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우절 주간 칼럼 빙자한 가상 미래 일기, ‘나는 한국마사회장이다’

※본 칼럼은 국내에 서구 경마가 도입, 시행된 지 100주년인 2022년 제38대 한국마사회장에 취임한 기자의 칼럼을 가장한, 지극히 주관적 상상을 펼친 ‘호접지몽’ 미래 일기입니다.

1922년 5월 20일, 국내에서 경마를 시행한 역사적인 날이다. 정확히 100년이 지난 오늘 2022년 5월 20일, 나는 한국마사회장이 됐다. 역대 최연소, 최초 언론인 출신이자 역시 최초로 정권 낙하산도 마사회 내부 승진도 아닌, 말밥 먹는 ‘외부’ 사람이 임명됐다. 농림부 산하 기관 중 언론인 출신 기관장은 2018년 11월 취임한 신명식 농정원장 이래 처음이다.

지금도 모두가 믿기 힘든 일이라고 한다. 나 역시 3개월 전까지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육아 휴직임에도 집에서 백일둥이 딸 둘러업고 기사 편집하고 있는데 한국마사회 인사추천위원회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BH 지시다. 낙하산 없고 마사회 내부 인사 말고, 말산업 전문 언론인을 회장으로 추천하라”고 했단다. 만우절도 한참 지났는데, 장난 전화인 줄 알았다. ‘이것들이 정보와 돈 놓고 장난치더니 이젠 막가자는 거구나’라고. ‘그토록 비판하던 낙하산 대신 이젠 바지사장 앉히겠다는 건가?’란 자괴감도 순간 들었다.

내부 승진 인사가 당연히 차기 회장으로 임명될 줄 알았는데, 임기 막바지 산하 기관 낙하산 인사를 완전히 배제한 문재인 전 대통령 의지가 주효했다. 역시 언론인 출신으로 국무총리까지 지냈다가 이번에 입성한 ‘BH’는 연줄도 연고도 없다는 원칙으로, 그 조직을 가장 잘 아는 언론인 출신을 임명한 것이라 밝혔다.

2020년 신규 설치한 농림부 산하 경마감독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기자 신분으로 출입하던 농림부에서 임명장을 받은 어제부터 오늘 취임식까지 내내 얼굴은 화끈대고 손발은 오글거렸다. 오래전부터 함께 식사 자리를 했던 임원들, 수화기 너머로 비아냥대는 목소리를 뽐냈던 직원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자니 ‘내 니들 과거 행적, 마음속까지 다 아는데 가만있을 성싶냐’는 속마음 들킬까 해서다.

전임 김낙순 회장은 연임까지 하다가 21대 총선 보궐선거에 나간다고 지난해 말 사임했다. 지난달 고향 천안에서 더불어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된 그에게 감사와 축사 전화를 드렸다. 사실 처음엔 그가 못 미더웠다. 2018년 1월 19일 취임하기 며칠 전, 갑자기 꿈에서 나타날 때부터였다. 정권 교체 후 첫 회장인데 의외로 감추는 게 많았고, 속도는 더뎠다. 말산업 종사자보다 ‘국민’이 우선이었다. 말산업 종사자는 국민 아닌가? 전문 언론이 왜 중요한지도 몰랐다. 아니, 애써 외면했다고 할까. 왜 그런지는 잘 알지만···.

같은 검정고시 출신에, 뒤늦게 철학과 예술을 공부해 학위를 받은 것도 같았고, 같은 충청도 출신이라 ‘음흉하다’고 오해받는 성격도 알고, 내부 직원 달래는 게 1순위라는 것 인정하지만, 당시 마사회 출입 기자로서 답답함을 느꼈다. 낙하산이 아니라 내부 조직 갈등에 근본 문제가 있고, 그 가운데 낀 언론과 말산업 관련 협회·기관 들이 혜택은커녕 피해가 막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이런 사정을 전해 들은 그가 단박에 해결할 거라 믿었다. 정보도 제공했고, 기사로도 도와줬는데 ‘피드백’이 없었다. 한마디로 ‘먹튀’였다. 결국 현장에서는 불만이 계속 쏟아졌다. 정권 바뀌어도 마사회는 그대로며, 김낙순 회장이 온 뒤로 좋아진 건 마사회 직원들 삶이지 우리 형편이 아니라고. 우리는 여전히 돈줄 쥔 마사회 눈치 보는, 영원한 을(乙)이라고.

‘뭐, 이렇게 많은 분이 오실 것까지야. 이럴 시간이 일이나 하지들.’ 오늘 취임식에서 나는 전임 김낙순 회장이 놓은 주춧돌, 6대 혁신 과제를 구체화한다고 밝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취임식도 사실 불필요한 허례허식 같다.
‘뭐, 이렇게 많은 분이 오실 것까지야. 이럴 시간에 일이나 하지들.’ 오늘 취임식에서 나는 전임 김낙순 회장이 놓은 주춧돌, 6대 혁신 과제를 구체화한다고 밝혔다. 그러고 보니 이런 취임식도 사실 불필요한 허례허식 같다.

