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경마
국제경마연맹(IFHA:International Federation of Horseracing Authorities ) 산하 국제경주분류표준위원회(ICSC : International Cataloguing Standards Committee)에서는 매년 개별 경마시행국의 경마시행 수준을 평가해 Part Ⅰ·Ⅱ·Ⅲ 국가로 분류한다. Part 국가로의 진입은 매출이나 입장인원 등 경마의 양적 수준은 물론이고, 경주마의 질 및 경주마의 생산도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음을 인정받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경마를 시행하고 있는 200여개의 국가 중 120개국 정도가 ICSC에 가입되어 있고 이중 60개국이 Part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4년 Part Ⅲ 국가로 인정되어 Part 국가로 진입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아직 PartⅢ 국가인 반면, 이웃나라 일본은 이미 2006년에 PartⅠ국가로 인정받은 바 있다. PartⅠ국가는 전세계에서 16개국에 불과하다.
1914년 최초의 경마가 열린 이후, 우리나라의 경마 역사도 어느덧 100년을 헤아리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 경마는 여전히 경마 시행과 경주마의 수준에 있어서 일본 등 경마 선진국과 큰 폭의 차이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갭(Gap)은 어디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이 기사는 일본과 우리나라 경마의 역사를 살펴보고 현재의 질적인 차이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파악하여 우리 경마의 지향점을 생각해 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 일본 경마의 태동
일본에서 근대적인 서구식 경마가 선을 보인 것은 1861년 봄으로, 요꼬하마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인(人)들의 사교오락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865년 미국인들의 주도로 레이스클럽이 조직되었으나, 이때까지도 일본인에게는 가입이 허용되지 않고 일본의 간섭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지대였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을 겪으면서 군마용 마필 개량의 필요성을 깨달은 일본은, 그 재원 마련을 위해 1905년에 마권을 발매하는 경마장을 설치한 데 이어 8개의 지방경마장을 신설하여 마사진흥의 명목으로 기금 확보에 전력했다. 이후 1906년 12월에 경마 개최를 목적으로 하는 법인이 설립되고, 경마 감독에 관한 강령이 공표되어 경마운영의 원칙을 마련한다. 이어 1908년, 전문(全文) 23조로 된 경마규칙이 공포되면서 일본에 경마가 들어온 지 40여년 만에 비로소 경마에 대한 법규가 마련된다. 이 경마규칙은 후에 일본경마법의 기초가 되었으며, 식민지였던 우리나라의 경마 지침으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1923년에는 처음으로 경마법이 제정되어 승마투표에 대한 공식적인 규정이 정해졌다. 1936년에는 일본 내에서 경마를 운영하던 11개의 경마조직을 해산시키고 단일 법인인 일본경마회를 설립 독점적으로 경마를 시행하게 했다. 1938년에는 일본더비가 시행되었으며 1941년에는 `Saint Lite`가 일본 삼관경주의 최초의 삼관마가 된다.

2. 엇갈린 한일 경마사의 시작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경마는 1914년 4월 일본인에 의하여 용산구 연병장에서 시행된 경주이다. 우리나라에서 경마가 제도화된 시초는 1922년에 설립된 사단법인 경마구락부이다. 이 단체는 1942년에 설립된 특별법인 조선마사회의 전신으로 약 20년간 경마를 주도해 왔다. 최초에는 전국 6개 도시에 경마구락부가 설립되었으나 1933년에 9개로 늘어났다. 1928년에는 경성경마장이 동대문 밖 신설동으로 이전되어 본격적으로 경마장이 운영되었으며, 32년 조선경마령 및 시행규칙이 제정 ·공포되었고, 33년에는 조선경마협회가 설립되었다.
한편 조선마사회라는 단체는 원래 9개의 경마구락부와 사단법인 조선경마협회를 통합한 연합조직이었는데, 1942년 총독부 산하기관 성격의 특별법인 조선마사회가 설립되어 9개의 경마구락부와 조선경마협회를 해체하고 조선의 독점적인 경마시행체로 발족하게 된다.
1945년 8 ·15광복과 함께 조선마사회는 미 군정으로 관할권이 옮겨졌으며, 신설동에 있는 ‘경성경마장’을 ‘서울경마장’으로 개칭하였다. 정부 수립 후인 1949년에는 조선마사회에서 한국마사회로 명칭이 변경되어 탄생하게 된다. 이후 54년 성수동(뚝섬)에 새로이 경마장을 마련하여 신설동으로부터 이전하였으며, 경주마 확보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수가 부족하여 대부분 제주산 조랑말로 경주를 시행하였다. 62년에는 종전의 조선마사회법이 폐지되고, 한국마사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72년에는 민간투자 시설을 인수, 한국마사회가 단일 시행체, 단일 마주, 단일 시설주로 경마를 시행하였다. 88년에 과천 올림픽 승마경기장 겸 서울경마장이 건설되었고 국산마의 생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93년 8월부터 개인마주제가 시행되어 우리나라 경마 발전의 큰 계기가 마련된다.

