툽텐 체링 곰파를 벗어나 다시 30분을 걸어서 도착한 팡 가르마 마을의 앙 마야 셰르파의 친정집에는 마침 온 식구가 다 모여 있었다. 봄에는 못 봤던 앙 마야의 올케와 앙 마야의 아버지도 있었고, 남부 평원 지대로 이주한 조카, 그리고 앙 마야 셰르파의 딸 밍마도 방학을 맞아 와 있었다.

팡 가르마의 앙 마야 친정집. 카트만두에서 학교에 다니는 밍마 등 마침 온 식구들이 모여 있었다. ⓒ김희수
준베시의 진료소. 오른쪽부터 인도에서 파견된 의사, 앙 다와 씨, 필자. ⓒ김희수   

과연 아침 차 마시는 시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젊고 잘 생긴 그는 아침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만 진료를 한다면서 그 사이에 진료소로 오라고 했다. 진찰권은 외국인의 경우 50 루피, 내국인은 15루피이며, 약은 무상으로 준다고 했다.

준베시의 이 진료소는 3년 전부터 오스트리아 사람이 스폰서가 되어 주고 있다고 했다. 카트만두의 트레킹 회사 대표인 앙 치링 셰르파가 대표하는 NGO에서 관리하는 이 스폰서쉽은 의사 1, 간호보조사 1, 그리고 각종 의약품을 지원해 주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우선 툽텐 체링 곰파를 거쳐 팡 가르마에 들러보고, 오후에 돌아오면서 진료소에 들리기로 했다. 롯지를 나서서 30분 쯤 걸었을 때 이슬비가 뿌리기 시작했다. 앙 다와 씨가 멘 배낭 속에 우산이 있었지만 귀찮아서 그냥 걸었다.

툽텐 체링 곰파로 향하는 오르막 밑의 넓은 감자밭에서 야영을 하고 철수중인 그룹이 있었다. 서양 중년 여성 한 명이 4명의 포터, 2명의 쿡, 1명의 가이드를 대동한 그룹이었다. 늙수그레한 셰르파 가이드에 의하면 이들은 '둣 쿤드' 베이스캠프에 간다고 했다.

실은 우리도 카트만두를 출발할 때는 피케에 오른 후 '둣 쿤드' 베이스캠프에 가 볼 생각이 없지 않았다. 팡 가르마의 남겔 씨와 상의하여 준베시에서 포터와 식량과 장비를 구한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감기로 인해 체력이 현저하게 떨어져 있었기에 다시 생각해 봐야만 했다.

혼자 7 명이나 되는 현지인들을 대동한 서양 여자가 양손에 스키폴을 쥐고 겅중겅중 앞서 가는 길은 팡가르마로 가는 길이었다. 우리는 툽텐 체링 곰파로 오르는 중에 빈 자루를 하나씩 들고 내려오는 비구니 스님들을 만났다. 내가 네팔 말로 어디 가느냐고 물으니 감자를 사러 간다고 했다. 대답이 자연스러웠던 걸로 봐서 비구니 스님들은 내가 네팔이나 티베트 사람인 줄 알았던 것 같다.

네팔의 곰파에서는 우리나라 절에서처럼 식구들이 함께 밥을 지어 먹는 대중공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제각기 자기 양식으로 취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스님들이 제각기 자루를 들고 감자 사러 나가는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팡 가르마의 앙 마야 친정집 식구들과 찍은 기념사진.ⓒ김희수   
툽텐 체링 곰파의 비구니 스님들이 앙 마야의 친정집에 감자를 사러 와서 차를 마시고 있다. ⓒ김홍성   
툽텐 체링 곰파 가는 길의 탑면에 공산당 심벌인 낫과 망치가 그려져 있다. ⓒ김홍성  
팡 가르마 가는 길.ⓒ김홍성 

그 스님들 뒤에 내려오는 비구니 스님 두 분은 양 볼의 똑같은 부분에 반창고 같은 것을 붙이고 있기에 께 바요?’(왜 그래요?)라고 물었더니 이를 뺀 자리가 아파서 붙였다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입술 가장자리를 당겨서 어금니가 빠져 나간 붉은 잇몸을 보여 주었다. 우리나라라면 어림도 없는 수작에 어금니 뺀 자리까지 보여준 스님들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천진하게 느껴졌다.

곰파의 대법당 앞에는 많은 물건들이 쌓여 있고 그 주변에는 비구 스님들이 몰려 서 있었다. 물건을 배급하는 날인지 스님들이 약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한 스님은 케이크 같은 것을 안고서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법당 안에 따로 마련된 강의실 같은 곳에서는 젊은 스님들이 텔레비전을 통해서 무슨 다큐멘터리 같은 것을 시청하고 있었다.

