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제일 처음으로 재판에 배심원들이 참석한 첫번째 국민참여재판이란 설정의 영화 <배심원들>은 사실국민참여재판이 시행된 이후 60번째 평결이었다고 한다. 허나 영화의 모티브가 된 첫번째 실화는 배심원 평결로 삼인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은 첫 사례라고 한다. 감독이 직접 의도적으로 실화와 멀어지게 각색을 했다고 밝힌 것처럼 법정 드라마라는 소재를 부담 없이 즐길 수 있게 풀어낸 연출에 <어 퓨 굿 맨>이나 <의뢰인> 같은 탄탄한 법정 공방과 추리 과정을 기대한 관점에선 다소 실망스러웠고 역시나 신파의 한계를 극복해 내지 못한 어쩡쩡한 언밸런스가 아쉬움이 남는 영화다.

영화 배심원들 공식 포스터
영화 배심원들 공식 포스터

 여러가지 이슈가 될만한 소재가 많은 영화다. 사법농단과 불신이 극에 달한 현 시점에서 국민이 참여하는 역사상 최초의 재판에 나이도, 직업도, 제각각인 일면식도 없었던 8명의 보통 사람들이 배심원단으로 선정되어 법원의 '죄와 인간을 심판하는 건 배우고 시험을 통과한 우리 법관들만의 신성한 고유 영역'이라는 법원에 대한 권위에 무지렁뱅이들의 도전으로 여기는 법관들간의 갈등, 그걸 또 자신들의 성공과 홍보수단으로 이용하려는 행태, '정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인간존엄'과 인간이 인간을 단죄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무서운 일이며 막중한 '정의'에 대해 알아가고 성찰해 가는 과정만 밀도 있게 담아내었더라도 훌륭한 법정 드라마가 되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법정영화의 스토리나인이 그렇다. 무죄든 유죄든 처음과는 다른 결과에 반전이 있고 그래서 관객들은 대리만족과 함께 통쾌함을 맛본다. 물론 영화 <배심원들>에서도 이런 기본적인 구조는 지켜진다. 험상궂는 얼굴에 어렸을 때 어머니 때문에 당한 화재로 인해 얼굴과 손에 진한 흉터가 생기고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일거리도 없는 중년 남자, 불안정한 어머니 봉급 대신 기초수급생활자로 지정되어 70만원의 고정 지원금을 받기 위해 술만 마시면 주민자치센터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피고인, '임대아파트'라는 가진 거 없는 사람들이 산다는 고정관념의 빈민가, 범죄현장에 있었던 피의자의 의수 등 배경은 그럴싸하고 처음부터 범인은 의심할 만한 여지도 범인이다. 그런데 유무죄를 다투는 법정이 아닌 양형 결정만 남아있던 재판에 갑자기 혐의를 부인한다.

 차라리 이런 기본 플롯을 충실히 따랐다면 법정영화 특유의 쫀듯쫀듯한 긴장감과 진실을 밝혀내는 추리까지 더해져 한 편의 완성도 높은 법정영화가 탄생하였겠으나 그랬다면 <12인의 성난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었을 테다. 거기서도 그리고 여기서도 살인의 대상이 존속이고 합리적 의심을 품고 문제를 제기하면서 강요에 저항하며 '싫어요'를 외치는 사람은 8번이다.

8명의 위대한 일반시민, 이들에 있어 세상이 지탱되고 움직인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 아티스트다.
8명의 위대한 일반시민, 이들이 있어 세상이 지탱되고 움직인다. 그러니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모두 아티스트다. 사진갈무리: 영화 배심원들

 이상하긴 했다. 처음부터 코믹스런 장면과 <웰컴 투 동막곡>, <트루먼쇼>를 연상케 하는 쎄고 쌘 한국 코메디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BGM이 흐를 때부터 영화는 국민참여재판 자체보다는 휴먼드라마로 흐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자칫 딱딱하고 복잡하며 머리 아픈 재판보단 가족 영화로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과 감동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다. 거기에 방점을 찍은 게 청소요정이라는 등장이었다. 해탈한 듯한 표정으로 민간인이 출입하지 못하는 미로 같은 법정 구석구석 도는 청소부는 박형식이 분한 8번 배심원에게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영화의 복선을 암시하는 발언을 하고 사라진다. 판타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도사 같은 역과 클래식 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어설프게 클래식의 이디엄을 모방한 듯한 음악과 일치하며 이제 영화의 성격은 정해져 버린다. 온 가족이 둘러 앉아 사회갈등과 문제에 대해 약간 고민하고 깨우쳐 가면서 대중들이 원하는 환호와 눈물의 <7번방의비밀) 류의 휴먼 가족 법정 판타지 드라마!

법정 영화 사상 최고의 명작 중 하나로 꼽히는 헨리 폰다 주연의 1957년 흑백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 중, 저작권이 풀려 유튜브에 자유럽게 시청 가능하니 꼭 한번 봐보길 권장한다. 흑백영화이자 법정영화니 지루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분쇄되면서 영화에 놀랍게 흡입 될 것이다. 사진갈무리: youtube 동영상

 음악이 너무나 키치하고 유치하기 짝이 없으며 무성의했다. 마치 심청전에 디즈니랜드 아류풍의 작위적인 음악 삽입이었지만 그래서 긴장을 풀고 B급영화, B급음악으로의 의도적인 인도일 수도 있으니 다각적이기도 하고 음악으로서의 기능에 충실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시사점은 처음 만난 8명의 사람들이 합리적 의심을 품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돕는 측은지심에 있다. 하루만의 만남과 헤어짐 이후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마지막 장면이 뭉클하다. 우리 인간은 서로 돕고 사는 존재기 때문이다. 특히나 요즘 같은 극단적인 이기심과 갈등을 조장하는 세태에서 그나마 인간미가 흐르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주체적인 참여(Engagement)가 필수다. 우리는 모두 같이 사는 세상을 공동으로 관여하는 아티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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