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인간 내면의 모습을 그리다.
소설은 시대적 상황을 대변한다. 작가의 상상력은 현실을 반영한다. 모든 소설은 숨길 수 없는 현재를 담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든 시대 모습과 상황이 다르겠지만, 본질적 내면은 크게 차이가 없다. 그렇기에 2019년을 살아가는 내게 소설 '도련님'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일단 이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소설 '도련님'이 탄생했던 시기와 작가에 대해 거부감이 먼저 일어났던 것을 고백한다. 이 소설이 발표된 시기는 1906년,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뒤 불과 1년 뒤의 이야기이다. 독서모임 선정도서가 되어 의도치 않게 읽게 되었다. 아픈 역사의 기억이 떠올라 꼭 읽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추천해주셨다. 대한민국 국민으로 잊을 수 없는 시기에 등장한 일본 작가의 소설. 그런 소설이 어떻게 대한민국에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는 걸까 조금은 궁금해졌다.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빨리하고 싶은데, 개인적인 감정이 밀고 들어오는 걸 막을 수 없다. 간단한 결론을 말하자면 훌륭한 소설이라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견해이다. 1906년에 등장한 소설치고 깔끔하고 현대적인 구성에 감탄을 했다. 소설을 읽으며 우리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이야기, 일제 제국주의에 대한 찬양이 나오면 바로 책을 덮어버리려 했다. 다행히 그런 부분은 내용에서 찾을 수 없었다. 너무 과하지도 않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히 세상 이야기를 그려냈다. 또한 독자들로 하여금 피곤하지 않게, 적절하게 시대적 문제에 대한 비판도 그려냈다. 작가가 생각하고 원하는 가치관을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노출시켰다. 21세기에 등장한 훌륭한 소설이라 이야기해도 부족할 것이 없기에 나는 더욱 화가 났다.
노벨문학상 이야기를 하면 항상 일본 작가들이 거론된다. 영국 국적의 일본 소설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포함하면 총 3명의 일본인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이 말은 곧 대한민국 소설이 일본보다 못하다는 이야기일까? 현재가 아닌 다시 일제 강점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소설 '도련님'이 등장했던 1906년, 모든 한반도 땅이 일제의 핍박으로 인한 민족적 수난을 겪고 있을 때이다.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 일, 민족과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야만 하는 시기였다. 민족의 존망이 걸려있는 시대에 '도련님'과 같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여력이 남아있었을까? 나는 결코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조상들은 순간을 살아남기에도 바빴던 시기인데, 일본에서는 이렇게 훌륭한 순수 문학 작품이 나왔다는 사실에 조금 화가 나는게 사실이었다.
잘잘못을 넘어 일본 역시 주체할 수 없는 격변의 시기였다. 급속도로 변해가는 국가와 세계적 흐름에 일본인들 역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의리와 인간성을 지키는 삶은 바보스러운 것,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챙기지 못하는 사람은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회 풍토가 만연했을 것이다. 물질 만능주의, 이기주의가 팽배한 사회 모습을 비판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저 변화하는 시대 흐름에 물 흐르듯 휩쓸려가지 못하는 사람이 바보 취급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사회, 작가는 무너져가는 사회 모습과 사람들을 소설을 통해 맹렬하게 비난하고 있다.
소설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도련님'의 모습은 처음부터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 구성원과 환경에 대해 매우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죽음, 형과의 관계, 큰 충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여러 상황들을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무심하게 표현한다. 세상과 현실을 제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허나 굳이 가족의 한 구성원으로 주인공을 등장시켜 이야기를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점이 든다. 가족에게 외면당하는 주인공' 나'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함일까 생각도 들지만, 자신의 가족까지 마치 남일처럼 이야기하는 모습은 왠지 역설적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과 가장 가까울 수밖에 없는 가족들을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인 듯 이야기하며 사회 문제를 지적하는 '도련님'의 모습 역시 정상으로 느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주인공 도련님이 시골 지방의 교사로 발령이 난다. 근거를 알 수 없는 무모함과 자신감, 고지식함으로 똘똘 뭉친 교사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소설의 주를 이룬다. 실제 작가가 중학교 영어교사로 있던 시절 체험이 이야기 속에 녹아들어있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이상한 별명을 붙인다. 이상한 이름을 가진 그들은 실제 우리 삶 속에서 벌어질만한 부조리와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한 이기주의를 보여주는 교사들은 변화하는 일본 근대 사회의 추악하고 야비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련님'은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바람을 그대로 실천하는 가상의 인물이었을 것이다. 일본 사회의 부조리와 악행을 파헤치고 비판하고자 했던 의지가 유쾌하게 글로 뭍어 나온다. 권선징악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해야할까? 주인공 '도련님'의 눈에 거슬린 그들의 결말은 책을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만족감까지 느끼게 한다.
생각 없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면 주인공 '나'는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한 젊은 교사로 보일 것이다. 사실상 그는 학교라는 작은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정직한 눈을 가진 사람이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나 다른 세상에서 학교라는 공간을 바라본다. 어쩌면 가장 정직하고 양심적이어야 할 학교, 그리고 그 안의 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위선과 허위를 제3의 세계에서 냉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들이 이 소설의 작가 소세키가 바라본 일본의 모습, 자신이 몸담고 있는 학교의 모습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 '나쓰메 소세키'는 한때 일본 천 엔 지폐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나 역시 독서모임 선정도서로 결정되고 책을 읽기 전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도련님'을 읽고 서평을 정리하며 읽고 있던 '토지'에서도 소세키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었다. "염통을 꺼내 먹을 놈들! 톨스토이, 셰익스피어가 어디 뼈다귄지 핏대 세우는 꼴이 가관이고, 한술 더 떠서 나쓰메 소세키가 뭐 어쨌다는 거야? 그 군국주의, 아아 참 자네가 존경해 마지않는 영문학자요 대소설가였던가?"라는 이야기와 함께, "그 사람은 정치가도 군인도 아닙니다. 소설가며 영문학자일 뿐입니다. 외곬로 나가는 예술가를 두고 군국주의를 운운하시는 것은 지나치고, 아불관은 예술가들의 속성 아닐까요?" 이렇게 '토지'의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걸 보면 일제강점기 사회 속에서 소세키의 문학을 추켜세우는 조선 청년들 역시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많은 현대인의 입에 오르내린다. 12년이라는 짧은 창작 활동이었지만, 일본 근대 국민작가라는 칭호를 받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100년이 지났지만 소설 '도련님'은 여전히 우리 시기에도 유효하다. 시간과 세상의 변화에 이 소설은 완벽하게 적응하며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본연의 모습, 즉 작가 자신을 포함하여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내면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시기 일본의 소설이지만, 이 작품을 있는 그대로 순수 문학으로 고려하여 읽어보기에 좋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