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쁘레- 마이다리- 툭신두 - 똘루곰파

똘루곰파 입구의 석탑. 우리가 걸어온 눈길이 석탑 뒤에 보인다.   

 

낮에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막걸리를 얻어먹었는데, 저녁이 되자 동네 사람들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숙소로 찾아 왔다. 이미 반 말 정도를 마시고 얼큰하여 돌아온지라 더 이상 마시면 크게 취할 줄 뻔히 알면서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구 잔은 받고, 누구 잔은 안 받겠는가. 조금만 달라고 부탁해 보았지만 그게 통하지 않았다. 주전자를 들고 서서 내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잔은 차야 맛, 임은 품어야 맛이라는 술꾼들의 풍류는 셰르파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대취하였는데, 웬 부인이 소주의 일종인 락시를 가져와 한 잔 가득 부어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술을 마신 기억이 없다. 거기서 필름이 끊어진 것이었다.

 

대취하여 뻗었음에도 아침에 일어나보니 길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떠나야만 했다. 마을은 한참 파종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내가 지체하면 할수록 방해가 될 것 같았다. 해장으로 뜨뜻하게 데운 막걸리를 한 사발 마시고 나서 배낭을 꾸리는 중인데 동네 사람들이 카닥과 막걸리 병을 들고 찾아왔다. 어제 밤에 왔던 사람들, 그리고 새로운 얼굴들도 있었다. 나는 또 마셔야했다.

 

해장술에 취하면 아비도 못 알아본다고 했는데, 내 경우는 달랐다. 해장술을 마시고 취하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피붙이 같았다. 모두 형제 같고, 자매 같았다. 취했지만 비틀거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을 어귀를 벗어나야 했다. 마을 어귀까지 나를 배웅한 그들이 내 뒤에 저만치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눈물이 나려고 했다. 내 고향에서는 이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천둥 벼락 같은 세월이 대한민국 사람들을 얼마나 냉혹하게 만들었는가? 대한민국의 그 누구 못지않게 차가운 대한민국 사내 하나가 셰르파 마을 동구 밖 길 위에 더운 눈물 몇 방울을 기어이 떨어뜨리고 말았다.

 

길은 처음에 완만했지만 점차 비탈이 심해졌다. 빠쁘레에서 이틀 밤을 묵으며 연일 마신 탓에 몸이 무거웠다. 사진 찍기도 귀찮았다. 카메라를 총누리에게 맡기고 마음껏 찍어 보라고 했다. 총누리는 신이 나서 셔터를 눌러댔는데 쉴 참에 뭘 찍었나 들여다보니 쓸 만한 게 없었다. 결국 그럴듯한 풍경이나 인물을 만나면 내가 카메라를 받아서 찍고 다시 카메라를 총누리에게 맡기곤 했다.

 

마이다리라는 곳에서 차를 마셨고, 툭신두라는 곳의 허름한 농가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때웠다. 오후에는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하늘이 컴컴해지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이 날(2월 28일) 일정은 똘루 곰파에서 저녁을 먹고 하룻밤 자고 이튿날 상황을 봐서 피케 영봉 정상에 오르는 것이었는데, 눈이 많이 온다든지 곰파에 사람이 없다면 자프레바스라는 마을로 내려가야 했다. 그러자면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눈에 푹푹 빠지면서 비지땀을 흘린 끝에 똘루 곰파 가까이 접근하다 보니 곰파에서 이쪽으로 나왔다가 돌아간 누군가의 발자국이 눈 속에 깊게 패여 있었다. 필시 곰파에 사람이 있다는 증거여서 힘이 났다.

 

곰파는 본래 크고 웅장했을  테지만 오랜 동안 방치해 두어 곧 무너질 듯 퇴락해 있었다. 노스님 혼자 곰파 밑에 있는 오두막에 들어앉아 불을 피워 추위를 덜고 있었다. 스님은 우리에게 차를 대접했고, 우리는 피케 영봉으로 가는 길에 눈이 어느 정도 쌓여 있는지를 물었다. 스님에 의하면 우리가 오던 길의 눈보다 두세 배는 더 쌓여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쪽 길로 피케 영봉에 오르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 우리는 곰파에서 하루 묵기를 청했지만 스님은 곤란하다고 했다. 여분의 식량이 없다는 것이었다.

 

노스님에게 얼마간 보시하고 일어서려니 잠시만 더 앉았다가 가라고 하면서 방구석에서 조그만 병 하나를 찾아들고 마개를 열었다. 꼬도 락시 특유의 향기가 방안에 퍼졌다. 스님은 그것을 내 찻잔에 가득 부었다. 총누리는 사양했고, 스님은 당신 잔에도 가득 부었다. 아주 독하고 향기롭고 잘 넘어가는 좋은 술이었다. 눈길을 걸으며 추위를 잊는 데는 그만한 술이 없겠다 싶었다.

 

스님과 작별하고 다시 눈길을 걸었다. 어둡기 전까지 자프레 바스에 도착하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얼굴과 목과 등줄기에 땀이 계속 흘렀다. 눈길이라서 힘들기도 했지만, 연일 술 마시느라고 몸이 곯아서 땀이 더 많이 나는 것 같았다.<계속>

 

총누리와 앙 까미 셰르파. 잔을 채워 준 뒤에도 술주전자를 들고 저렇게 서 있는 것이 셰르파들의 예절이요 풍습인가 보다.  

 

페마가 들고 있는 등잔은 야외용 LPG 개스통을 이용해서 만든 것이다.  

 

떠나와서 돌아본 빠쁘레 마을.  

 

긴 톱을 메고 나무를 베러 가는 형제를 만났다. 총누리가 찍었다. 

 

맨발의 사내와 맨머리 사내는 동갑이었다. 

 

비탈을 따라 이어진 보리밭과 흙길. 저 흙에 눈물 몇 방울을 보탠 나그네가 있었다.   

 

장에 가는 셰르파니 두 분과 기념 사진. 역시 총누리가 찍었다. 

 

똘루곰파. 

 

쇠락한 똘루 곰파에서 혼자 사는 노스님. 

 

눈이 많이 왔던 1월에 눈의 무게를 못 이겨 무너진 지붕. 

 

흑운 백운이 한가한 듯 노니는 산봉우리에 탑이 보인다. 

 

피케 정상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눈이 쌓여있었다. 똘루 곰파 노스님에 의하면 눈은 올라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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