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순왈은 볶은 콩도 옥수수 죽도 손님인 우리뿐만 아니라 식구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작은 솥에 지은 하얀 쌀밥은 손님인 우리들에게만 자꾸 퍼 주었다. 마야 순왈은 우리가 일부러 배를 두드리며 쟁반을 물린 다음에야 솥단지에 남은 쌀밥을 싹싹 긁어서 남편과 시누이의 쟁반에 덜어 주었다.

밥을 짓는 순왈 부인과 채소를 다듬는 둘째 딸. 그리고 다른 자녀들. ⓒ김희수 

 

옥수수를 볶는 인드라 마야 순왈 35세. ⓒ김희수 

 

차녀 꺼멀 꾸마리 순왈 18세, 10학년 ⓒ김홍성 

 

옥수수 죽 ⓒ김홍성 

 

러빈 순왈 씨는 부인 인드라 마야 순왈(35)씨 와의 사이에 아홉 자녀를 두었다. 부인 인드라 마야 순왈이 15세에 시집와서 16세에 본 장녀 차미나 순왈은 2년 전에 이웃 마을로 출가하였다. 현재 19세다. 나머지 여덟 남매는 아래와 같다.

 

차녀 꺼멀 꾸마리 순왈, 18, 10 학년.

장남 틸럭 바하둘 순왈, 16, 9학년.

삼녀 리투 순왈 14, 7학년.

차남 빠담 바하둘 순왈, 12, 6학년.

삼남 케살 순왈 10, 3학년.

사녀 빠담 꾸마리 순왈, 7, 2학년.

오녀 살미라 순왈, 6, 1학년.

사남 러메쉬 순왈, 2.

 

러빈 순왈 씨의 출가 안 한 여동생인 비엣 꾸마리 순왈(35)도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러므로 티하르 명절 직전에 타계한 장모가 살아 있을 때까지는 모두 12 명의 식구가 오막살이 두 채에 나눠 살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많은 식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 셋은 화덕에 붙어 앉아 땀에 젖은 옷을 말리며 음식을 먹었다. 마야 순왈은 우선 콩을 볶아 쟁반에 담아 주었다. 누군가 락시도 내왔다. 장례 때 내린 술이라는데 오래되어 약간 시큼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볶은 콩과 락시로 시장기를 달래는 동안 마야 순왈은 옥수수 죽을 쑤기 시작했다. 앙 다와 씨가 혹시 말린 고기 있으면 달라고 하니 티하르 때 잡은 돼지고기는 진작 다 먹었다면서 막 조리가 끝난 옥수수 죽을 덜어 주었다. 마야 순왈은 볶은 콩도 옥수수 죽도 손님인 우리뿐만 아니라 식구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작은 솥에 지은 하얀 쌀밥은 손님인 우리들에게만 자꾸 퍼 주었다.

그 작은 솥단지에서 세 사람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만큼의 쌀밥이 나오는 게 신기했다. 마야 순왈은 우리가 일부러 배를 두드리며 쟁반을 물린 다음에야 솥단지에 남은 쌀밥을 싹싹 긁어서 남편과 시누이의 쟁반에 덜어 주었다.

 

비엣 꾸마리 순왈(35)이 손에 나무로 만든 국자를 들고 있다. ⓒ김홍성 

 

나무 국자는 커다란 담배 빨뿌리 같이 생겼다. ⓒ김홍성 

 

반찬은 이수쿨이라고 부르는 넝쿨 식물의 열매를 볶은 것이었다. 이수쿨은 감자 맛이 나는 호박인데 외양간의 지붕으로 뻗어 올라간 넝쿨에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러빈 순왈에 의하면 순왈 종족은 이곳 리쿠 콜라 지역의 여러 마을에 1천 기구 정도가 흩어져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며 산다고 했다. 러빈 순왈은 순왈들이 많이 사는 리쿠 콜라 주변 마을 이름을 열거했다. 부디, 키지, 마쓰 가웅, 렁거니, 까띠, 처띠, 니바레, 탄두와, 키지 발라떼, 오컬보드, 뿌랍짜, 딴워리, 티티카 콜라 ……. 티티카 콜라는 우리가 오전에 머히를 얻어먹은 동네라고 앙 다와 씨가 말했다.

앙 다와 씨는 순왈 말도 제법 알고 있었다. 네팔 표준어로 쿠쿠리라고 부르는 칼은 '', 하샤라고 부르는 톱날이 있는 작은 낫은 '구에', 알루(감자)'레레', 디딜방아는 '디끼', 등등의 순왈 말을 러빈 순왈의 검증을 받아가면서 알려 주었다.

이 날 밤 우리는 별채의 침대 네 개 중 세 개를 얻어서 잤다. 나머지 한 개의 침대에서 사내아이들 셋이 같이 잤다.

 

감자 맛이 나는 호박 이수쿨이 외양간의 처마에 달려 있다.ⓒ김홍성 

 

두 마리의 검은 토종 돼지가 뜨물을 먹고 있다. ⓒ김홍성 

 

송아지 입에 대통을 물려 놓고 대통을 통해 머히를 먹였다.ⓒ김홍성 

 

비엣 꾸마리 구릉과 빠담 바하둘 순왈 (12세, 6학년) ⓒ김홍성 

 

이튿날 식전에 러빈 순왈의 여동생 비엣 꾸마리 순왈이 가축을 먹이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두 마리의 검은 토종 돼지에게는 뜨물을 퍼주고, 송아지 입에는 대통을 물려 놓고 대통을 통해 머히를 먹였다. 마지막으로 외양간의 암소들에게 꼴을 주고서 젖을 짰다.

차를 마시고, 차를 마시는 동안 아이들이 마을에 가서 사온 라면을 끓여 먹고, 아침에 새로 만든 옥수수 죽도 먹고,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행장을 꾸려서 짊어졌다.

앙 다와 씨가 우리의 숙식비로는 350 루피면 족하다더라고 말했다. 김 선생이 혀를 내둘렀다. 김 선생은 셋이 하룻밤 묵으며 얻어먹은 사례로 350 루피(6 천 원)는 너무했다며 5백 루피(8천 원)를 냈다. 그리고 비상식량으로 남겨 둔 사탕과 초콜릿 등을 꺼내어 나누어 주었다.

마야 순왈은 차녀 꺼멀 꾸마리 순왈(18)이 며칠 전부터 머리가 많이 아프다며 약이 있으면 좀 달라고 했다. 김 선생은 투통약 여섯 알을 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에 한 알 씩 이틀을 먹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설명하고, 이틀 후에도 머리가 계속 아프면 병원에 가야 한다고 약사처럼 자상히 일러 주었다.<계속> 

 

러빈 순왈 씨의 가족 사진. 맨 왼쪽 남자는 지나가던 친척이다. ⓒ김홍성   

 

인드라 마야 순왈(35세)과 그녀의 막내 아들 러메쉬 순왈(2세). ⓒ김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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