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문화 탐방 - 인물편

‘말’은 전 인류의 역사와 발전에 크게 기여한 동물 가운데 하나로 인간의 실생활 가까이에 존재해왔다. 특히 우리 민족을 기마민족이라고 할 만큼 우리 조상은 말과 밀접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고 말과 관련된 문화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당장 역사적 기록만 보더라도 고려시대 160개, 조선시대 172개의 말 국영 목장이 있었고, 수만 마리의 말을 사육한 기록 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말이 수행하던 역할이 다른 것들에 의해 대체되면서 자연스럽게 말 문화 등이 사라져가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참 많고 다양했던 말과 관련된 문화가 세대가 거듭되며 더욱 사라져가고 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011년 말산업육성법이 제정된 이후 국내 말산업 육성을 위해 말 두수와 승마시설 등을 늘리는 데 주력해왔다. 그 과정에서 우리 말 문화 재조명에는 조금 소홀하지 않았냐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지금 ‘헌마공신 김만일상’ 제정은 우리 말 문화에 대해 재조명해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헌마공신 김만일상’ 제정을 기념해 우리 문화 속에 숨어 있는 말 문화 인물을 재조명해본다.

‘말’을 통한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헌마공신’ 김만일

말과 관련된 역사적 인물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는 ‘헌마공신’ 김만일이다. 제일 먼저 ‘김만일’이 언급되는 이유는 그가 ‘말’을 통해서 보여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과 탁월한 말 육성 능력 때문이다.

제주 서귀포 남원 의귀리에서 태어난 김만일은 젊은 시절 개인 말 목장을 경영해 성공을 거둔다. 당시 아무도 눈여겨보고 있지 않던 한라산 고지대를 개척해 그곳에서 말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아울러, 지속한 말 종자 개량으로 말 두수를 대폭 늘려 제주에서 가장 많은 말을 소유한 부자로 성장한다.

말 부자로만 남았다면 그가 ‘헌마공신’의 칭호까지 받을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김만일은 자신의 것을 내놓음으로써 역사적인 인물로 남게 됐으며, 후손들도 벼슬을 받는 듯 혜택을 입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난 뒤 한창 전쟁이 치러지고 있던 가운데 조선에는 전쟁에 사용되는 전마가 부족했다. 실제로 전마는커녕 운송용 말, 파발마조차 부족한 상황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전국에 있던 말 목장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고, 국가에서 필요한 말을 보충할 방법은 국내 최대 말 목장지대인 제주에서 충원하는 방법뿐이었다. 조정에서는 우선적으로 제주에 있는 국영 목장에서 말을 충원했지만 필요한 말이 크게 부족한 상황에서 개인 말 목장주인 김만일에게 전마를 요청했고, 김만일은 기꺼이 500두의 말을 바친다. 조정의 명령에 따른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후 사료를 살펴보면 조정에서 요구한 것보다 훨씬 말을 바친 걸로 비춰지고 있다. 김만일은 이후 광해군 12년(1620년)과 인조 5년(1627년)에도 1,300두가 넘는 말을 바쳐 조정으로부터 공로를 인정받았다. 광해군 대에는 종2품 가선대부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제수받았고, 이후 인조 대에는 종1품 숭정대부에 봉해지고, ‘헌마공신’으로 칭해졌다.

김만일 사후에도 후손들은 계속해 말을 바쳤고, 조정에서는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이란 직책을 신설해 경주 김씨 가문의 세습직으로 인정해줬다. 초대 산마감목관은 김만일의 셋째 아들 김대길이 맡았으며, 218년 동안 감목관직을 세습했다. 후손들은 김만일의 정신을 계승해 대흉년이 드는 해에는 구휼곡을 내 빈민을 구휼하기도 했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에서 “제주에서 잊지 말아야 할 사람으로 김만일을 꼽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이라고 평한 바도 있다.

김만일의 공적과 공헌에 비해 일반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말산업육성법의 제정 이후 역사적 기록을 토대로 말산업의 역할 모델로 주목할 만한 ‘헌마공신’ 김만일에 대한 연구와 평가가 다시 이뤄지고 있다.

제주도는 지난 2014년 갑오년, 청마의 해를 맞아 ‘헌마공신 김만일 표준영정 조사연구’의 용역을 진행했다. ‘김만일’과 관련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표준영정 제작 등을 통해 문화재 보존 관리 및 사업에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김만일의 후손들의 대표적 얼굴 표본을 추출하고 작고한 이들의 영정 사진을 참조해 CG 합성 후 표준 얼굴을 지정했다. 연구 결과, 표준 영정 초상화가 제작됐으며, ‘헌마공신 김만일 기념사업’ 등을 위해 활용되고 있다.

▲제주도는 연구 용역을 통해 지난 2014년 헌마공신 김만일 관련 문화재를 보존·관리하고 각종 문화 사업에 활용하기 위해 김만일의 영정을 제작했다. 실제 김만일의 후손들의 대표적 얼굴 표본을 추출하고 영정 사진 등을 참조해 CG 합성 후 표준 얼굴을 지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헌마공신 김만일의 표준 영정.

