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28)


멋진 녀석 ‘리코’
멋진 녀석! 이 말 이외에는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도 압축되지도 않는 녀석이다. 녀석과의 만남은 내가 마장마술로 전향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뤄졌다. 30여 년간 운동해왔던 장애물 종목을 포기하고 새롭게 마장마술을 시작하면서 녀석과 함께하게 된 것이다. 물론 마장마술로의 전향은 3일간 고심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장애물과 마장마술을 병행(?)
마장마술로 전향 후 처음 3일 동안은 장애물 말인 ‘안톤100’과 ‘리코’ 두 녀석을 함께 운동시켰다. 장애물과 마장마술 모두 해보라는 감독님의 권유도 있었고, 나 또한 광저우아시안게임에 종합마술 종목에 출전한 경험이 있었기에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사흘간 종목이 다른 두 녀석을 운동시켜 본 결과, 두 가지를 병행하려 했던 모습은 내 자만과 욕심이었단 사실을 깨닫게 됐다. 장애물 운동과 마장마술 운동은 많은 차이가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스케이팅’의 차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스케이트를 타는 것은 같지만 완성해야 하는 동작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혹자는 두 종목 모두 하는 게 가능하지 않겠냐고 묻기도 한다. 난 천재가 아닌데.....

두 종목의 차이
장애물 운동은 상대적으로 말에게 스트레스를 덜 주는 편이다. 항상 말을 기분 좋게 해주려는 게 일반적이다. 운동 도중에 말이 다른 곳에 집중하거나 요동을 칠 경우, 가끔 모둠발로 뒷발차기를 할 경우에도 선수는 말을 칭찬하거나 웃음 지어줄 수 있다. 기승자에 대한 복종심보다는 말의 컨디션을 최고조로 유지토록 하는 게 장애물 종목에서의 일반적인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말의 에너지가 충만해 보이거나 충만한 에너지를 통해 발현되는 격한 동작을 일부 선수들은 더욱 선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장마술 운동은 장애물과는 분명 다르다. 마장마술은 동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긴 시간 동안의 운동을 필요로 하며, 말을 편안하게 해주기보다 자연스러운 복종을 요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동작의 규칙성과 화려한 움직임도 요구된다. 화려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규칙성을 갖추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복종성이 함께 요구되니 마장마술 말들은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이처럼 장애물과 마장마술은 정반대의 운동 특성을 갖고 있다.

나쁘게 변해 버린 ‘리코’의 실력
처음 마장마술을 시작하면서 녀석과 나의 불협화음은 도가 지나칠 정도였다. 마장마술에서 요구되는 아름다운 모습은 어디 한 구석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녀석의 움직임은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최악이었다. ‘리코’ 녀석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 한동안은 아주 좋은 성적을 올렸다. 처음 들어온 해에 전국체전 승마대회에 출전해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에도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듬해 아시안게임 선발전에서도 1위를 차지해 대표로 선발되는 등 우수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녀석의 성적에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아시안게임 선발전 이후 녀석은 한국의 살인적인 무더운 여름 날씨에 힘들어했다. 본격적인 여름 시즌이 시작되면서 체력은 급격히 떨어졌고 걸음걸이는 보통말 수준의 걸음걸이로 변했다. 당시 녀석을 기승하던 C선수는 갑작스러운 ‘리코’의 변화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바뀐 녀석의 걸음걸이를 다시 만들려고 노력하는 C선수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쓰럽게까지 했다. C선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광저우로 출발할 때까지 본래의 모습을 찾지 못했다. 우리는 녀석의 급변한 모습에 의아해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처음 녀석을 보고 선택할 때는 최고였다. 녀석만큼 좋은 모습을 보인 말이 없었고, 현지에서 출전한 대회 성적표도 월등히 우수했었다. 다른 녀석들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마장마술로 전향한 후 ‘리코’와 훈련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리코’와 힘든 훈련을 한 이유는 아무리 좋은 자질을 갖춘 말일지라도 잘못된 걸음을 그냥 두면 결코 최고의 마장마술 말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난 마장마술 선수였기 때문이다. 2011년 ‘리코’와 함께 한국마사회에서.

난 마장마술 선수
마장마술로 전향한 후 막 내가 녀석과 함께 운동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이들이 웃었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당시 우리의 운동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했을 정도로 볼품없었다. 당장 내가 보는 앞에서 비웃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돌려 입을 막고 웃었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난 녀석의 넓은 등 위에서 쿵쿵거리며 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짧은 시간 후 녀석을 세워놓고 잠시 쉬었다 가는 다시 속보 운동을 하면 방앗간에서 방아 찧는 소리가 나듯 했다. 쿵쿵거리고 숨을 헐떡이며 운동을 했으니 보는 이는 웃지 않고는 배겨낼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사실 녀석을 편안하게 해주고 운동을 하면 그런대로 볼만은 했다. 그러나 내 생각은 조금 달랐고, 그렇게 해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녀석의 걸음을 그냥 두면 결코 최고의 마장마술 말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고, 난 마장마술 선수이기 때문이다.

