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어도 노가다 일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어.
나랑은 애인하면 안 되나?
꼴에 사내들이라고, 학생 놈이나 뺑끼칠쟁이나 하여간에.

정말 응칠이가 또 감옥에 갔어? 응칠이는 내가 잘 알지. 이 친구야, 글쎄 내 얘길 먼저 들어보라니까. 응칠이를 만난 것은 뺑끼칠을 할 때였어. 그 판에서는 학생이나 뺑끼칠쟁이나 젊거나 늙거나 노가다, 그러니까 막노동꾼이었어. 걸친 옷이 곧 신분을 드러낸다고나 할까. 멀쩡한 놈도 작업복 입고 한 손에 깡통 들고 뺑끼 붓을 드는 순간 뺑끼칠쟁이가 되는 거지. 양복 입고 뺑끼칠 할 수는 없잖아? 정신줄 놓지 않고서는 말이지. 뺑끼칠이라는 게 몸으로 때우고 군말 없이 오야지가 주는 일당이나 받으면 되지. 물론 땀으로 목욕할 정도로 열나게 일해야지.

군대 제대 후 복학하려니까 등록금이 이만저만 올랐어야지. 가세는 기울어 혼자인 모친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지, 우선 시급 알바를 구했는데 생활비도 안 되는 거야. 돈벌이는 시원치 않고 몸만 축나는 꼴이었지. 이렇게 일하다가는 대학 졸업은커녕 중도 하차해야 할 판이었지. 당시에는 대학물만 먹어도 ‘배운 놈’ 취급했어. 물론 노가다판에서는 말이지. 등록금을 벌기 위해 푼돈 벌이 알바를 버리고 페인트칠을 배웠지. 어차피 가진 것은 몸뚱이뿐이었으니까. 이학년에 복학하기 전 겨울방학부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어. 사포로 가구 표면을 문질러 붓질이 잘 먹게 다듬고 헤라로 벽면에 퍼티를 먹이는 데모도가 되었지. 대학생이란 놈이 기특하게 막일을 해서라도 살아보려는 자세를 높이 산 오야지 눈에 들었던 거야.

▲그 판에서는 학생이나 뺑끼칠쟁이나 젊거나 늙거나 노가다, 그러니까 막노동꾼이었어.ⓒ박시우
▲그 판에서는 학생이나 뺑끼칠쟁이나 젊거나 늙거나 노가다, 그러니까 막노동꾼이었어.ⓒ박시우

기술자 도장공이 부르면 한걸음에 달려가 사다리를 붙들고 있거나 페인트통을 18층 꼭대기까지 옮기거나 하는 곁꾼 일을 먼저 했지. 거기서 응칠이를 만났어. 팔뚝에 뱀 한 마리가 감겨있고 등에는 용이 승천하는 문신을 한 놈이었지. 멋있는 놈이었지. 나이는 나와 동갑인데 열 살은 더 먹어 보였지. 교도소에서 갓 출소한 몰골이었어. 언제라도 여차하면 빵으로 돌아갈 눈빛으로 껌을 씹다가 연신 세상 엿 같다면서 침을 뱉었지. 대학생년은 맛있냐? 씨발놈들.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만날 데모질에 연애질이냐. 세상 참 엿 같네. 한 푼이 아쉽고 연애할 시간조차 없던 내 속도 모르고 떠벌였지. 처음에는 그냥 실없이 웃어주다가 언제 한번 본때를 보여주리라 다짐했어.

그날 우리는 서울 변두리 주공아파트 18단지 건설 현장에서 오야지가 하달한 복도 벽에 수성 페인트칠을 해야 했어. 세 명이 한 팀이 돼서 페인트칠을 시작했지. 페인트통을 헤라로 따고 각자 통에 나누었지. 응칠이는 말통에 담글 롤러에 대걸레봉을 끼우고 있었고 나는 갤런 통에 2리터 정도 담고 사다리를 챙겼지. 그런데 말이야, 아침부터 우리 조에 따라붙은 아줌마가 안 보이는 거야. 문짝 테두리에 테이핑도 해야 되고 갈라진 틈에 빠데도 먹여야 하는데 말이야. 나이는 사십을 넘겼는데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호리호리했거든.

