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용군 소대장 마춘걸 증손녀,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함께 뛴 보람 가장 커”

 

독립투사 마춘걸 선생의 업적을 기린 대형 사진판을 들고 노 알렉산드르 회장. 노 회장은 마 선생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 씨로부터 전화를 직접 받고, ‘사단법인 너머’와 함께 그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한 노력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최희영
독립투사 마춘걸 선생의 업적을 기린 대형 사진판을 들고 노 알렉산드르 회장. 노 회장은 마 선생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 씨로부터 전화를 직접 받고, ‘사단법인 너머’와 함께 그녀를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한 노력이 가장 큰 보람이라고 했다. Ⓒ최희영

"마춘걸 선생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이고레브나 씨로부터 전화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것이 그분을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인정받도록 도와 준 첫 인연이었지요.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마춘걸 선생께서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게 됐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제 일처럼 기뻤어요. 대한고려인협회 창립 이후 첫 쾌거였습니다."

노 알렉산드르 회장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려인 독립운동기념비’ 건립 문제의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만 해도 몹시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우리말 발음 역시 더욱 또렷했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거의 우리네 수준이다. 하지만 편치 않은 감정 결엔 혀 놀림 역시 둔화되는 모양이다. 독립운동기념비 문제를 애기할 땐 그의 몇몇 발음이 엇나가곤 했다.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찾아주는 일 역시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마춘걸 선생님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씨가 언론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 자주 기억납니다. 그녀는 ‘나의 증조할아버지가 조선 독립을 위해 이곳을 떠나고, 그 뒤 몇 대를 지나 그 후세가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거의 100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제2의 마춘걸, 제3의 마춘걸 후손을 찾아주기 위해 고려인 지원단체인 ‘사단법인 너머’와 함께 더욱 열심히 노력해나가겠습니다.”

노 회장은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강조했다. 즉, 조상을 찾고자 하는 후손의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마춘걸 선생의 증손녀인 유스베틀라나 씨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칭찬했다. 2010년 취업 비자를 받고 한국에 온 이래 그녀는 조부모로부터 전해들은 어렴풋한 기억 한 토막을 수시로 꺼내 되새김했고, 독립운동가의 후손으로 인정받기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네트워크를 동원해 증조부와 관련된 자료를 수집하는 데도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흐뭇해했다.

독립투사 마춘걸의 활동사를 직조하는 데는 후손과 사단법인 너머, 대한고려인협회의 협력과 역할 분담이 중요했다. 그 결과 마춘걸은 살벌했던 ‘이만전투’(1921년 12월 5일) 당시 한운용 중대장이 이끌던 대한의용군 2중대 소속 소대장이었고, 백위군 1,500명을 상대로 싸웠던 50명 중 한 명으로 입증됐다.

이만전투에서 전사한 고려인 독립투사들과 러시아 혁명가들을 추도하기 위해 연해주 달리네레첸스크 이만역 서남쪽에 세워진 추도비 모습. Ⓒ독립기념관
이만전투에서 전사한 고려인 독립투사들과 러시아 혁명가들을 추도하기 위해 연해주 달리네레첸스크 이만역 서남쪽에 세워진 추도비 모습. Ⓒ독립기념관

이만전투 당시 일본군은 러시아 백위군을 지원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1922년까지, 혁명을 반대하던 백위군과 혁명 세력인 소비에트 적위군은 곳곳에서 치열하게 싸웠다. 고려인 주축의 대한의용군도 당시 내전에 참전했다. 그들의 주적은 일본과 한 통속인 러시아 백위군이었다. 적의 한 패 또한 당연히 적이었다.

이날 전투에서 대한의용군 50명 중 47명이 전사했다. 1902년생으로 당시 나이 20세였던 마춘걸은 큰 부상을 당한 채로 시체더미 속에 누워있다 다른 생존자 2명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했다. 이날의 현장 복원은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의 연구논문(2009)이 한몫했다. 논문 제목은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연구(1918-1922)’다. 또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 1910~1945>(최 발렌티노비치) 자료집 역시 이를 입증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

“마춘걸 선생님은 그러나 끝내 불운하게 돌아가셨습니다. 조국 광복도 못 보고 1938년 1월, 36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셨지요.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를 명령했던 스탈린 체제가 오판해 그분을 간첩 혐의로 처형했습니다. 그 뒤 20년가량이 지난 1957년 러시아 정부는 선생님의 간첩 혐의를 취소하고 복권했습니다. 그로부터 다시 62년이 지나 이 분에 대한 업적이 대한민국에서도 인정받게 됐습니다. 그 점이 무척 기쁩니다.”

