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라리의 해발 고도가 2710 미터라서 몸이 무겁고 숨이 찼다. 헉헉대며 30분 쯤 뒷산으로 올랐으나 기대했던 일출은 보지 못했다. 동쪽 하늘과 산 봉우리들을 가리고 낮게 떠있는 두꺼운 구름 사이로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광경을 보았다. 그 또한 숨이 멎을 듯한 장관이었다.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사진 왼쪽 바닥 어둠 속에 반달 마을이 희미하게 보인다.   

 

아침 햇살이 점점 더 많이 쏟아지고 있다. 

 

반달 마을은 데우라리와 달리 농경지가 많다. 큰 트럭은 빈번하게 들어온다.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새벽 세시 경에 잠에서 깼다. 더 이상 잠은 안 오고 오히려 말똥말똥해졌지만 일어나 봤자 춥고 캄캄해서 할 일이 없었다. 김 선생도 그 즈음에 잠이 깬 듯했지만 서로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냥 누워 있었다.

 

우리가 딱딱한 나무 침대에서 일어난 시각은 510. 소변이 마려워서 더 이상 누워 있을 수 없었다. 날은 아직 어둑했지만 마을 뒷산에 올라가 일출을 보기로 했다. 방한복을 껴입고 롯지를 나서서 입김을 헉헉 뿜으며 뒷산 산비탈을 30 분 쯤 올랐다. 데우라리의 해발 고도가 이미 2710 미터, 더 오를수록 몸이 무겁고 숨이 찼다.

 

기대했던 일출은 보지 못했다. 동쪽 하늘과 산 봉우리들을 가리고 낮게 떠있는 두꺼운 구름 사이로 햇살이 부챗살처럼 퍼지는 광경을 보았다. 공상 과학 영화에서 외계인을 가득 태운 UFO가 나타나는 장면 같았다. 설산 가오리상칼이라도 보려고 한참 기다렸으나 그쪽에 드리워진 두꺼운 구름도 걷힐 줄 몰랐다.

 

롯지로 내려오니 엊그제 지리에서 본 오스트리아 커플이 건너편 롯지 마당을 나서고 있었다. 여자가 어디를 갔다 오냐고 물었다. 일출을 보러 갔다 온다고 대답했다. 여자가 일출을 봤냐고 물었다. 봤다고 대답하고서, 사실은 햇살만 봤는데 그게 아주 멋졌다고 말하려고 머릿속으로 영작을 하는 중인데, 그 새를 못 참은 여자가 정말이냐고 물었다. 귀찮아서 정말이라고 대답해 버렸더니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길가의 벚나무들이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웠다. 일본에서 원조해 준 묘목이 자란 이 벚나무들은 히말라야의 가을을 일본의 봄으로 착각하는지 해마다 가을에 꽃을 피운다.

 

설산이 보이는 밭에 주민들이 있다. 옥수수 밭이었다.  

 

저렇듯 완만한 길은 반달 마을에서만 만났지 싶다.  

 

아침 식사는 어제 미리 주문해 놓았던 짜파티, 밀크 티, 셀파 스튜였다. 김 선생은 짜파티가 아주 담백하고, 씹을수록 고소한 맛이 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밀크 티는 가는 데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서 장소가 바뀔 때마다 무슨 맛일지 기대된다고 했다.

 

우리나라 수제비 비슷한 샥빠(셀파 스튜)도 집집마다 맛이 다르다. 어떤 집에서나 감자는 공통으로 들어가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채소가 형편 따라 다르고, 수제비도 형편에 따라서 국수나 마카로니로 대신한다. 향신료도 집집마다 독특하다. 마살라의 종류가 다양하기도 하거니와 마살라 대신 고추 가루, 팀불(우리나라 산초와 비슷하다), 들기름 등을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서 넣기 때문이다.

 

행장을 차리고, 숙식비를 치른 후, 롯지의 주인 사내에게 인사를 했다. 토둥 곰파에서 운영하기 시작한 초등학교의 육성회장인 그는 카트만두 보우다에 사는 앙 치링 셀파로부터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며 반가워했다.

 

지난 봄 순례 때 나는 토둥 곰파의 학교를 방문했고, 카트만두에서 사는 데우라리 출신 인사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육성회 회장인 앙 치링 셀파를 찾아가 토둥 곰파의 학교 운영 방침과 사정에 대해 자세히 물었던 것이다. 그 때 현지 육성회장인 롯지의 주인 사내와는 길이 어긋나서 만나지 못했다. 내가 그의 롯지에 있을 때 그는 카트만두에 있었고, 내가 카트만두에 갔을 때 그는 롯지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이들 토둥 곰파에서 시작한 초등학교의 육성회 회장단들은 토둥 곰파의 학교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도 전해져서 한국인들로 구성된 또 하나의 육성회가 생기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는 내 블로그를 통하여(가능하면 신문이나 잡지를 통해서도) 그 학교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히 알리기는 하겠으나 내가 그런 모임을 직접 만들 능력은 없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그렇게 알려 주는 일만도 복 받을 일이라고 했다.

 

데우라리에서 반달까지는 비탈길이다. 반달은 산중 분지의 형태로 제법 넓게 퍼져 있으며 지리부터 도로가 들어와 있다. 지금은 버스도 들어온다. 여기서 빨래비누와 구두 솔을 샀다. 빨래를 물에 담가 적신 후 비누를 칠한 뒤 솔로 문지르면 어렵지 않게 빨래가 되기 때문이다.

 

길가의 벚나무들이 벚꽃을 흐드러지게 피우고 서 있었다. 일본에서 원조해 준 묘목이 자란 이 벚나무들은 히말라야의 가을을 일본의 봄으로 착각하는지 해마다 가을에 꽃을 피운다. 히말라야 산중에서 이런 평지에 난 길을, 그것도 꽃잎이 날리는 길을 제법 오래 걸어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경사가 심한 비탈을 날마다 오르내리는 고행 중에 맛보는 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노래라도 한 자락 불러 보고 싶어지는 길이다.

절쿠로 내려서는 비탈에서 천진하고 귀엽게 생긴 소년을 봤다. 어린 나이에 이미 사무치는 고생을 겪고 있는 소녀도 봤다. 이들은 염소를 방목하러 나온 목동들이었다. 유니세프 같은 국제적 NGO에서는 이들 산중의 어린이들에게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주면 그들의 이를 썩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경고했지만 우리는 무시해 버렸다. 산중에 가축들을 풀어 놓고 바람과 햇빛 속을 무료히 서성이는 그들을 그냥 지나치는 게 너무 무정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계속> 

 

소 치러 나온 소년. 

 

밭에서 일하던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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