2년 전인 2020년 5월경, 연임을 앞두고 그 사건(당시까지 해결 안 된 마사회 조직 적폐 문제를 우리가 특종 보도하면서 최순실 국정농단에 버금가는 사회적 이슈가 됐고, 이를 계기로 마사회는 올해 말부터 말산업진흥공단으로 조직을 개편한다)을 보도한 뒤, 그제야 오해를 풀게 됐다. 적폐청산위원회에서 백서까지 발간했음에도 조직 내 저항은 만만찮았기에 “시간이 필요하다”는 요청은, 잘못된 보고만 듣고 언론과 관계 회복을 미룬 게 아니라 결국 임기 내 백년대계 기초를 놓고, 철학을 심고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것이라 했다. 그것이 그의 임기 중 근본 목적이었고, 그것이 말산업을 살리는 길이라 믿었다고 했다. 그 사건 후 김낙순 회장은 다른 정부 산하 기관처럼 <말산업저널>을 최우선 출입 언론 기관으로 각별히 챙겼다. 회장 의지가 분명하자 이런저런 핑계하던 임직원도 따라올 수밖에.

오늘 취임식에서 나는 전임 김낙순 회장이 놓은 주춧돌, 6대 혁신 분야 및 과제에 근거해 탄탄한 외벽 쌓는 일을 임기 내 할 것이라 밝혔다. 먼저 파격 인사를 실시했다. 지연과 학연으로 고착된 조직 문화를 완벽하게 깨기 위해 젊은 세대, 일하는 실무자 중심으로 조직 서열을 완전히 뒤엎었다. 사실 마사회는 2017년경부터 젊은 직원들 중심으로 ‘자정’ 노력이 있었고,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한 사람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마사회가 일하지 않는 모습으로 비치게 했던 근본 문제인 ‘신의 직장’ 이미지를 깨고자 연봉을 대폭 깎았다. 우선 나부터 2억 원가량 책정된 연봉을 공기업 가운데 최하이자 5년 전 실장급 연봉인 7천만 원으로 내렸고, 대졸 신입의 경우 역시 7년 전 수준인 3천만 원으로 책정했다. 임원급은 평균 5천만 원, 본부장급 및 감사, 이사는 6천만 원으로 깎았다. 이것이야말로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는 실질적이고 파격적인 ‘행위’이자 우리 스스로 엘리트인 척하는 근본 관행을 깨는 일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리 지키기’와 '돌려막기'의 대표 사례인 지사장을 본사 임원이 아닌 지점 청경과 환경관리원 등 현장 관계자의 승진 인사로 대체했다. ‘지사’ 대신 국민체육진흥공단처럼 ‘지점’으로 대체해 소형 경마장으로 운영하면서 현행 30개에서 대폭 줄여 광역시에만 두기로 했다. 이 또한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렛츠런파크 영천 개장과 더불어 내년 개장할 렛츠런파크 강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온라인마권발매시스템이 2021년부터 전격 도입됐기에 팬들이 복권, 로또처럼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과 판매소를 통해 마권을 살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협력 업체와의 비위 문제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인사 때마다 반복됐던 보직 이동을 최대한 줄이되 적성과 전문성에 맞는 인재를 선발해 책임제를 실시하기로 했다. ‘입단속’ 성격에 그쳤던 내부 감사를 한층 강화했으며 우리 회와 연결된 영세기업, 중소기업과 실질적 상생을 위해 수의 계약을 없애고 입찰 방식을 모두 공개로 바꿨다. 또한 어용이자 들러리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도록 전권을 부여, 실질적인 노조 활동을 보장했다. 경마팬을 전담하는 부서도 신설해 365일 언제든 현장에서 바로 의견을 낼 수 있는 일종의 경마팬 청원 공간도 해피빌 3층에 마련했다. 위선뿐인 형식과 격식을 빼는 일에도 박차를 가했다. ‘저들만의 축제’라고 경마팬들이 늘 소리 지르던, 팬들 돈으로 아이돌을 불러 뜬금없는 '축하' 무대를 만들고, 경마대회 후 VIP들이 참여해 사진 찍고 트로피 주고 건배를 하는 일제 유물인 허울뿐인 시상식을 일절 없애고 팬들이 마음껏 즐기고 축하할 수 있게 자리를 내줬다.

