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러시아의 화가이자 작가인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Konstantinovich Roerich, 1874-1947)의 'Remember'
러시아의 화가이자 작가인 니콜라스 로에리치(Nicholas Konstantinovich Roerich, 1874-1947)의 1924년작 'Remember' (사진= www.wikiart.org).

나에게는 점심 먹을 시간이지만 총누리에게는 아침 먹을 시간이었다. 걸음을 재게 놀려 앞서간 총누리가 어느 농가 앞에 서서 싱긋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집에서 밥을 먹자는 신호였다. 마을의 다른 농가들처럼 그 집도 3층집이었다. 짐을 멘 채 오르기에는 비좁고 컴컴한 계단을 밟고 3층으로 올랐다. 1층은 축사 겸 창고, 2층은 기도실 겸 침실이었으며 3층은 부엌 겸 거실이었다.

 

앉은뱅이 식탁이 길게 마련된 거실에는 앞서갔던 나왕 초상 셰르파 일행이 앉아 해장술로 창(막걸리)을 마시고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총누리와 나왕은 여기서 다시 만나기로 했거나,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몇 순배 돌렸을 텐데 나왕 일행은 나를 보자 새 술을 청했다.

 

밥을 준비하던 셰르파 부인 두 명 중 중 한 명이 방구석의 플라스틱 막걸리 통에서 누룩으로 발효시킨 옥수수 술밥을 주걱으로 퍼내어 통발에 담더니, 통발 밑에 동이를 받쳐놓고 술밥을 두 손으로 꽉꽉 주물러 막걸리를 짜냈다. 농익어 시큼한 막걸리 냄새가 후각을 흐뭇하게 자극했다.

 

부싱가 민가에서의 점심은 단순하면서도 푸짐하고 정성스러웠다. 걸쭉한 옥수수 막걸리와 짭짤한 소찌아, 접시에 수북이 담긴 뜨끈한 쌀밥, 구수한 녹두죽, 감자와 푸성귀를 같이 촉촉하게 볶아서 마살라로 양념한 반찬에는 특별한 정성이 들어있었다.

 

셰르파들은 찬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밥을 많이 먹었다. 큼직한 접시가 바닥이 보이기 무섭게 다시 수북이 얹어주는 밥을 세 번, 네 번씩 먹었다. 나도 두 번 먹었다. 반찬은 적었지만 그들만의 특별한 부엌 도구들을 사용하여 정성껏 만든 것이었다.

 

고추와 마늘 등 양념은 넓적한 검은 돌 가운데의 움푹한 곳에 놓고서 둥그런 돌로 짓이겨 빻고 갈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들 썼던 돌확이었다. 소찌아에 버터를 녹이는 도구는 끝에 바람개비 모양의 스크루가 달렸다. 스크루 쪽을 뜨거운 차가 들어있는 찻주전자 속에 넣고, 손잡이 부분을 두 손바닥으로 비벼서 버터와 곡물 가루를 섞었다. 네팔 산골 부엌에서 쓰는 소박한 형태의 믹서였다.

 

등을 적신 땀이 마르면서 한기를 느낀 나는 장작불이 타는 화덕 옆에서 음식을 먹었다. 장작 타는 연기 때문에 눈이 매웠다. 고물 라디오가 놓인 창으로 바람이 들어오다가 다시 연기와 함께 흘러나갔다. 그 창밖으로 보이는 산비탈 경작지 사이에 우리가 걸어온 길이 실낱같이 이어져있었다. 머리 위의 천정에는 옥수수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건조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기슭의 쿰부 지역 투어리스트 롯지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산촌 특유의 토박이 삶을 엿보게 된 것이 뿌듯했다.

 

나왕 초상 셰르파 일행과는 이날 이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들은 앞서 갔고, 우리는 부싱가 마을 동사무소 앞에 주민등록을 위해 운집한 남녀노소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느라고 지체했기 때문이다. 동사무소 앞마당 축대 밑에 노천 스튜디오가 있었다. 흰 보자기를 스크린 삼아 펼쳐든 총각이 있고, 사진 찍을 사람이 그 보자기 앞에 놓인 엉성한 의자에 앉으면, 사진사가 손에 든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사진사는 수많은 고객들에게 둘러싸여있었는데, 고객의 요청이 있자 사진 찍기를 멈추고 인화해 온 증명사진을 가위로 잘라 나누어주기도 했다. 투표권을 위한 주민등록 신청의 열기가 이토록 뜨거운 이유는 마오이스트 공산당 출현 이후 가난한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정치적 관심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계속>

 
통발 밑에 동이를 받쳐놓고 술밥을 두 손으로 꽉꽉 주물러 막걸리를 짜낸다.
고물 라디오가 놓인 창밖 저만치 우리가 걸어온 길이 실낱같이 이어져있다.
손바닥을 도마 삼아 칼로 감자를 자르는 셰르파 부인.  
나왕 초상 셰르파 일행이 앉아 창(막걸리)을 마시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많이들 썼던 돌확. 여기다 고추, 마늘, 소금 등을 간다.
사진 왼쪽 구석에서 증명사진을 찍고 있다. 애를 망태에 담아 업고 나와 사진 찍을 순서를 기다리는 부인. 
증명사진을 가위로 잘라 나누어 주는 사진사.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 부싱가 마을 동사무소 앞에 운집한 남녀노소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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