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많은 나그네들이 삼삼오오 패를 지어 식당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 카트만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직통 버스를 탔고 오후 1시 쯤 지리에서 내렸다고 했다. 지리에서 데우라리까지 대여섯 시간을 줄창 걸어온 그들은 라마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저녁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지도 왼쪽 끝 차리콧Charikot에서 동쪽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도로가 끝나는 지점이 지리jiri.  지리부터는 오직 두 발로 걸어야만 하는 길이 동쪽으로 이어진다.   
랄리구라스 꽃이 활짝 핀 오솔길.  

 

밥이라도 같이 먹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떨쳐내면서 반시간 쯤 더 걸어 창마라는 곳에 이르자 보우다 탑이 있고 탑 주변에는 커다란 롯지들이 보였다. 총누리는 나를 붓다 롯지로 안내하고서 달밧과 함께 오믈렛을 주문했다.

 

부다 롯지의 달걀이 상했던 것 같다. 밥 먹고 일어서서 10 분 쯤 걸었을 때 얼굴과 목에 두드러기가 돋으면서 으슬으슬한 느낌이 들었다. 산중의 허름한 롯지에서 계란을 먹고 두드러기가 생겨 여러 날 고생한 예전 일이 떠올랐다. 걸음을 멈추고 배낭에서 약주머니를 꺼내었다.

 

약 주머니 속에는 벌레 물린데 바르는 물약, 진통제, 소화제, 지사제, 항생제, 머큐롬, 소독용 알코올, 그리고 입술 주변에 물집이 생겼을 때 바르는 연고, 안연고 등과 함께 의사의 처방에 의해 약국에서 조제한 약이 가득 든 두툼한 약봉투도 있었다. 약 봉투의 겉면에는 '식중독으로 두드러기가 날 때 하루 세 번'이라는 큼직한 사인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총누리가 무슨 약을 먹는지를 묻기에 나는 내 얼굴과 목에 생긴 두드러기를 보여 주었다. 그리고 총누리에게도 두드러기가 나는지를 이리저리 자세히 살폈으나 이상이 없었다. 내가 먹은 계란만 상한 것이었거나, 내가 너무 민감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창마 마을의 어느 집 화단에 금잔화가 피어있다. 

 

반달 마을 외곽의 목공예 작업실 외부 모습. 

 

반달 마을 외곽의 목공예 작업실 내부와 주인. 나는 이곳에서 작은 절구를 하나 샀다. 

 

우리가 점심을 먹은 창마 마을의 부다 롯지. 사진 오른쪽 구석에 우리가 벗어 놓은 배낭들이 보인다.   

 

부다 롯지의 이층 숙소. 

 

창마 마을 지나서 반달 마을 거의 다 갔을 때 길가에서 본 약국 진열장 모습. 약국 주인이 의사를 겸하는 지 청진기도 걸려 있다. 

 

창마 마을의 보우다 탑 주변 마네에 붙인 석판에 새겨진 불교 전통 문양들. 

 

창마 마을의 보우다 탑 주변 마네에 붙인 석판에 새겨진 불교 전통 문양들. 

 

창마 마을의 보우다 탑 주변 마네에 붙인 석판에 새겨진 불교 전통 문양들. 

 

총누리에 의하면 이 집에서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문앞을 치장했다. 창마 마을. 

 

창마 마을 보우다 탑 인근의 셰르파 호텔. 앞에 펼쳐 놓은 곡물은 꼬도(기장의 일종)인 듯. 

 

약을 먹고 다시 걷기 시작하여 10 분이 지났을 때 갑자기 설사가 나오려고 했다. 급히 배낭을 벗고 숲으로 들어갔다. 아슬아슬했다. 몇 초만 늦었어도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뒤로는 더 이상 두드러기가 생기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데우라리에 도착하자 오후 4시였다. 이제 우리는 여드레 동안에 걸쳐 피케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고서 무사히 제자리로 돌아온 것이었다.