곰파를 벗어나 다시 30분을 걸어서 도착한 팡 가르마 마을의 앙 마야 셰르파의 친정집에는 마침 온 식구가 다 모여 있었다. 봄에는 못 봤던 앙 마야의 올케(남겔 씨의 부인)와 앙 마야의 아버지도 있었고, 남부 평원 지대로 이주한 조카, 그리고 앙 마야 셰르파의 딸 밍마도 방학을 맞아 와 있었다.

밍마는 다음 날 파부루로 가서 비행기 편으로 카트만두로 돌아간다고 했다. 카트만두의 우리 집에 처음 왔을 때처럼 바싹 마른 얼굴이긴 한데, 전에는 없던 여드름이 송송 돋아 사춘기가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동생 치링에 비하면 예쁜 얼굴이 아니지만 태도나 말씨가 아주 착해서 대견했다. 실내에는 외지 손님들도 많았다. 키가 크고 뼈대도 굵은 덴마크 사내와 그의 가이드, 감자를 사러온 툽텐 체링 곰파의 비구니 스님들, 떠돌이 그릇 장수들 등이었다.

덴마크 사내는 팡 가르마를 비롯한 인근 마을을 돕는 NGO의 스폰서인데, 남겔과 함께 오후 1시에 마을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들렸다고 했다. 소찌아를 마시고, 감자를 삶아 먹고, 큼직큼직하게 자른 야크 치즈도 몇 토막 먹고 난 후에 창도 마셨다. 버터를 살짝 두른 냄비에 넣어 따끈하게 데운 창이었다.

우리는 1230분에 남겔과 작별하고 2시 직전에 준베시의 진료소로 내려왔다. 의사는 청진기로 숨소리를 듣고, 손전등을 비추어 목구멍을 들여다 본 후 진단을 내렸다. 내 병은 기관지염, 앙 다와씨는 코감기였다. 의사는 나에게 항생제가 든 닷새 분량의 약을 지어 주면서 찬바람을 쐬는 게 좋지 않으니 며칠 푹 쉬는 게 좋겠다고 했다.

숙소에 돌아와 약을 먹고 저녁 먹을 때까지 푹 잤다. 저녁을 먹은 후에 또 약을 먹고 약에 취해서 다시 잤다. 약에 취하여 자다가 730분에야 앙 다와 씨가 올라와 깨우는 바람에 일어났다. 식당에 내려와 김 선생과 함께 서양식 수프와 짜파티를 먹고 다시 올라와 누웠다.

탁톡의 주막집 부엌. 지금 만드는 음식은 방울 토마토 아차르.ⓒ김희수  

 

탁톡의 주막집 부엌 벽에 걸려 있는 국자 등 여러가지 취사 도구들.ⓒ김희수  

달_밧_떨커리. 오른쪽 옴폭한 그릇에 담긴 녹두죽을 달, 쟁반의 흰밥을 밧, 감자 등 푸성귀 요리를 떨커리. 합쳐서 달밧떨커리라고 한다. 쟁반의 수저 앞에 있는 김치 비슷한 것은 아차르라고 한다. ⓒ김희수

김 선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푹 쉬면서 몸을 회복해야만 했다. 2시 경에 일어나 식당에 내려가 보니 김 선생은 앙 다와 씨와 함께 탁톡에 올라가서 아주 푸짐하고 싼 달밧떨커리를 실컷 먹고 내려왔다고 했다. 나는 기운을 차리기 위해 별 맛도 없는 '치킨 누들 수프'를 먹었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 나서서 살레리 쪽 산꼭대기에 있는 체왕 곰파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나 숙소가 마땅치 않으면 파부루나 살레리까지 내려가 숙소를 정하기로 했다. 몸 아픈 핑계로 이쯤에서 걷기를 그만 두고 파부루에서 비행기로 철수하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김 선생에게 누누이 했던 말, 즉 배에 왕짜(王字)가 새겨질 때까지 걸어 보자고 한 말이 생각나서 차마 그러지를 못했다만일 나 혼자 걷는 중이었다면 이쯤에서 접어버렸을 수도 있었을 도보 여행이 김 선생으로 인해서 간신히 이어졌던 것이다.

오후 늦게 구름이 터지면서 푸른 하늘이 비쳤다. 사흘 내리 비가 오고 구름이 잔뜩 껴서 햇살을 보기 어려웠던 준베시에서 푸른 하늘을 본 김 선생은 시애틀이 생각난다고 했다. 김 선생은 오래 전에 그런 날씨가 3개월이나 이어지는 시애틀에서 산 적이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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