밥하는 일, 설거지까지 자잘한 일들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를 힘들게 한 것은 무더운 여름밤의 날씨와 결코 반갑지 않은 여름밤의 불청객 모기였다. 당시 상상할 수 없는 괴력을 소유한 모기는 우리가 싸워서 물리치거나 아니면 놈들에게 피를 빼앗기지 않으려 온갖 방법을 동원해야만 우리의 안전을 조금이나마 보전할 수 있었다.

모기와의 전쟁
개인 모기장과 텐트를 치긴 했지만 야전침대에 담요를 깔고 자야만 했다. 한여름에 너무 더워 등에 땀띠가 날 정도였지만 담요를 깔지 않으면 아주 강력한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직도 생각나는 것은 그곳 모기한테 물린 부위는 그곳에서 탈출을 하고 한 달이 지난 후에도 모기에게 물린 시간이 가까워지면 다시 가려워지곤 했을 만큼 끔찍했다.
나도 이 고생을 했는데 하물며 모기에게 무방비 상태였던 말들은 아마도 생지옥 그 자체였을 것이다. 낮에 주위에 있는 생쑥을 베어서 잠시 말려놓고 저녁에 모기를 퇴치하기 위해서 모깃불을 놓았지만 효과는 잠시뿐이었다. 잠을 자다가 말이 모기를 쫓기 위해 벽을 차는 소리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말들과 우리에게는 이래저래 최고의 극기 훈련인 것만큼은 확실했다.
한번은 얼차려로 모기가 극성을 떠는 간이마사 뒤편 수풀 속에서 반바지와 반팔 티셔츠만을 입고 한 시간 이상을 차려자세로 서서 기합을 받은 적도 있다. 그때만 생각하면 뒷목이 뻣뻣해지며 혈압이 상승하는 등 참 끔찍하다.

바다에서 한 바다수영 훈련
훈련은 오전 밀물 만수 때에 구명조끼를 입고 마방굴레에 조마삭 끈만 걸고 바닷물로 풍덩 뛰어들어 훈련을 진행했다. 깊은 바닷물에서 말 수영시키기를 시작으로 조마삭 훈련까지. 일단 말을 끌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을 만큼 깊은 곳으로 수영해 들어간다. 그리고 난 후 조마삭 수영을 시킨다. 나와 녀석은 처음에는 조금 무서워했다.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자 재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속으로 들어가 수영하는 녀석의 발을 보니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움직임을 그려내고 있었다. 가끔은 녀석이 날 끌고 깊은 곳으로 향할 때도 있어 두려움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때는 당황하지 않고 조마삭 끈을 잡아채듯이 진행 방향을 바꿨다. 그러면 녀석은 버둥대며 육지를 향하려고 했다.



갯벌은 완벽한 자연 마장 바닥
오전 훈련이 이렇게 끝나면 오후에는 장애물 종목을 위해 가져온 장애물을 썰물 때 해변에 설치했다. 썰물 때의 물 빠진 서해안의 해변은 운동하기에 완벽한 상태를 만들어준다. 모래의 부드러움과 완벽한 완충작용 그리고 완벽한 복구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장점을 갖고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그러한 완벽한 승마장 바닥을 볼 수는 없다.

바닷물에 떠내려간 장애물
하지만 그 좋은 환경에서의 장애물 훈련은 단 한 번으로 끝이 났다. 장애물 훈련을 마친 첫날 장애물을 철수해야 했는데 감독님이 장애물이 무거우니까 훈련하던 곳에 두자고 하셨다. 나를 포함한 몇몇은 떠내려간다고 했더니 떠내려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감독님이 조금 양보하셔서 어부들이 사용하려고 해변 곳곳에 막아놓은 나무기둥에 장애물을 가져간 동아줄로 얼기설기 묶어놓기만 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걱정이 됐지만 감독님은 천하태평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장애물 대부분은 사라지고 그나마 동아줄에 걸려있는 장애물 소대 몇 개만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웃지 못할 장애물 사건 이후에 그 좋은 운동 환경에서 장애물 훈련은 하지 못했고, 평지 운동만 하게 되었다. 가끔은 달리기 시합도 하곤 했는데 녀석의 보폭이 커서 언제나 일등으로 달렸다. 난 당연하게 녀석이 일등을 하자 좀 더 스릴을 느끼고자 다른 녀석들이 출발하고 나서 잠시 후에 출발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했다. 물론 순위가 중요하지는 않았지만 난 항상 최선을 다해서 달리기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녀석은 승마용 말이 되기 전에 경마를 했었다면 명마가 됐을 것이라 얘기하곤 했다. 어쨌거나 해변에서 녀석과 같은 준마를 타고 마음껏 달리는 기분은 내게 황홀감을 가져다줬다.

‘멜로디민스트랄’와 함께한 기억은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올렸던 것보다 함께 고생하며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 변산 해수욕장에서의 전지훈련이 내 아련한 추억을 되살리게 하며, 내게 좋은 추억과 기회를 베풀어주신 배창환 선배님께 이 기회를 통해 못다 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1987년에 ‘제네랄리’와 함께 출전해 5번이나 1등을 했으며, 스포츠지에 매번 게재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매번 스포츠지에 실리면서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서도 내게 많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1987년, `제네랄리`와 한국마사회.

▲‘멜로디민스트랄’와 함께한 기억은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올렸던 것보다 함께 고생하며 추억을 만들었던 기억이 더 많다. 특히 변산반도에서 한 전지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1989년, `멜로디민스트랄`과 변산해수욕장에서 하계전지훈련 모습.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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