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싶어서 피케라는 산 이름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스님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다 제각기 만든 이야기이다. 피케는 그냥 피케일 뿐이다. 우리가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학교의 교복인 티베트 승려 복장의 남학생이 법당 입구에 매단 징을 쳐서 곧 법회가 시작됨을 알렸다.  

 

33일 일요일은 음력 114일이었다. 푹무체 곰파에서는 정월 대보름 법회를 이 날 열었다. 우리나라 절에서 정월 초하루와 정월 대보름, 그리고 석가탄신일과 백중날 큰 법회를 가지듯이 푹무체 곰파에서도 큰 법회가 열리며 보통 날도 조석 예불은 빠트리지 않는다고 했다.

 

학교 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아침 공양을 했다. 흰밥에 녹두죽, 그리고 감자 반찬이다. 주지 스님 나왕 진바 라마(60), 기숙사 사감 선생인 미스 이스워리(Misss Iswori: 23)를 비롯한 교사들도 학생들과 같이 공양을 했다.

 

주지 스님에 의하면 푹무체라는 셰르파 말의 뜻은 성스러운 어머니의 바위굴이라는 뜻이다. 곰파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는 이 지역에 산재한 바위굴들이 승려들의 수도처였다고 한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피케라는 산 이름에도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스님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다 제각기 만든 이야기이다. 피케는 그냥 피케일 뿐이다. 우리가 물을 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스님 대답을 듣자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라는 성철 스님 유명한 법어가 생각났다. 그리고 나왕 진바 라마 스님 또한 성철 스님처럼 고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동안 돌아본 몇 군데 큰 절 주지 스님들은 절을 비우고 카트만두로 나가 산지 이미 오래인데 이 스님은 산중에 학교를 설립하여 가난한 집 자식들을 데려다가 먹이고 가르치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오전 1030분이 되자, 이 학교의 교복인 티베트 승려 복장의 남학생이 법당 입구에 매단 징을 쳐서 곧 법회가 시작됨을 알렸다. 휴일이라서 빨래도 하고 머리도 감고 햇볕을 쬐며 장난도 치던 남녀 학생들이 슬슬 법당으로 모여들었다.

 

징 치고 나발을 부는 등 격식을 제대로 갖춘 법회가 엄숙하게 거행되고 있었다. 

 

 

교복이 티베트 불교의 승려 복장이고 머리도 삭발을 하고 있어서 많은 학생들이 스님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계를 받은 것은 아니다. 또한 휴일에는 교복 입기를 강요하지 않는 것 같았다. 여학생들과 어린 학생들 중에는 평복 차림인 채로 법당에 온 학생들도 많았다.

 

주지 스님이 가사를 수하고 들어와 삼존불을 모신 불단 오른쪽 밑에 있는 좌대에 좌정하고, 그 아래 자리에 학교 설립 때부터 15년 동안 불교학 교사로 근속했다는 겔부 셰르파가 앉자, 승려 복장의 학생들이 법고를 두드리고 긴 나발을 불며 정월 대보름 법회를 시작했다. 법당이 비록 작아도 전통에 따른 법식을 제대로 갖추었으며 신심이 두터운 착한 불자들이 가득해서 큰 절 못지않은 장엄한 법회였다.

 

푹무체 곰파가 이렇듯 번성하게 된 것은 15 년 전에 맺은 독일인 부부와의 인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50 대였던 독일인 부부는 그 해 여름에 푹무체 곰파에서 이틀거리에 있는 룸불 히말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폭우를 만나 곰파를 찾아왔다.

 

 

승려들의 거처인 암굴.  

 

푹무체 곰파에는 당시 45세였던 지금의 주지 스님 나왕 진바 라마 혼자 있었다. 그는 비에 흠뻑 젖어 찾아온 독일인 부부를 자기 거처로 맞이했다.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했다. 이튿날에도, 그 이튿날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비는 그렇게 여러 날 그치지 않고 퍼부었다. 독일인 부부는 본의 아니게 푹무체 곰파에 여러 날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남편은 대학 교수였고, 부인은 고등학교 교사였다. 그리고 불교 신자였다. 독일인 부부는 푹무체 곰파를 떠나면서 곰파를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나왕 진바 라마는 늘 소망했던 바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것은 곰파에 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학생들을 데려다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독일인 부부는 학교 운영비를 지원하는 방안을 연구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독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시 왔다.

