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재식 감독의 ‘나와 함께한 녀석들’(29)


그녀와 첫 만남
2010년 3월경 각종 승마지원 사업에 필요한 말을 구입하기 위해 말산업 선진국 독일로 말 검수 출장을 떠났다. 기존 선수단이 사용할 말만을 구입하는 단일목적이 아니라 각 부서에서 다른 용도로 활용할 여러 마리의 말들을 검수하기 위한 출장이었다. 나를 포함한 총 6명의 검수 인원이 꾸려질 만큼 중요하고 큰 규모의 검수 출장이었다.

난 2명의 선수와 함께 승마단을 대표해 검수를 진행했다. 우리의 주목적은 그해 11월에 있을 광저우 아시안 게임 종합마술 경기에 출전할 말을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각 부서에서 필요로 하는 초보자·승마 지도자 강습용 말 검수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맡았다.

바쁜 일정 속에서 일반 강습용 말을 검수하기 찾은 어느 승마장에서 우연찮게 ‘클래식걸’ 녀석을 만나게 됐다. 당시 ‘클래식걸’은 아주 예쁜 옷(털)을 입고 있었고 정말 착하게 보였다. 또한 모가 난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장애물도 곧잘 넘었다. 난 녀석을 검수를 위해 동행한 승마활성화팀 동료에게 적극 추천했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함께 간 모든 동료들도 특출한 외모를 지닌 ‘클래식걸’을 똑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클래식걸’은 우리나라에 초보 강습용 말로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나와 다른 두 명의 선수는 독일에 남아서 아시안 게임 준비를 했고 그렇게 ‘클래식걸’과 각자 다른 목표를 위해 나가고 있었다.

마장마술로 전격 전향
광저우 아시안게임 후 얼마 지나지 않은 2011년 1월 경 우리 선수단의 유일한 마장마술 선수인 C선수가 개인적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C선수가 빠지면서 우리 선수단은 마장마술 선수가 한명도 없게 됐고 C선수를 위해서 구입한 말 ‘리코’는 졸지에 주인을 잃은 신세가 됐다. 그리고 ‘리코’ 녀석을 운동을 시킬 사람이 없게 됐다. C선수 대신 다른 선수를 영입하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박재홍 감독님의 권유로 나는 30년 장애물 선수를 포기하고 우리 팀의 유일한 마장마술 선수라는 부담스러운 짐을 떠안으며 마장마술로 전격 전향을 하게 됐다.

에이스 말인 ‘리코’와 그보다 능력이 조금 떨어지고 나이가 많은 ‘다크뷰티’를 타고 훈련을 했다. 그런데 ‘다큐뷰티’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말로 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화의 진행 속도가 다른 말들에 비해서 너무 빨랐다. 그런 이유들로 나와 ‘다크뷰티’와의 훈련은 언제나 충분치 못했다. 그러던 차에 ‘다큐뷰티’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양쪽 눈을 모두 실명하게 됐고, 그 녀석과 슬픈 작별을 해야만 했다.

다시 만난 Classic Girl
‘리코’가 아주 우수한 말이기는 하지만 나에게는 ‘리코’ 한 마리만으로는 운동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부족한 운동량을 채우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우리 팀(당시 승마훈련원)에서 보유하고 있는 강습용 말들 중에서 마장마술을 가르칠 말을 찾아보았다. 강습 말들 중에는 우수하지는 않지만 독일에서 수입되어올 때 나름 마장마술을 배워서 마장마술 성적을 보유하고 있는 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그 말들을 며칠에 걸쳐 시승을 했지만 마음에 와닿는 말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에 ‘클래식걸’이 생각났다. 그날 마침 당시 교관양성팀에 교관 보조로 있는 K군이 ‘클래식걸’을 기승하고 있었다. 당시 ‘클래식걸’은 최악의 몸 상태를 하고 있었다. 한 달 전에 뒷다리에 생긴 찰과상을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서 봉와직염에 걸렸고 부종이 너무 심해서 운동을 하지 못하다가 서서히 회복 운동 중인 상태였다.

당시 ‘클래식걸’의 모습은 마치 돈키호테의 로시난테 모습 같았다. 배불뚝이에 다리는 코끼리 다리만큼 굵게 부어올라 있었고 운동을 하지 못해서 모든 근육이 사라져 엉덩이는 뾰족하게 솟은 산처럼 보였으니. 그러나 난 그 가운데 강렬한 첫인상을 느꼈다. 충만한 에너지와 강한 인내력이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다른 말과는 다른 총명함이 느껴졌고, 걸음걸이가 규칙적이고 좀 더 정제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장마술로 전향하고 나서 만난 ‘클래식걸’의 모습은 마치 돈키호테의 로시난테와 같았다. 그중에서도 난 ‘클래식걸’의 충만한 에너지와 강한 인내력이 느낄 수 있었고 강렬한 첫인상을 받았다.

