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27)


장애물로 시작한 승마
내가 승마를 시작한 건 1980년도였다. 아주 오랜 시간동안 승마를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승마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승마를 시작했던 승마장의 교관님은 장애물을 전공했던 분이었다. 그렇다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장애물을 전공으로 해 승마를 시작하게 됐고 이후 30년 동안 장애물에만 전념했다. 물론 중간 중간에 잠깐 마장마술도 해보고 종합마술도 해보는 행운도 누릴 수 있었지만, 그 시간은 장애물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온 후 어느 날 우리 KRA승마단 감독님이 내게 마장마술로 전향해보란 제안을 하셨다. 이유는 우리 팀의 유일한 마장마술 선수였던 C선수가 사직을 하는 바람에 C선수를 위해 얼마 전에 구입한 마장마술용 말을 운동시키고 경기에 출전할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도전, 마장마술로 전환
그 말씀을 듣고 난 3일 동안 고민을 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마장마술로 전향하기로 크나큰 결심을 했다. 정말 내게는 힘든 결정이었다. 그동안 장애물을 해온 시절이 얼마인가. 마장마술에서 성공하기도 쉽지 않다고 생각됐지만, 느지막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어딘가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올라 열정으로 승화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마장마술 첫 말, ‘다크뷰티’
넘치는 열정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를 향해서 힘차게 두 발을 내디뎠다. 마장마술로 옮긴 후 난 두 마리의 마장마술 말을 운동시키게 됐다. 그중 한 마리가 바로 ‘다크뷰티’ 녀석이었다. 난 녀석에게 기대하는 부분이 많았다. 녀석의 경험은 내 좋은 길잡이가 될 듯싶었다. 마장마술에 대해서는 미지한 내 경험과 지식을 채워주는 데 녀석의 오랜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녀석은 나이가 만만치 않아서 가끔 ‘나이앓이’를 했고 녀석의 지병인 발굽 문제도 예전에 비해 발병 주기가 많이 단축됐다.

무엇보다 녀석의 가장 큰 문제는 안구에 심각한 문제가 시작되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난 녀석에게 높은 난도의 움직임을 요구하지 못했다. 녀석의 나이가 적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조심스럽게 운동을 시켜야만 했기 때문이다. 녀석이 젊었을 때 녀석의 움직임은 그리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동작의 정확성과 움직임의 규칙성이 좋았다. 최고의 말은 아니더라도 자주 순위권에 드는 훌륭한 녀석이었는데.

나이가 가져다주는 안타까움
그러나 사람이든 말이든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녀석은 여러 문제점 등이 생겼다. 녀석의 첫 번째 문제점은 유연성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가끔씩 다리에 문제가 생긴다는 점이었다. 다리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녀석은 앞다리에 체중을 싣지 못하고 후구 쪽으로 체중을 옮겨 서 있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녀석의 몸은 급격히 나이를 먹는 것처럼 보였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온 후 감독님의 제안으로 마장마술로 전향했다. 느지막이 새로운 분야에 도전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 속에서 어딘가에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끓어올라 열정으로 승화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클래식걸’과 함께 마장마술 연습 모습.

심각한 안구 손상
이후 녀석에게 심각한 안구 손상 문제가 발생했다. 녀석의 왼쪽 눈에 일어나기 시작한 문제는 녀석의 수정체를 하얀색으로 빠른 속도로 변하게 만들었다. 말보건소에서 진료를 받았지만 정확한 진단이 어려운 병이라고 통보를 받았다. 단지 가능한 한 녀석의 마방을 어둡게 해주면 병의 진행 속도를 조금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하는 말을 들었다. 그날 이후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가장 어두운 구석진 마방으로 녀석을 옮기고 녀석을 관찰했다. 한쪽 눈이 불편해도 녀석을 운동시키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운동을 시켰고 녀석의 병이 더 진행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시력을 잃다
우리의 바람과는 달리 녀석의 병세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끝내 왼쪽 시력을 잃은 듯해 보인 모습도 보였다. 왼쪽 눈앞에서 빠른 손놀림을 해봐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먼 산만 바라보는 듯했다. 그렇게 한 달여가 지난 후에는 나머지 오른쪽 눈에도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병의 진행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안타깝기만 했다.