2018년 5월 사단법인 너머가 주관했던 ‘고려인 생활사 특별전’에 전시된 노 알렉산드르(한국명 노송달) 회장의 어릴적 가족사진이다. 구소련이 해체되기 전 청소년기를 보낸 그의 삶이 키르기스스탄(비슈케크)과 우즈베키스탄(양기율, 타슈켄트)을 넘나들었던 모습이라 흥미롭다. 그는 대학 교수로 일했던 어머니를 따라 카자흐스탄에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다. Ⓒ사단법인 너머
2018년 5월 사단법인 너머가 주관했던 ‘고려인 생활사 특별전’에 전시된 노 알렉산드르(한국명 노송달) 회장의 어릴적 가족사진이다. 구소련이 해체되기 전 청소년기를 보낸 그의 삶이 키르기스스탄(비슈케크)과 우즈베키스탄(양기율, 타슈켄트)을 넘나들었던 모습이라 흥미롭다. 그는 대학 교수로 일했던 어머니를 따라 카자흐스탄에서 유년기를 보내기도 했다. Ⓒ사단법인 너머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나?

1997년 처음 왔다. 그 뒤 몇 차례 어머니가 계신 우즈베키스탄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일을 하다 지금은 안산에 사업체를 차려 주로 한국에서 살고 있다. 고층건물 외벽 도장 공사를 하는 사업인데, 고려인 직원 30여 명과 함께 일하고 있다. 20년 넘게 한국생활을 하다 보니 이젠 이곳 생활이 더 익숙하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가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동안 고려인사회와 한국 간에는 참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고려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85,000명가량이나 국내에 들어와 있어 대한고려인협회까지 만들 수 있게 됐다.

한국에 처음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타슈켄트 대학에 진학했다. 수학을 전공했다. 학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 당시 우즈베키스탄은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해 많이 어수선할 때였다. 좀 더 넓은 곳으로 나가 일하고 싶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한국을 떠올렸다. 할아버지 나라에 대한 관심이 생기며 방향을 틀었다. 말하자면 할아버지 때 떠난 조국으로 손자가 돌아온 온 셈이다. 한국에 온 대부분의 고려인들이 그렇다고 본다.

한국에 와서 조부모님의 고향은 가봤는가?

내가 장연 노씨. 장연은 황해도 땅이다. 사실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면서 조부모님이 족보 같은 것을 챙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할아버지 고향을 전혀 알 수 없다. 이름만 안다. ‘자다. 이런 세월이 올 줄 알았다면 할아버지에 대해 보다 많이 알아둘 걸 그랬다. 아버지 역시 같은 심정으로 고통 받다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화가였다. 내 뿌리에 대한 답답함이 커서 독립운동가 후손 찾아주기에 더 열심인지도 모른다.

경기도 안산 선부동 ‘사단법인 너머’ 1층에는 이주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 모습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웠던 ‘신한촌’ 모습, 그리고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경로 등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최희영
경기도 안산 선부동 ‘사단법인 너머’ 1층에는 이주 최초의 한인마을인 ‘지신허’ 모습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웠던 ‘신한촌’ 모습, 그리고 연해주 고려인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경로 등을 볼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최희영

노 알렉산드르 씨는 대한고려인협회의 지속적인 계획을 묻는 질문에 고려인으로서의 품위 유지가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다운 품격을 갖고 항상 모범적인 삶을 살아야 고려인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계속될 수 있다고 모두가 다짐하는 중이라고도 했다. 아마 조선족에 대한 일부의 비우호적인 여론을 의식한 듯했다.

대한고려인협회 회원은 현재 500명가량이다. 인천, 부산 등 전국에 지부를 두고, 안산 고려인문화센터 같은 고려인들의 정착과 교육을 지원하는 공익적 시설을 확대하고자 노력 중이다. 그 중심에 노 알렉산드르 씨가 있다. 그는 지난주 인터뷰 첫 회 기사를 보고 "더 잘 하라는 격려로 이해했다"고 또박또박 한글 문자를 보내왔다. 고려인의 품격이 묻어난 정중한 문자라 고려아리랑의 연재 보람이 한 뼘쯤 더 깊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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