‘말’에서 시작해 당대 최고 어의까지…마의 백광현

이외에도 말과 관련된 말 문화 인물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마의’로 불리는 ‘백광현’이 있다. 조선시대 현종, 숙종 대의 인물로 조선시대 궁중 어의로 활동하며 명의로 평가받았다.

본래 백광현은 천민 신분으로 말 목장에서 말을 치료하는 수의사였다. 독학을 통해 침술을 익혀 말의 병을 고치던 그가 종기를 앓는 사람에게 침술을 시행해 명성을 얻었으며, 의원의 신분으로 상승했다. 의과급제생의 방명록인 의과방목에는 오르지 못했으나 뛰어난 종기 치료술로 현종 때에 내의원 의관을 지냈다. 또한, 현종의 병을 완치한 공으로 어의에 올랐으며 현감까지 임명되기도 했다.

『마의 백광현』이란 제목으로 2권의 소설이 출간됐으며, 지난 2012년에는 배우 조승우가 주연을 맡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마의’로 불리는 백광현의 일대기를 다룬 배우 조승우 주연의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다. 드라마 ‘마의’.

의학서에 ‘동의보감’이 있다면 말 의학서는 ‘의마경대’

조선시대 최고의 의학서적이 동의보감이라면 말과 관련된 조선시대 수의학 서적은 ‘의마경대전’이다. ‘신각참보침의마경대전’이란 이름의 수의학 서적은 조선 인조 때 무관 출신인 이서에 의해 편찬된 서적이다. 이서는 사복시 제조로 말 관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사복시는 조선시대 왕이 타는 말과 수레, 마구, 목축 등에 관한 일을 맡던 관청으로 말의 관리가 중요한 업무였다. 당시 말은 중요한 운송수단이자 전쟁물자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말 관리를 담당하는 이들은 어려운 한자를 알지 못하는 이들로 관리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서는 이들이 손쉽게 말 의학 서적을 볼 수 있도록 중국의 마의학서인 ‘마경’을 한글로 번역해 보급했다. 아울러, 왕에게 건의해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말을 번성하게 했으며, 무기를 정비해 왕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기도 했다. 이외 원래부터 전해 내려오던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을 우리말로 번역한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도 펴냈다.

▲종래부터 전해온 ‘신편집성마의방(新編集成馬醫方)’과 명나라의 ‘마경대전(馬經大全)’을 번역해 엮은 ‘마경초집언해(馬經抄集諺解)’.

‘말’을 잘 묘사해 그린 ‘유하백마’…공재 윤두서

‘자화상’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 화가인 공재 윤두서는 말 그림 분야에서 역대 최고의 솜씨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시서화(詩書畵)에 두루 능한 문인으로 알려진 그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이기도 하다. 남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의 뜻을 펴지 못하고 일찌감치 글과 그림에 몰두했다. 말년에는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가 실제로 말을 기르며 여러 점의 말 그림을 남겼다. 말의 신체적 특징을 잘 표현한 그의 묘사 실력은 화법을 물려받은 아들 윤득희나 손자인 윤용조차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수준이었고 중국에까지 화명이 알려질 정도였다. 윤두서의 후손에게 전해지는 해남윤씨가전고화첩(海南尹氏家傳古畵帖)에는 여러 점의 말 그림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대표작 ‘유하백마(柳下白馬)’가 있다.

▲‘자화상’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조선시대 문인 화가인 공재 윤두서는 말 그림 분야에서 역대 최고의 솜씨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표작 ‘유하백마(柳下白馬)’.

마상무예의 원형을 담은 ‘무예도보통지’

세종대왕과 함께 조선을 대표하는 군주로 평가받는 정조대왕도 말과 인연이 깊다. 한국마사회는 청마의 해인 지난 2014년 ‘말 문화를 빛낸 12인’ 중 1위로 정조대왕을 선정했는데 그 배경에는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한 점을 꼽았다. 말과 오랜 역사를 함께해온 우리 민족인 만큼 말 위에서 펼치는 무예 등이 전해왔을 텐데 이를 책을 통해 기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를 맞이하면서 우리 민족의 마상무예의 맥이 끊겼는데 마상무예를 기록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덕분에 추측과 상상에만 의존해야 했던 마상무예의 원형을 재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상무예는 1990년대에 들어 학자와 한민족전통마상무예격구협회, 한국마사회 등의 협력에 의해 복원됐다.

정조대왕은 왕실학문기관인 규장각의 학자 이덕무, 박제가와 왕실호위군대인 장용영의 무관 백동수에 명해 종합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다. 이 책은 임진왜란으로 병력양성이 중요시된 1598년(선조 31)에 편찬된 ‘무예제보(武藝諸譜)’와 1759년(영조 35) 사도세자의 주도 하에 편찬됐다는 ‘무예신보(武藝新譜)’를 집대성하고 보완한 것으로 24가지의 무예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말과 함께 해온 인류의 역사만큼 우리 문화 속에도 말과 관련된 문화들이 많다. 그 가운데 ‘헌마공신 김만일상’을 기념해 말과 관련된 말 문화 인물을 재조명해본다.

황인성 기자 gomtiger@horsebiz.co.kr
-Copyrights ⓒ말산업저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말산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