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12)


까탈스러운 암말
‘레이디호크’는 호주에서 수입되어온 아주 까다로운 암말이었다. 체형은 아주 호리호리했으며, 털이 아주 부드러운 녀석이었다. 만약 녀석이 사람이었다면 ‘피부 미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매끄럽다고 할까? 하지만 ‘레이디호크’의 성격은 꽤 도도한 구석이 있었다. 내성적인 데다가 비위를 맞추기 힘든 까탈스러운 여성이라고 표현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사회 초년을 함께하다
군 전역 후 난 바로 손범용 경남승마협회 회장님의 회사인 동아수산에 입사하며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경남승마협회에는 좋은 말들이 여러 마리 있었다. 그중에 ‘레이디호크’ 녀석이 내게 배정됐고, 그때부터 나와 녀석의 애증의 관계가 그렇게 시작됐다. 녀석을 타게 된 사회 초년생 시절에는 한껏 기대도 많고, 의욕도 왕성했다. 모든 일에 긍정적인 사고가 먼저였고 무슨 일이든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했다. 녀석을 타던 초기에 이러한 생각들이 녀석을 무한 사랑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운동도 열심히 하게 됐다. 녀석에게는 언제나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해줬고, 분별없는 사랑을 줬다.

그녀를 향한 무조건적인 애정
그런 녀석에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장애물을 아주 조심히 넘었지만, 그 조심성이 너무 과해서 장애물 바로 앞에서 몸을 가누기 힘들게 왼쪽으로 도피하는 나쁜 버릇이 가진 것이었다. 도피하는 속도와 순간적인 동작이 너무나 빨라서 방심을 하다가는 바로 낙마하는 일이 태반이었다. 그래도 난 녀석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녀석을 용서하는 마음이 너무 커 낙마를 해도 내가 방심을 해서 그런 거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대회에 출전을 해도 좋은 결과를 낼 수 없었고, 점차 이런 일들이 누적이 되어만 갔다. 녀석에 대한 나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그렇게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체벌의 태도를 취하다
난 녀석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단 생각을 하게 됐다. 만약 녀석의 나쁜 버릇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녀석은 우리에게 전혀 쓸모없고 사료만 축내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보통 녀석처럼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각 처분을 하거나 용도 변경을 시켰다. 그래서 난 녀석에 대한 태도를 강압 일변도로 전환했다. 녀석의 나쁜 버릇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대응했다. 때로는 혹독한 체벌을 가하기도 했다. 체벌을 가하기로 한 후 조금은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대회에 참가해 거둔 성적만 보면 그리 큰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그대로 녀석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내가 포기하는 순간 녀석의 미래도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난 그 상황을 수수방관하며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녀석에게는 더욱 혹독한 체벌이 가해졌고 체벌을 가한 후의 내 마음도 죄책감으로 다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혹독한 체벌에도 녀석은 내 기대에 큰 변화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을 피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더니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이 조금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녀석은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은 말로 치부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멈출 수가 없었다.

망부석 같던 그녀
체벌이 녀석의 버릇을 고칠 수 있을 거란 기대와 달리 녀석의 상황은 정체되어만 갔다. 좋아지지도 나빠지지도 않는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대립했다. 난 서서히 지쳐갔다. 결국 끝내 녀석이 변할 거란 기대와 갈망도 저물어 들기 시작했다. 내 마음의 변화는 녀석을 기승하는 내 태도에 반영돼 나타났다. 녀석을 기승해 훈련할 때 난 성의 없는 태도로 녀석을 대했고. 녀석도 나와의 대립에서 한발 물러선 듯한 태도를 보였다.

기승 후에도 난 녀석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게 됐고, 자연스럽게 내 관심은 다른 녀석에게로 옮겨 가고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아침마다 마방에 올라가면 녀석과 먼저 인사하고 관심을 보여주고 혹여라도 지난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았나! 녀석의 다리와 몸 구석구석 살펴보고 만져보곤 했는데 그런 일들이 또 다른 말에게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옮겨져 가고 있었다.

때론 무관심이 약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났다. 그런데 그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변화가 녀석에게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매일 운동하러 나오던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작은 소리나 사소한 변화에도 민감하던 녀석의 모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평지운동이나 유연 운동 시에 목에 힘을 주고 재갈을 꽉 물고 나와 대립하던 행동도 훨씬 좋아졌다. 특히 장애물 연습할 때에는 왼쪽으로 빠르게 도피하던 버릇도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애물을 높여 녀석을 뛰어넘게 해봤다. 예전이면 도피했을 장애물도 최선을 다하며 넘는 모습이었다. 녀석의 변한 모습이 신기해 몇 차례 더 시도해봤는데도 최선을 다해 넘는 모습이었다. 그 이후 각종 대회에 출전해 여러 번 입상하게 됐다.