대한민국 최초 말 갈라 쇼 주인공
‘클래식걸’과 함께 해온 지 벌써 6년이 넘었다. 나와 함께한 녀석들이 참 많고, 행복한 순간들이었지만, ‘클래식걸’과의 추억은 좀 더 특별했던 것 같다. 그만큼 소소한 이야기부터 큼직큼직한 거대 이벤트까지 많은 일들을 함께 겪어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아마도 2013년 10월 27일 열렸던 국내 최초의 말 갈라 쇼일 것이다. 갈라 쇼 이후 나와 ‘클래식걸’ 모두 매스미디어의 큰 주목을 받게 됐고, 뉴스에도 출연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쉽지 않았던 ‘클래식걸’과의 공연 연습이 기억에 남는다. 현란하게 공연장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니는 휘황찬란한 형형색색의 조명과 사람도 들으면 놀랄 만큼의 굉음들은 평소 우리가 운동하던 곳과는 너무나 차이가 많은 곳이었다. 쉽지 않은 환경에서 오랜 시간 많은 연습량을 소화한 덕분에 성공적인 갈라 쇼를 이뤄낼 수 있었다. 아울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해준 렛츠런 승마단 선수들과 학생선수들의 노고에 감사의 인사를 해주고 싶다.

추억을 돌이켜보며
‘클래식걸’과 훈련하는 동안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답답할 때도 종종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이를 이겨내기 위해 막무가내로 밀고 달려온 것 같아 녀석에게 많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답보 변환을 가르칠 때와 tense를 없애기 위한 과정, Grand prix에 출전하기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최면을 걸던 이기적인 나만의 욕심들까지 돌이켜 생각하면 아쉬운 생각도 든다. 평화롭고 잔잔한 바다 위에서 바람이 시키는 대로 돛을 맡기면 되었을 것을 종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을 우격다짐으로 헤집고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클래식걸’과의 훈련을 상상하면 설레고 입가에 엷은 웃음꽃이 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이. 난 ‘클래식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것이다.

공언이 허언이 되지 않기를
처음 시작할 때 아무런 계획도 없이 ‘클래식걸’을 가르쳤다. 가르치면서 이곳저곳 벽에 부딪혀 무참히 부서지기도 했지만 다행히 선천적으로 강하고 끈질긴 천성 덕분에 힘든 고비를 여러 번 넘겨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아마도 내가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며 혀를 껄껄 차며 반신반의하는 승마인도 여럿 있을 것이다. 혹여 그렇더라도 승마인을 만나면 꼭 Grand prix까지 가르쳐 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혹시라도 내 공언이 허언이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는 방편으로 삼기도 했다. 그들과의 약속 아닌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무감이 나 스스로를 만들었고 이를 지키기 위해서 더욱 훈련에 매진을 하는 채찍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수없이 많은 대립과 갈등들은 어떠한 말로도 대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 많았던 대립과 갈등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고 단정하면서 훈련해왔는지도 모른다.

최고 난도에 도전
어찌 됐거나 나와 ‘클래식걸’은 비록 늦깎이로 시작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해왔고, 최고의 성적은 아니지만 최고 난도의 경기에 참가했다. 좋은 성적을 거뒀으면 더욱 좋았겠지만 최고 난도에 도전했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이렇게 ‘클래식걸’을 Grand prix까지 가르칠 수 있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포기하지 않았던 강한 인내력이라고 생각한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인내력만으로 가능했었을까? 물음표를 달지 않을 수 없다. 이른 아침 회사에 출근을 하기 위해서 운전을 하는 동안 거의 매일 같이 그날그날 훈련할 것들을 생각하게 된다. 아직까지도 이렇게 훈련을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감으로 인해 마음이 설레 인다. 또한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가 싶다가도 양 어금니를 꽉 깨물어 어떤 다짐을 해 보기도 한다.

끝까지 함께
그뿐만이 아니라 ‘클래식걸’과의 만남은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는 것 같은 야릇한 기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약속장소에서 멋진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노라면 가슴이 설레고 입가에는 함박웃음이 피어오른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을 하면서 ‘클래식걸’과의 훈련을 상상하면 설레고 입가에 엷은 웃음꽃이 핀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이. 이 모든 것들은 내가 억지로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연스럽게 나타났고 기다려지고 항상 즐거움을 느낀다. ‘클래식걸’의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함께 할 거다.

교정교열= 황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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