나머지 오른쪽 눈의 병도 빠르게 진행됐다. 난 측은한 마음이 들어 녀석에게 다가가기 전에 음성을 최대한 부드럽게 했다. 그리고 먼저 녀석에게 내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인지시키고 나서야 녀석과 교감을 하는 동작을 해야만 했다. 녀석의 시력이 어느 정도 살아있을 때까지 녀석은 불편한 듯은 보였지만 기본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움직임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귓바퀴를 연신 움직이며 다치지 않으려고 조심에 조심을 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마방에서 방목장으로
녀석의 병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기를 바라는 내 간절한 마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병은 빠르게 진행됐다. 끝내는 양쪽 시력을 모두 잃는 상태가 됐다. 우리는 녀석이 스스로 생활하는 방법을 찾기를 바라며 방목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양쪽 시력을 모두 잃은 녀석은 마방에서 나오는 것조차 극도로 두려워했다. 마방에 깔려있는 톱밥과 마방복도에 깔려있는 고무 우레탄과의 촉감이 다른 것을 느끼자 녀석은 절대로 마방에서 나오려 하지 않았다.

마방에서 한참 만에 조심스럽게 나온 녀석을 방목장으로 조심스럽게 데리고 갔다. 마방에서 방목장까지 가는 중에도 녀석은 많이 불안해했다. 이따금씩 제자리에 서서 귀를 이리저리 쫑긋하고 코를 크게 벌려서 냄새도 맡고 하면서 힘들게 방목장으로 데리고 갔다. 녀석을 끌고 이곳저곳 구석구석 데리고 가서 안심시킨 후에 조심스럽게 마방 굴레를 풀어줬다. 혹시 위험할까봐 이동식 방목장을 만들어서 방목을 했다. 처음에는 얌전하던 녀석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조금 앞으로 움직인 후에 다시 서서 귀를 쫑긋하고 다시 움직이기를 서너 차례 반복. 방목장 펜스 가까이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녀석이 지혜롭고 의연하게 대처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녀석은 방목장 펜스에 부딪히자 급작스럽게 돌변했다. 움직이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방목장 여기저기 부딪히며 끝내는 방목장 펜스를 넘어뜨리고 자신도 넘어질 듯하며 방목장을 벗어났다. 녀석은 자기 몸에 부딪치는 것이 없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이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냄새를 맡는 듯이 행동했고 귓바퀴는 연신 급히 움직였다. 불쌍한 녀석의 그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음성을 사용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녀석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녀석은 내 음성을 들었는지 자신에게 다가가고 있는 날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찾으려고 했다. 녀석은 보이지도 않는 눈을 크게 뜨면 혹시나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눈을 깜박이며 최대한 눈을 크게 뜨려고 했다. 녀석의 그런 행동은 보고 있는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 후로 우리는 녀석에게 더 이상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그리고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먹는 것을 넉넉히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렇게 어렵게 하루하루를 지내던 녀석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마방 안에서도 극도로 작은 움직임만을 보였다. 근육질이던 녀석의 멋진 몸매는 야위어만 갔고 움직임이 거의 없던 녀석의 다리는 부종이 생기기 시작했다. 부종은 끝내 아주 심각한 상태까지 갔다.

▲사람들 사이의 이별도 쉽지 않지만, 말과의 이별도 쉽지 않다. 함께 동고동락해온 말들과의 이별은 기승자들의 감정에도 큰 영향을 준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의 생은 유한하고 언젠간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면 고이 보내주는 것도 필요하다. 2011년 ‘다큐뷰티’와 함께 대전복용승마장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한 선택
우리는 이제 녀석과 헤어짐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각자 느꼈다. 모두가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지만 누군가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게 공통된 생각이었다. 난 녀석에게 더 큰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녀석과 헤어져야 한다고 팀원들에게 말했다. 팀원들 역시 기다리고 있었던 듯이 모두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난 말 보건소 진료팀에게 의뢰를 했다. 그리고 녀석과의 이별 날짜를 통보받았다. 진료팀의 의견 역시 빨리 보내는 것이 녀석에게 고통을 줄여줄 거라고 진단을 내려줬다.

사람들 사이의 이별도 쉽지 않지만, 말과의 이별도 쉽지 않다. 함께 동고동락해온 말들과의 이별은 기승자들의 감정에도 큰 영향을 준다. 비단 말뿐 아니라 함께 생활해온 애완동물이 죽음을 맞이해도 가슴 아픈 게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과 동물의 생은 유한하고 언젠간 이별을 맞이해야 한다면 고이 보내주는 것도 필요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다큐뷰티`가 저 세상에서 잘 살고 있기를.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저작권자 © 말산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