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5일 목요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원형에 대한 보존과 계속된 진화 사이의 고민

서울시향의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된 독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들려줄 베토벤에 대한 기대는 독일 정통파로서의 원형에 대한 모범, 클래식적인 해석이었다. 뿌리를 깊게 근접한 본질적인 연주, 근원적인 형태 말이다. 독일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들려줄 독일 음악에 대한 스탠더드에 대한 선입견을 가지고 접근해서 그런지 고정관념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이 신선했다. 300번 이상 여러 연주자의 음원과 실황을 들은 필자에게 300번 이상 공개된 무대에서 베토벤 협주곡을 연주한 테츨라프의 또 다른 접근과 발견은 베토벤 원형의 실로 무궁무진함에 새삼 감탄하는 시간이었다. 파격은 카덴차에서 표출되었다. 팀파니와 함께 집시풍의 자유로운 2중주 즉흥연주를 방불케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여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론 "베토벤다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베토벤의 바이올린협주곡은 합주곡과 비루투오서의 경계에 있는 곡으로 테츨라프 개인의 끼와 자유분방함을 마음껏 표출하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클래식 음악이다. 정형미와 규범은 클래식 음악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보존되어야 할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테츨라프는 300번 이상 연주한 곡의 규범 안에 자신을 가두길 답답했을 것이다. 한편 반복적인 익숙함이야말로 우리는 또 매너리즘이라고 부른다.

독일 출신 바이올리니시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연주 후
독일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연주 후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판소리 같은 정통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 한다면 갓 쓰고 도포 입고 정통적인 발성으로 부르는 걸 기대할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 국악이 그런 전통을 답습하기보단 진보라는 개념으로 원형을 유지하면서 이런저런 시도로 과거와 함께 미래를 함께 품하려고 하고 있다. 유럽에 가서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나 바그너의 음악극을 보게 되면 십중팔구 이방인이 상상했던 그런 보편적인 무대장치와 분장보다는 현대적인 요소의 가미와 해석이 많아 이질감을 느끼지만 현지인들은 같은 걸 수백수천 번 했기에 그 안에서 뭔가를 끊임없이 바꾸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테츨라프의 연주는 신선했지만 베토벤스러웠나 하는 질문에는 의문표가 붙었다. 그런 '~~스러움'은 앙코르로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소나타에서도 여실히 '바흐스러움'에 대해 자문하고 논의하게 만들었다. 동양의 타자(他者)가 평가하는 베토벤과 바흐가 자국인보다 더 잘 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우리 한국 연주자들이 유럽 현지인의 베토벤, 차이코프스키보다 더 독일적으로, 더 러시아적으로 더 나아가, 더 글로벌적으로 연주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인터넷 지구촌 시대에 독일, 한국 등의 지역적인 묶음과 경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가도 반문해 본다. 다른 의미에서의 경계허물기는 계속된다. 하이페츠나 오이스트라흐는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지금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의 연주자들은 음악 장르의 경계를 아주 자유롭게 오가면서 클래식, 재즈, 월드뮤직 등등 다재다능과 멀티를 뽐낸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필하모니가 연주하는 베토벤은 최고일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는 건 인지상정이다. 7월에 내한해 서울시향과 함께 모차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을 협연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틸 펠러는 정말 모차르트다운 연주를 들려주었던바, 국적과 담장쌓기가 아닌 연주자 개인의 취향과 추구하는 가치관일터 원형에 대한 보존이냐 연주자의 주관적인 해석이냐는 해묵은 그러나 정답이 없는 논쟁에 다시 빠져든다.

뜨거운 기립 박수, 환호하는 관객들
뜨거운 기립 박수, 환호하는 관객들

 그래서 2부의 말러는 말러의 연주에 정통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이스터임에도 의도적으로 '오스트리아다움'을 배제하고 들어보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말러라는 거대한 우주 안에 만프레트 호네크는 마음껏 빈 기질, 빈 풍(Wien Style)의 진수를 선사하면서 말러의 숨결이 살아 있는 빈의 정취에 흠뻑 빠져들게 만들었다. 특히나 2악장는 왈츠와 랜틀러라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춤곡이 요동치면서 우아의 춤에 도취되게 만들었는데 그건 만프레트 호네크라는 오스트리아인이 들려주고 구현내 낼 수 있는 뿌리다. 그래서 그런 독일다움을 테츨라프에게 바랬던 거였는데 테츨라프의 만개를 위해선 베토벤이 짜 놓은 설계도의 제약이 너무 심한지도 모르겠다. 만약 말러 같은 음악을 테츨라프가 연주했다면 신선과 파격 그리고 진화에 더 설득되어졌을건데 아님 계속해서 프레임의 덫에 필자가 갇혀 못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말러의 음악은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게 만든다. 말러만큼 한국 청중을 열광케 하는 인기 작곡가를 굳이 비교하자면 차이코프스키 일 건데 열광의 반응이 상이하다. 차이코프스키가 한일전 축구 승리에서 오는 호쾌함과 통쾌함이라면 말러는 마치 교회 부흥회를 연상시키는 광적이다. 그래서 음악회 제목을 한 줄로 포착한 서울시향 홍보팀 담당자에게 다시 한번 경탄을 금치 못한다. 본질을 꿰뚫고 있는 그의 투시력과 안목이리. 오늘의 음악회는 Embracing World, 즉 '세계를 받아들이다'이다. 오날의 연주로 다수의 말러리안이 또 탄생하였으리라.

매진, 만석, 환호, 열광, 3층까지 가득찬 수준 높은 관객들, 관람매너도 최고, 역시 한국 최고 교향악단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연주와 팬들이다!
매진, 만석, 환호, 열광, 3층까지 가득찬 수준 높은 관객들, 관람매너도 최고, 역시 한국 최고 교향악단이라는 명성에 걸맞는 연주와 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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