일제 치하 조선에서의 경마시행조직의 제도화 과정은 일본 국내의 변화과정과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되었다. 이는 근본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의 군국주의적 특성과 군마 확보라는 목적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당초 일본의 경마법에는 11개의 운영조직이 각각의 사단법인을 통해 경마를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각 경마조직은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 정부의 목적 달성과 통제가 어려웠고, 이러한 이유로 1936년 단일 공법인인 일본경마회를 설립하여 독점적으로 시행하도록 한 것이다. 즉, 국책상의 관점으로 시행체를 강력하고 특별한 기관으로 만들어 당국의 통제를 받게 한 것이다. 1942년에 설립된 조선마사회는 이러한 정책적 특성이 식민지 조선에도 그대로 이식된 것을 보여주는 기관이다.
따라서 해방 이후 일제의 군국주의적 필요성에 따라 조직된 조선마사회는 그 관변단체의 성격을 청산하고 주체적인 운영의 길을 모색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후 미 군정에 그 관할권이 옮겨지고 정부 수립 후 정부 산하 기관의 성격으로 편입됨으로써 국가 운영의 독점체제가 합리적으로 재편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이 사실은 일제 치하 경마 시행 방침이었던 피지배민족의 우민화 정책과 부정경마에 대한 방관자적 정책 역시 청산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데에 실패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나라의 경마에 있어서 베팅을 위한 부문만이 발전하여 기형적인 경마산업의 모습을 형성하고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팽배하게 하는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일제 치하 지식인층을 중심으로 일본인들로 구성된 경마시행체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표출했는데, 해방 후 이러한 성향은 우리나라 경마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구조화되는 데 일조했다.
식민지 지배 하에서 제도화가 이루어진 경마는 그 자체가 지닌 수익적 속성 때문에 정치사회의 변동에도 불구하고 그 통제적 특성이 지속될 수 있었다. 즉, 경마를 효과적인 세수(稅收)의 대상으로 간주하고 있는 정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해방 후 우리나라 경마정책은 일제가 남긴 구조와 제도를 개편하지 못하고 효과적인 조세 확보를 위해 경마시행체에 대한 통제정책에 집중해 온 부끄러운 모습이다.
반면 일본은 패전이라는 계기로 1950년대 이후 자국 경주마의 질적 향상과 경마 시행 체계 개선을 위한 시도를 하기 시작한다. 식민지 지배 당시 우리나라에 현 체제를 이식한 일본은 전후에 시행주체를 국가와 지방공공단체로 이원화하여 단일 운영조직의 틀에서 벗어나 오히려 각 시행체의 자율적인 공간을 확보해 주는 모습을 보였다. 아울러 경마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사회적인 인기 상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의 차이가 현재 우리나라와 일본 경마의 질적 수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비슷한 경마 역사와 태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기회를 방기했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현재 양국 경마의 달라진 모습을 만든 원인이다.

3. 경마선진화를 위한 일본의 노력

1) 우수 경주마를 위한 노력
20세기 전반기 일본에서는 전쟁에 사용할 군마 생산과 그를 위한 마필 개량의 목적으로 서러브렛을 생산하고 그 능력 검증의 장으로서 경마를 시행하였다. 일본 역시 당시 경주마의 질은 세계적으로 수준 이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패전 이후 약 10년 동안은 전후 상황에 따라 서러브렛의 수입이 완전히 끊겨 일본산 씨수말을 활용하여 경주마를 생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전쟁 복구 경비 확보를 위한 일본정부의 적극적인 육성정책에 힘입어 경마 산업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하며, 이 시기에 수입한 씨수말이 일본의 서러브렛 생산의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일본의 서러브렛은 원래 군마 생산의 활성원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스테미너형에 편중되어 있었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경주마 혈통에 스피드를 더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수입된 씨수말들은 스프린터와 마일러의 특성을 지닌다. 일본의 씨수말 수입 러시로 세계 서러브렛 혈통에서 일부 계통의 씨가 말라버렸다고 비난을 받을 만큼 이 시기의 일본 생산계는 극단적으로 씨수말 수입에 매달린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경주마 수준을 20년 가까이 앞당겼다고 평가를 받는 두 마리의 씨수말이 등장한다. 그 말은 ‘Northern Taste’(1971,부:Northern Dancer)와 `Maruzensky`(1974,부:Nijinsky)이다. 이 두 마리의 성공과 폭발적인 경제 성장으로 일본은 다시 방대한 수의 `Northern Dancer`와 `Nijinsky`계의 씨수말을 수입한다. 이는 결국 일본 경주마의 혈통을 노던댄서계의 포화상태로 만든 원인이 된다. 이 무렵 앞으로 일본 씨수말로 非노던댄서 혈통이 성공한다고 생각한 선각자의 큰 걸음이 있었다. 바로 샤다이 목장의 요시다 젠야(吉田照哉)가 ‘Sunday Silence’(1986,부:Halo)를 수입한 것이다.
`Sunday Silence`는 2002년 질병으로 사망했으나, 1991년에 씨수말로 데뷔하여 1995년부터 2007년까지 13년 연속 일본 리딩 사이어를 차지하여 일본 경주마의 수준을 혁신적으로 향상시킨 일등공신이다.
일본 경주마 생산계의 목적은 바로 ‘세계에 통용될 만한 강한 말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우수한 씨수말과 씨암말을 도입하여 경주마의 질을 착실하게 향상시켰고 이는 일본이 PartⅠ국가가 되는 큰 원동력이 되었다.

