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16)
네덜란드에서 온 녀석
‘곤돌’은 88 서울올림픽 참가를 목표로 네덜란드에서 수입된 능력이 출중한 말이었다. 안타깝게도 올림픽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내로라하는 말 가운데 우수한 장애물 말이었던 것은 분명했다. 올림픽 출전이 좌절되고 난 후 그 녀석의 마주였던 선배가 강원도 승마협회(춘천소재)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 녀석도 함께 춘천으로 둥지를 옮기게 됐다.
‘명마는 숨 거두기 전까지 명마’
그 녀석과의 만남은 내가 직장을 춘천으로 옮기면서 이뤄졌다. 그 당시 녀석의 나이가 20살을 넘긴 시점이었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하지만 녀석은 회춘한 듯 언제나 씩씩하고 에너지도 넘쳤다. ‘명마는 숨을 거두기 전까지 명마’라는 말이 정말 맞는 말인 듯했다. 그 녀석은 내게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해줬다. 비록 나와 같이 많은 대회에 참가하지는 못했지만 녀석은 평소 연습에서 그 진가를 십분 발휘하고도 남았다.
놀라운 ‘곤돌’의 능력들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지 난 사실상 서러브레드(Thoroughbred)만을 기승했다. 손범용 경남승마협회 회장님의 배려로 ‘보이워크’란 녀석과 호흡을 맞추기도 했지만, 그때까지 내 승마 이력은 서러브레드 기승이 주가 됐다. ‘보이워크’ 녀석과 이 녀석과의 능력은 비교 할 수가 없는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만큼 이 녀석의 능력이 뛰어났고, 충실하기까지 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여러 차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우선 첫 번째 놀랐던 건 ‘곤돌’ 녀석의 엄청난 탄력성과 도약하는 힘이었다. 두 번째는 장애물을 넘기 위해 다가가는 중에서도 절대 서두르거나 빨라지지 않는 참을성이었다. 녀석의 모든 움직임에서 절제하고 있단 걸 느낄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장애물을 멀리 넘는 녀석의 능력이었다. 많은 장애물 선수들이 장애물을 넘을 때 take-off 지점을 조금 멀리 가져가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take-off지점을 조금 멀리하면 말은 Big jump를 하여 보다 안정감 있게 비월을 하기 때문이다. 녀석은 스스로가 멀리서 점프하는 것을 좋아했고, 또한 도약 능력 또한 탁월했기 때문에 장애물 비월 시 언제나 안정감을 느꼈다.
세월은 피해갈 수 없다
그러나 녀석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있었다. 녀석의 나이 때문인지 용감함이 조금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충분하지는 않았던 듯싶다. 유럽 말인 ‘웜블러드’에 대한 경험이 미비했던 내겐 녀석의 능력과 성격 등 모든 것이 충격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능력 있는 녀석도 흐르는 세월은 피해갈 수 없었다. 나이가 들자 녀석의 건강에 적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첫 번째 증상은 녀석의 사타구니에 종양이 자라나오기 시작했다. 종양이 커지는 속도는 느렸지만 우리의 걱정은 태산만큼 커져만 갔다. 수술을 할 수 있는 상황도 되지 못했고 당시에는 자라나는 종양을 수술한다고 해도 완치된다는 보장도 없고 수술할 수 있는 환경도 열악했다. 녀석의 나이 등을 고려해볼 때 수술은 녀석을 더욱 고생시키거나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는 생각에 수술을 고려해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자라나는 종양을 그저 걱정만 하고 바라보며 방치할 수는 없었다. 이곳저곳에 수소문해보고 이책 저책 찾아도 보고 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말에게 된장과 곱게 갈은 생마늘, 인삼가루, 건멸치 가루 그리고 흑설탕과 함께 소량의 참기름을 잘 섞어서 사료 급식 때 사료에 첨가해서 비벼주면 종양이 자라나는 속도를 늦추어줄지도 모른다고 하는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다. 깊은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험해 보기로 했다. 때때로 현대의 의학이 풀어내지 못한 일을 민간요법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듯이 우리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했다.
민간 된장 요법의 효험(?)
민간요법이 효험이 있었는지 아니면 내 높은 기대치와 간절한 바람이 착각을 불러일으켰는지 종양의 자라는 속도가 현저히 더디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자 어떤 종양은 떨어져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한참 후에 또 다른 종양이 피부를 비집고 나오기 시작했다. 종양이 치료된다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조금의 효과는 있다고 생각하고 계속해서 제조한 된장을 주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녀석에게 때로는 사료 급식을 하다가 숟가락으로 사료에 섞지 않은 생 된장을 주기라도 하면 아주 맛있게 싹싹 잘도 핥아 먹었다. 또한 대회에도 참가하기도 했다. 더 이상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녀석은 21살에 강원도에서 펼쳐진 전국체전에 나와 같이 출전했다. 아깝게 입상을 하지는 못했지만 우리는 함께 최선을 다한 경기를 치렀다. 전국체전 기간에 한참 북적이던 승마장은 대회가 종료되자 다시 정적 속으로 빠져드는 듯 한적한 생활로 돌아갔다. 체전 전과는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잔치가 끝난 후에는 시원함보다는 섭섭함이 한층 더 크게 느껴졌다.