 

독일인 부부는 본국에 돌아가 자신들을 포함한 40명의 정회원을 모아 협회를 만들었다. 지금의 'Phugmoche Nepal Association / Germany' 가 바로 그 단체였다. 이들은 2006년 당시까지 년 간 36천 달러 정도를 푹무체 학교에 송금해 왔다. 정회원 1명이 1년에 약 9 백 달러를 부담하는데, 정회원들은 다시 각자의 주변 친지들로부터 모금을 하여 협회로 보낸다고 했다.

 

이 학교는 이름 그대로 불교 학교지만 반드시 불교도 집안의 자식이거나 종족이 셰르파여야만 하는 건 아니다. 체트리, 라이, 따망, 림부 등 다양한 종족의 아이들이 입학할 수 있다. 학생 수는 모두 108 . 이중 70 명은 수업료 및 숙식비 전액을 면제받는다. 이들은 아버지가 없거나, 양친이 모두 없거나, 로컬 식당 등에서 급여 없이 일하는 어린이들이었다.

 

점심으로 달(녹두죽)과 밧(흰 쌀밥)이 나왔다. 

 

나머지 38 명은 집에서 통학하며 소정의 학비와 급식비를 내는 어린이들이다. 38 명은 푹무체 바로 밑에 있는 마을인 팡 가르마, 그리고 팡 가르마에 인접한 머풍 마을과 숨징마 마을의 어린이들이다.

 

2003년에 우연히 들렸던 일본인 부부도 이 학교의 설립 취지나 운영 방식에 감동하여 교사를 짓는데 쓰라고 120만 루피(17천 달러)를 희사하였다. 일본인 부부의 희사금과 주민들의 노역으로 2006년에 완공한 새 교사에는 교실 7개와 교무실 1개 등 모두 8 개의 방이 있고, 수세식 화장실이 부속 건물로 붙어 있다. 학생들은 현재 이 새 교실에서 수업을 받고 있으며, 곰파 위에 있던 오래된 교사는 기숙사, 도서실, 식당, 세미나실 등으로 쓰고 있다.

 

학생 수는 더 이상 늘리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했다. 학교 부지가 한정되어 있어 교실을 더 이상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소한 현재의 학생 수를 유지하는 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독일 재단의 꾸준한 지원이 필요한데, 애너리자 부부가 2006년 당시 칠순이 멀지않은 노인이 되어 장래가 불투명하다고 했다.

 

학교에 종사하는 직원으로는 우선 13 명의 교사들이 있고, 3명의 주방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1명의 목수가 있다. 그리고 35 킬로 와트짜리 수력 발전기가 도입된 이래 2 명의 전기 기사가 상근하고 있다. 이 전기는 팡가르마를 비롯한 인근 마을에도 무료로 공급되고 있는데, 장차 소정의 전기 요금을 징수할 계획이라고 했다. 전기 요금을 징수하게 되면 학교 재정이 조금 호전될 수 있지만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우리가 곰파를 떠날 때까지 법당에서는 법회가 계속되고 있었다. 법회 도중에 스님들과 학생들에게 찻잔을 돌리고 커다란 주전자에 담은 소찌아를 나누기에 법회를 마치는 줄 알고 법당을 나왔는데 다시 징을 치고 경을 읽는 것이었다. <계속> 

 

바위 위에 지은 법당.

 

 

 

나왕 진바 라마.

 

기숙사 사감 선생인 미스 이스워리(Misss Iswori: 23)

 

여학생들. 

 

지리에서 온 화물을 학생들이 창고로 운반하고 있다.   

 

지리에서 학교 계단 밑까지 등짐으로 온 화물들은 대부분 식량이다. 

 

빨래터 모습. 더운 물을 만들기 위한 솥이 걸려있고 땔감을 만들기 위해 톱으로 통나무를 자르는 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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