“조직과 그 문화에 대한 판단은 우리가 아닌 언론과 국민이 합니다. 가뜩이나 우리는 ‘경마’라는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안위하고, 조직을 지키려고 감추려 들수록 우리를 향한 외부 비판, 의구심은 계속됩니다. 진정한 혁신, 개방은 우리 내부에서 먼저 시작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경마, 승마에 대한 국민 인식은 달라지고, 여러분은 '아빠, 엄마가 다니는 회사는 한국마사회'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창 취재할 때 보신을 위해 ‘굽신’하던 과장과 부장들, 지금은 실처장이 된 몇몇은 대놓고 비웃었다. 나이도 어린게 얼마나 가는지 보자는 식이다. 전임 회장들처럼 저들도 껴안고 가야 해야 하나, 한창 고민했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길은 과거와 단절이었기에 선택에 어려움은 없었다.

▲한국마사회장은 단순한 정책 결정자, 조정자가 아니다. 국민인 말산업 종사자, 관계자를 섬기는 대표 공인이다. 정권 낙하산 일색이었던 역대 회장단을 쭉 지켜보면서 누가 그 역할에 충실했는지 돌이켜보면, 사회 공헌이랍시고 연탄 나르고 김장하고 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삼척동자도 다 안다. ⓒ말산업저널
▲한국마사회장은 단순한 정책 결정자, 조정자가 아니다. 국민인 말산업 종사자, 관계자를 섬기는 대표 공인이다. 정권 낙하산 일색이었던 역대 회장단을 쭉 지켜보면서 누가 그 역할에 충실했는지 돌이켜보면, 사회 공헌이랍시고 연탄 나르고 김장하고 했던 것보다 더 중요한 목적,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는 사실 삼척동자도 다 안다. ⓒ말산업저널

말산업계를 위해서는 먼저 주요 협회와 단체들과 동등한 동반자 관계를 선포했다. 협회장들과 대회 때나 만나던 형식적 허례허식을 벗고, 페가수스 라운지를 사무실 겸 회의실로 만들어 수시로 만날 수 있게 했다. 김낙순 회장 때 신설한 말산업육성기금을 대폭 확대해 각 협회, 단체들이 자생할 수 있도록 사무국 강화에 힘을 보탰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풀어나가기로 했다. 농협이나 관 주도가 아닌, 경주마와 승용마 생산 농가가 주축이 된 말산업자조금위원회도 다음 달 출범을 목표로 T/F을 구성했다.

무엇보다 왜 기자들이 마사회를 안 찾는지, 왜 마사회에 ‘적대적’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먼저 해피빌 6층에 있는 ‘기자실’을 없애고 본관 2층에 있는 내 집무실 옆 비서실 공간을 기자실로 만들었다. 출입 기자단도 중앙·일간지, 산업지, 스포츠지, 전문지 그리고 예상지 등으로 등급을 매겨 차별하는 관행을 깨고, 홍보실과 친분 유무를 떠나 공정하게 모든 언론을 맞이하게 했다. 이는 정부 관행과도 맞닿았던 문제로, 새 정부가 과거 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했던 부처별 출입 기자단 관행을 없애면서 우리 회도 할 수 있게 됐다. 형식적인 보도자료, 성과 없는 학생·SNS 기자단을 없애는 대신 출입 언론사의 평가와 기획 기사를 바탕으로 마사회 알리는 일에 힘쓰겠고, 광고를 차등 집행하면서 언론을 관리하던 행태를 근절하겠다고 하니 모두 반색했다.

숙원 과제도 산적해있다. 경마 파트1 국가 진입이 확정됐지만 단기간에 국내 경주마 능력을 끌어올릴 수는 없다. 경주 질 향상을 위해 인프라는 보강했지만, 생물인 말, 말산업 주인공인 말의 능력을 어떻게 향상할지 고심하고 있다. 내년부터 렛츠런파크 제주에서는 한라마가 없어지고 제주마 단독 경주가 시행되는 만큼 한라마 육성 문제에 대해 과거 약속했던 부분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자체와 연계한 말 축제, 승마대회 활성화, 말 문화 보급도 기대했던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 대한승마협회장도 겸하게 된 만큼 승마대회가 왜 아직도 저들만의 리그에 멈춰있는지, 특정 개인과 업체 돈벌이로 전락한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전문 승용마 생산과 관련해서는 생산육성부가 초창기부터 잘해왔던 만큼 현장과 협회 의견을 참고해 추가적으로 지원할 방법을 모색 중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말산업 전담 기관이라는 마사회가 그간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데 있어 역할이 미흡했고, 현장을 따라가지 못한 데 있었다. 공공성 강화와 함께 우리 회의 고유 목적 사업 강화라는 근본 목표를 이룩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제대로 아는 것이 먼저다.

나는 내일부터 100일간 현장으로 떠난다. 기자 때 필드에서 뛰며 취재하면서 현장의 어려움, 억울함을 듣고 알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빚졌던 마음을 이제 모두 풀 수 있을 것 같다. 한국마사회, 아니 말산업진흥공단이 6차산업의 선두 주자이자 블루오션, 농업농촌의 대안인 말산업이 완전히 뿌리내리는 '밀알'이 되도록 열심히 달릴 것이다.

말산업저널 이용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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