‘리코’를 위한 특단의 조치
녀석의 가장 큰 문제는 케이던스(cadence; 스텝과 스텝 사이의 소요 시간)가 모두 사라진 밋밋한 걸음걸이였다. 밋밋한 걸음을 고치기 위해 먼저 고삐를 최대한 짧게 잡고 머리와 목을 최대한 고양시켰다. 동시에 박차와 종아리를 끊임없이 사용해 녀석의 후구 움직임을 활성화시키고 아주 강한 주먹으로 녀석의 앞을 들어 올린단 상상을 했다. 물론, 앞서 설명한 방법을 올바른 기승술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당시에 난 녀석에게 특단의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흔히 말하는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훈련을 할 수가 없었다. 사람도 심한 병이 들면 수술대에 놓고 수술을 해야 하는 것처럼 ‘리코’에게도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녀석을 운동한 지 2일 만에 녀석은 내가 요구하는 걸음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이미 오래전에 그 걸음걸이를 익혔고 그 후에 꾸준히 해왔을 것이다. 그런 덕분에 내가 원하는 걸음걸이를 빠른 시간에 아주 조금이나마 흉내 내는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제는 나와 녀석의 시간 싸움이 남아 있다. 이제부터 녀석의 걸음은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난 녀석의 이런 걸음을 만들려고 내 온갖 능력을 총동원했다. 그런 만큼 내 체력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점차 녀석은 내가 원하는 걸음을 차츰차츰 표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케이던스가 있는 걸음으로 실내마장 한 바퀴를 완전하게 돌지는 못했다.

다음 목표는 내가 원하는 속보 걸음으로 실내마장 한 바퀴를 도는 것이었다. 당시에 실내마장 한 바퀴를 도는 게 얼마나 힘이 들던지 내가 원하는 케이던스가 있는 속보를 유지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다. 마치 몇 년 만에 400m 달리기를 하게 됐는데 전력 질주한 후에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입속에서는 단물이 나오며 치아가 빠질 듯한 그 느낌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동시에 팔뚝에 전해지는 묵직함. 녀석과 고삐로 씨름하고 난후 내 팔뚝은 마치 ‘뽀빠이’를 연상시키게 했다. 이렇게 걸음을 만들기 위해서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녀석의 걸음이 차츰 괘도에 오르자 직선운동에서 점차 곡선운동으로 훈련에 변화를 줬다. 성격이 게으르고 빨리 지치는 ‘리코’ 녀석은 오른쪽으로 원운동이나 회전이 되는 곡선운동을 하면 왼쪽 후구가 밖으로 밀려 나가며, 녀석의 등으로 전해져오는 속보 반동은 왜 그리도 센 건지 도무지 녀석의 등에 안정돼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은퇴 후 ‘리코’ 녀석이 지닌 훌륭한 혈통을 이어가는 일 또한 녀석이 해온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마로 제2의 마생을 시작하게 될 ‘리코’를 항상 응원한다. 2012년 상주 국제승마장에서 피곤한지 쉬고 있는 ‘리코’의 모습.

‘리코’의 묘한 매력
이렇게 ‘리코’는 무척 타기 힘든 녀석이었지만, 난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그것은 녀석은 참 묘한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놈인데도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녀석의 외모, 어린아이처럼 착한 성격, 심하게 다그쳐도 결코 삐지지 않는 Cool함, 놀랄 만큼의 침착성, 동작의 규칙성과 정확성 등 날 끌어들이는 매력들이 많았다.

녀석과 함께 운동을 한 지 2개월이 되자 ‘리코’뿐 아니라 내 몸에도 변화가 생겼다. 몸무게가 7kg 나 줄었고, 45세의 만만치 않던 내 배에도 왕(王)자의 복근이 생겼다. 내 몸은 승마선수가 아닌 격투기 선수처럼 변화됐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살이 빠지니 무슨 특공대 전사처럼 두 눈빛만 살아 있었다. 건실해진 신체 변화와 달리 허리와 무릎에는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도 했다. 여전히 무릎은 지금도 불편하지만 허리는 시간이 지나자 제자리를 찾았다.

제2의 마생을 준비하다
불협화음으로 시작된 ‘리코’와의 만남은 온갖 시행착오와 결코 포기하지 않는 노력 끝에 각자 원하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다. 정말 힘들었던 과정에 나 아니면 녀석이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지금과 같은 훌륭한 파트너가 되지는 못했을 거다. 녀석도 내 끊임없는 요구를 묵묵히 잘 받아줬고, 나도 끊임없이 인내하며 녀석에게 요구를 했기에 발전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녀석과 난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지만 녀석의 나이가 조금 걱정이 된다. 녀석의 성격이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른 성격이라서 매해가 지날 때마다 녀석에게도 변화가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런 이유로 녀석의 빠른 은퇴를 생각하고 있으며, 은퇴 후 녀석이 지닌 훌륭한 혈통을 이어가는 것이 지금까지 녀석이 해온 일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종마로 제2의 마생을 시작하게 하려는 거다. 앞으로 남은 녀석의 앞날에 화려한 마생이 펼쳐지길 기원한다.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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