 

총누리는 처음 올 때 잠시 들렸던 셰르파 호텔에 여장을 풀고자 했다. 총누리의 체면을 봐주느라고 일단 셰르파 호텔로 가서 이층의 손님방들을 점검해 보았으나 너무 너절해서 되돌아 나왔다. 나는 시무룩해진 총누리를 데리고 데우라리 능선의 롯지들 중에서 가장 큰 곳으로 갔다. 그곳은 라마 게스트 하우스였다.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해 놨으며, 큼직한 거울도 걸려 있었다. 이층의 손님방들도 모두 깨끗했다. 나무로 만든 싱글 침대 두 개가 놓인 방에 여장을 풀고서 부엌에 내려가 뜨거운 물을 한 양동이 얻어다가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저녁에 아래층 식당의 화덕 앞에 앉아 구운 감자를 안주로 락시를 마셨다. 총누리는 앙 도로지 씨에게 전화를 걸려고 시도했으나 연결이 안 되었다. 총누리는 전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통화를 시도했는데, 비행장 마을인 파부루부터는 가는 곳마다 불통이었다.

 

총누리가 마을 사람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마오이스트들에 의한 파업이 예고되어 있다고 했다. 총누리는 파업을 시작하는 날짜가 정확히 언제인지를 알아보려고 앙도로지 씨에게 전화를 건다고 했다. 그 때 아주 어린 소녀가 들어왔는데, 허리춤에 쿠쿠리를 차고 있었다.

 

부엌의 부인에게 '당신의 딸이냐?'고 물으니 크게 웃었다. 그 아이는 소녀가 아니라 소년이었다. 부인에 의하면 남자만 쿠쿠리를 차고 여자는 하세라고 부르는 조그만 낫을 지닌다. 부인의 친 자녀들은 카트만두에서 기숙사 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밤이 되자 많은 나그네들이 삼삼오오 패를 지어 식당에 모여 들었다. 그들은 모두 카트만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직통 버스를 탔고 오후 1시 쯤 지리에서 내렸다고 했다. 지리에서 데우라리까지 대여섯 시간을 줄창 걸어온 그들은 라마 게스트하우스에 마련된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저녁밥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맨 마지막에 도착한 나그네들 중에 한 젊은이가 나에게 '엉클, 너머스떼'하고 인사를 했다. 벙거지를 눈썹까지 눌러 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그는 앙 마야 셰르파의 조카였다. 이름은 잊었지만 식당에서 자주 봤던 그는 초급대학 학생이다. 그는 카트만두에 사는 고향 사람들과 함께 패를 지어 준베시로 주민등록을 만들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그에 의하면, 주민등록이 있어야 10 월에 있을 총선의 투표권을 얻는다.

 

9시가 되어서야 밥이 나왔다. 나그네들이 식당 가득히 둘러앉아서 넓적한 접시에 담긴 김나는 밥을 먹는 모습은 어쩐지 무슨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숙연해 보였다. 주방의 소녀와 부인은 들통을 들고 나와서 거기 담긴 뜨거운 녹두죽을 국자로 퍼서 밥 위에 얹어 주었다.

 

나그네들은 배가 고팠는지 연거푸 퍼주는 밥을 사양치 않았다. 그러나 한 총각은 배탈이 심하다며 뜨거운 물만 마시더니 나에게 설사약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내 여행이 거의 끝났으므로, 그리고 내 약주머니의 약을 더 오래 묵히지 않기 위해 두드러기 약만 빼고 설사약을 포함한 나머지 약을 주머니 째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약들이 무엇에 쓰며 어떻게 먹거나 바르는 약인지를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35일 밤이 그렇게 깊어갔다.<계속> 

 

반달 마을. 

 

얼핏 소녀처럼 보인 라마 게스트하우스의 소년. 

 

라마 게스트하우스에서 내려다본 데우라리 고개의 마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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