2)경마 정책 상의 일본 경마의 노력
일본 정부는 일본 경주마 생산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홋카이도[北海島]를 일본의 마필 생산 중심지로 육성하여 축산업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펴 왔다. 또한 이 매출의 상당부분을 경마 인프라로 과감히 재투자하여 질적 향상을 꾀하였다.
아울러 1959년 JRA(일본 중앙 경마회)는 경마상금체계를 정률제로 과감히 전환하여 마권 매출액의 6%를 경마 상금으로 책정하였다. 이 같은 결정으로 마주들이 열성적으로 경주마를 구매하면서 질 높은 경주를 창출, 마권매출액이 급증하였다. 1976년부터는 정률을 4%로 낮췄으나 이러한 정책을 20년 이상 유지함으로써 경마산업의 호황기를 이끌었다. JRA는 이 상금을 기반으로 농촌 투자 확대, 각종 사회시설의 지원, 세금납부의 증액 등에 기여하였다. 이러한 용기 있는 상금 책정이 경마 발전에 큰 힘이 된 것이다.
한편, 일본 경마의 과감한 국제 개방 정책 역시 현재의 일본 경마를 있게 한 원동력이다. 외국의 우수한 말이 참가하는 교류를 통해 일본 경주마의 질적 향상과 일본 경마의 국제화를 도모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1981년에 창설된 제팬컵(Japan Cup)에는 전세계의 우수한 경주마들이 참가하여 일본산 우수 마필들과 경쟁하고 있다. 국제 교류 경주를 늘리려는 노력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121개의 경마대회를 국제적으로 개방할 예정이다.

3)경마 이미지 개선 및 사회적 인기를 위한 일본 경마의 노력
JRA는 일본 내의 유명 연예인들을 광고 모델로 사용하여 경마 캠페인을 전개해 왔다. 많은 일본 굴지의 스타들이 JRA의 모델을 거쳐 갔다. 또한 2004년에는 우리나라의 한류스타인 윤손하가 JRA의 모델이 되어 화제가 된 바 있다.
또한 JRA는 일본의 젊은 스타들을 대거 기용, 신문과 잡지, TV 등의 매체와 공동으로 경마 캠페인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젊은 세대가 경마 인기의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홍보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일본의 대표적인 기수인 다케 유타카가 유명 스포츠 선수 못지 않은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을 만큼, 국민적인 인기를 모으는 경마 스타를 창출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의 방송 매체를 통해 경주마와 경마 스타를 위한 홍보를 추진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경마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계기를 마련했다.

경마는 요행을 바라고 베팅을 하는 오락이 아니다. 경주마와 기수의 능력을 기본 전제로 하여 각종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자료와 정보를 근거로 분석과 추리를 하여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하여야 하는 스포츠이다. 경마를 분석할 때는, 혈통과 생산 육성 및 훈련 등 무려 100여 가지의 우승 요인을 토대로 추리해야 한다.
또한 경마는 경주마를 생산하는 1차 산업을 핵심적인 기반으로 하는 기간산업이다. 경주마의 생산-육성-경주투입-생산투입-생산으로 이어지는 순환 체계를 통해 경마산업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경주마 산업은 다양한 부가가치를 생성하며, 1차 산업부터 4차 산업까지 모든 산업 분야가 연결되어 경제를 튼튼하게 한다.
한국마사회법 제1조에서는 경마 시행 목적을 ‘마사진흥과 축산발전, 국민의 여가선용’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경마의 본질 및 법률의 내용과 우리나라의 경마 상황은 큰 괴리가 있다. 경마산업을 경마를 시행하고 마권을 판매하는 행위로 인식하는 오류가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1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권 매매 부분만 중요하게 취급되어 기형적인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산마 생산의 역사는 이제 20여년에 불과하여 경주마의 질적 수준에서 세계의 벽을 뛰어 넘기에 역부족인 상황이다.
앞으로 우리나라 경마는 경주마 생산 중심의 인프라 구축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아울러 언론과 매스컴을 통해 경마의 본질을 정확히 알리고 스타 경주마와 스타 기수를 탄생시키는 홍보 전략도 적극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경마의 부정적 이미지 개선을 위해 마주, 조교사, 기수 등 경마인들의 자구노력도 필수적으로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선행되어야 할 것은 경마에 대한 정부의 인식 개선과 정책적 지원이다.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법에서 경마를 제외하고, 경마죽이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는 본연의 임무인 불법사설경마의 단속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전자카드 도입, 매출총량규제, 온라인베팅 폐지 등 시대착오적인 정책은 하루바삐 폐기되어야 한다. 이러한 정책만이 일본 경마의 발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을 실천에 옮기는 길이며, 더 나아가 세계 일류 경마선진국인 PartⅠ국가가 되는 지름길이다.

이승열 기자 wang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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