치마만 둘렀다 하면 눈이 돌아가는 게 군바리나 노가다판 사내들이야. 적어도 노가다 일을 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어. 하긴 수건을 머리에 동이고 마스크를 쓰면 얼굴을 알 수 없지. 몸뻬바지나 월남치마 입으면 알 게 뭐야. 아무 데나 퍼질러 앉아도 누구 하나 쳐다보는 사람도 없는데. 옷이 날개라잖아. 일 끝나고 화장하고 뾰족구두에 투피스를 입으면 내 가슴이 설레었다니까. 응칠이와는 현장에서 서로 잘 아는 사이였지. 서로 끌어안기도 하는 사이였지 아마. 내가 그 누님을 애타게 찾자 응칠이가 한마디 했지. 그사이를 못 참고 보고 싶냐고. 나는 깡통을 들고 사다리에 올라서서 롤러가 닿지 않는 문짝 모서리와 창틀을 붓으로 칠하고 있었어.

한참 동안 안 보이던 누님이 왔어. 새참으로 막걸리와 빈대떡을 사러 갔다 왔다나. 일하려고 먹을 게 아니라 먹기 위해서 사는 거니까 먹고 하자. 막걸리를 한 잔씩 걸치고 일하면 허리도 안 아프고 기분도 좋았지. 누님이 화장실에 간 사이 응칠이는 아예 웃통을 벗었지. 등짝에 문신한 용이 살아서 승천할 기세로 꿈틀거렸어. 팔뚝과 알통을 감은 뱀이 혀를 날름거렸지. 응칠이가 트림을 하며 말했지. 야, 너 저 여자 맘에 들지. 공돌이 남편이 폐암에 걸려서 먹고살려고 뺑끼칠 하는 거라고. 공순이 하다가 여기 일당이 좋으니까 온 거야.

빌려줄까? 응칠이가 침을 뱉으며 물었어. 뭘 빌려줘? 나는 혀끝에 모은 가래침을 더 멀리 날렸지. 이 새끼가 미쳤나. 응칠이 눈이 단박에 뒤집혔지. 너 이리와. 그렇지 않아도 감방이 그리워서 잠이 안 오는데 오늘 너 죽이고 푹 쉬다가 나와야겠다. 이내 응칠이 주먹이 날아왔고 나는 헤라를 들고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널브러졌지. 이걸 그냥 아가리를 변기통으로 만들어버릴까. 청춘이 불쌍해서 내가 참는다. 그 대신 오전에 저기 복도 끝까지 다 마무리해놓기다. 이 형은 볼일이 있어서 말이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빈 아파트로 누님과 함께 들어간 응칠이는 오전 내내 보이지 않았지. 나는 그 길로 집으로 갈까, 파출소로 갈까 망설였지. 아님 오야지한테 가서 일러바칠까. 나는 그대로 남아서 기회를 엿보기로 했지. 삼 주만 더 일하면 복학할 수 있는 등록금을 벌 수 있었어. 어떻게 얻은 알바인데. 나는 학생 신분을 잠시 접고 막노동꾼이 되기로 작심했어. 무엇보다 등록금을 벌어야 했거든. 응칠이도 자신이 노가다인지 깡패인지 구분하지 못하잖아. 막걸리 몇 병 마시면 다 똑같이 술 취한 노가다꾼이 되는 거지. 그날 저녁 응칠이가 미안하다고 마련한 술좌석에서 누님은 더 예뻐 보이는 거야.

응칠이가 화장실 간 사이에 누님에게 물어봤지. 술 취한 김에 안주 낸다고. 누님, 응칠이하고 친하던데. 응칠이하고 어떤 사입니까? 애인 사이지. 누님은 어느새 붉게 칠한 입술을 우물거렸어. 나랑은 애인하면 안 되나? 나는 취한 김에 한 발 디밀었지. 자기는 머리꼭지에 피도 안 마른 학생이잖아. 학생은 공부해야지. 누님은 내게 핀잔을 주며 혀가 보이게 웃었다.

나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어. 아이씨, 학생은 뭐도 없나? 사람 차별하면 안 되지. 그때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응칠이 놈이 황소처럼 내게 돌진하는 거였어. 나도 이번에는 그냥 당할 수는 없었지. 놈의 사타구니라도 걷어차자고 일어섰지. 바야흐로 난투극이 시작될 즈음, 누님이 혀를 차며 한마디 내뱉었어. 꼴에 사내들이라고, 학생 놈이나 뺑끼칠쟁이나 하여간에. <끝>

스마트 소설은 짧은 시간에 대중 영상 매체인 스마트폰으로 읽는 소설입니다. 눈으로 빠르게 읽고 머리와 가슴으로 깊은 감동을 주는 『박인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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