지금 생각해도 ‘레이디호크’의 변화는 완벽하게 이해는 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사랑을 줘도 안 되고, 강력한 체벌을 가해도 변하지 않던 놈이 포기하고 무관심하게 대했더니 변하다니. 정말 개성이 강한 녀석이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레이디호크’의 모습은 우리 주변에 흔히 있을 수 있을법한 어느 누군가의 모습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 가해지는 지나친 기대와 관심은 적지 않은 부담감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사실처럼 말이다. 오히려 지나친 관심과 기대가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창의력을 빼앗을 수도 능력을 저하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난 좋은 의도로 녀석을 그렇게 대했지만, 녀석에게는 부담으로 다가갔을 수도 있는 일처럼 말이다. ‘레이디호크’와의 추억은 말들도 우리 인간들처럼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폴란드에서 수입된 3마리의 말
1991년도 손범용 경남승마협회 회장님께서 폴란드에서 수입해온 마필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마필은 호주에서 수입을 해오던 시기였는데 녀석을 포함한 3마리의 마필이 폴란드에서 수입됐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부분 승마인들은 서러브레드(Thoroughbred) 마필을 선호했으며, 우리의 체형이나 힘은 서러브레드(Thoroughbred)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손범용 회장님께서는 확실성이 부족한 모험을 감행하셨다. 어떠한 결과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만큼 향후 우리나라의 마필이 유럽의 웜블러드로 교체되는 가교 역할을 하셨다고 할 수 있다. 난 수입된 마필 중에 ‘보이워크’란 녀석을 기승하게 됐다. 녀석이 폴란드에서 어떠한 성적을 가졌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어떤 소년이 타고 있었는데 대회에 참가해 장애물의 거리가 잘 맞았을 때는 아주 잘 넘었다는 사실만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난 유럽에서 온 말을 기승 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이미 흥분돼 있었다. 녀석이 검역을 무사히 마치고 우리 마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가장 완벽하고 이상적인 녀석일 거란 즐거운 상상 속에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언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느껴지는 기대감과 설렘을 즐기듯이 말이다.



본능에 충실한 상남자(?)
드디어 녀석을 포함한 아주 멋진 녀석들이 도착했다. 녀석과 처음 대면한 난 녀석밖에는 아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녀석의 첫인상은 완벽하리만큼 근사했다. 발굽의 폭이 덩치에 비해 약간 좁고 길고 높았지만 단단하게 보였고, 다리 골격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다리뼈는 녀석의 커다란 덩치를 완벽하게 지탱할 수 있게 넉넉하게 굵고 튼튼해 보였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지만 마치 해맑은 어린아이의 눈처럼 깊고 착한 눈빛을 지니고 있는 관상이었다. 모색은 아주 밝은 밤색이었으며 햇살에 반사된 녀석의 몸은 주위를 밝게 비출 만큼 반짝거렸다. 머리는 체구에 비해 무척 작아서 연예인하면 제격인 듯하게 생겼고, 다른 말에 비해 많이 긴 목을 지니고 있었다. 수말 본능에서 나오는 거친 행동과 울부짖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특히 암말이 지나갈 때는 더욱 우렁찬 소리로 구애를 하고 자기 몸을 사리지 않을 듯한 터프한 행동을 보였다. 온몸에 힘을 잔뜩 주어 멋진 자기 모습을 보여주려고 무진 애를 쓰며 힘센 자기 모습만이 제일 멋지게 보인다고 생각하는 아주 단순한(?) 놈이었다. 때때로 녀석은 암말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 마장에 대장이라도 하려는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터프한 몸짓을 보이곤 했는데 녀석이 너무 자주 그런 행동을 하면 난 그놈에게 윽박지르면서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해 혼을 내주기도했다. 그런데도 그놈은 끝까지 그 부분에서만큼은 양보를 하지 않았다. 참 자기 본능에 충실하던 놈이었다.

▲‘레이디호크’와의 추억은 말들도 우리 인간들처럼 각자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1994년 전주승마장에서 ‘레이디호크’와.
▲대부분의 마필을 호주에서 수입을 해오던 시기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대부분 승마인들은 서러브레드(Thoroughbred) 마필을 선호했으며, 우리의 체형이나 힘은 서러브레드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1994년 뚝섬승마장에서 ‘보이워크’와.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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