이러한 적막한 시간이 지나갈 무렵 녀석은 회장님의 지인께서 목장에서 돌보신다고 해 내 곁을 떠나게 됐다. 녀석의 노후는 다행히 편안하게 되었지만 녀석이 없는 승마장은 겨울로 접어들고 있고 주위에 나뭇잎을 모두 잃고 가지만 앙상하게 서 있는 나무들의 모습과 같이 내 마음을 시리게 했다. 녀석에게 최선을 다한 마음은 지금도 흐뭇하기만 하다. 만약 녀석에게 소홀히 했다면 지금 내 마음은 많이 아팠을 것이다. 언제나 시간이 지난 후에 나와 스친 인연에 아파하지 말기를 나 자신과 약속한다.
▲언제나 시간이 지난 후 나와 스친 지나간 인연들에게 아파하지 말기를 나 자신과 약속한다. 그 가운데는 나와 함께한 녀석들도 포함된다. 1993년 춘천승마장에서 ‘곤돌’의 모습.
우스꽝스러운 첫 만남
천혜의 땅 호주에서 한국으로 팔려온 팔로미노, 녀석의 생김새는 조금 독특했다. 먼저 얼굴은 아랍 말들의 특성과 비슷하게 이마가 조금 튀어나오고 이마에서 코로 내려오는 콧등은 안쪽으로 살짝 들어가며 곡선을 그리고 있으며 아주 밝고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녀석의 체형은 앞다리가 많이 짧은 듯했고 그런 앞다리에 비해 뒷다리가 많이 길고 엉덩이가 유난히 발달돼 있었다. 그 때문인지 녀석이 평보를 하는 모습을 보면 오리 엉덩이를 가진 사람이 걸어가는 것처럼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보였다. 녀석과 나의 인연은 1997년 당시 육군사관학교에서 개최되는 이용문 장군배 승마대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녀석이 참가한 모든 종목에서 실권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냥 녀석과 같은 말을 타고 싶었다. 난 경기 후 녀석의 마주를 가르치고 기승하던 내 절친한 친구에게 대책 없이 “내가 데리고 가서 운동해볼까?”라며 갑작스런 말을 건넸다. 녀석과 나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편자를 높이다
내가 근무하던 강원도 승마협회에 녀석을 데리고 와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던 녀석을 탐구했다. 그 결과 녀석은 몇 가지 심각한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는 녀석의 우측 앞다리의 늘어나 버린 건이 가장 심각했고, 두 번째는 장애물 진입 시에 녀석의 급한 성격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녀석의 높은 목과 머리의 위치였다. 녀석의 약점을 보완하려면 동시에 모든 것을 고치기는 무리라고 생각했다. 급하게 서두르면 역효과만 나올 듯했다. 우선 녀석의 발굽 편자를 모두 빼고 편자 없는 발굽으로 방목을 약 20일가량 매일 시켜 녀석의 발굽과 지세를 관찰할 필요가 있었다. 심신이 지쳐있는 놈을 위해서 한동안 편안한 휴식도 필요한 것 같기도 했고 겸사겸사 기승하지 않고 방목시켰다. 방목은 녀석에게 훌륭한 재충전의 기회가 됐다. 근 20일 이상을 쉰 녀석에게 새로 장제를 시키면서 녀석의 걸음 습관에 의해 자연스럽게 변형된 발굽을 최대한 보호했다. 동시에 늘어나서 보기 흉하게 되어버린 녀석의 건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편자의 뒷부분을 다른 편자 조각(약 15cm)으로 아주 많이 높여줬다. 마방 안에서의 거동은 조금 불편해 보였지만 마장에서 운동을 시킬 때는 녀석의 움직임은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특히 장애물을 할 때는 안정감이 있었다.
▲괜스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었다가 녀석에게 통증만 주고 하마터면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도 갈 수도 있었던 일이 녀석에게 못내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이후에는 그 누가 뭐라 해도 녀석에 대한 내 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1991년 성남 경기도 승마장에서 기억이 없는 말.
타인의 조언보다는 내 확신이 중요
편자 작업 후 대회에 참가를 하자 다른 선배님들과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르며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흔들려 난 다시 보통 편자로 장제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내가 조금 소심했던 것 같다. 그렇게 다시 본래의 발굽 상태로 되돌려 놓은 녀석과 어느 날 장애물 연습을 하고 난 후에 수장을 시키고 마방으로 데리고 들어가는데 걸음걸이가 조금 불편해 보였다. 자세히 관찰해 보려고 녀석의 불편한 다리를 촉진하자 녀석은 강하지 않은 촉진에도 통증을 많이 느끼는 듯했다. 다시 녀석에게는 휴승이 필요했다. 괜스레 다른 사람의 말을 들었다가 녀석에게 통증만 주고 하마터면 다시는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까지도 갈 수도 있었던 일이 녀석에게 못내 미안하고 후회스러웠다. 다행히 그날은 장애물 훈련을 가볍게 한 날이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조금 더 강한 훈련을 했다면 아마도 심각한 결과가 초래됐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피해만 본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나에게는 녀석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한 확실한 처방을 확신을 했던 것이다. 이후에는 그 누가 뭐라 해도 녀석에 대한 내 확신을 저버리지 않았다.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