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제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나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거기 남아 있다. 켜켜이 묵은 시간이 드리운 두꺼운 장막에도 좀 먹은 구멍은 있어서 거기 눈을 대면 어두운 방 아랫목에 놓인 화롯불처럼 희미한 할머니의 모습이 보인다. 그것을 첫 장면으로 하여 어린 시절 몇 토막이 무성 영화 필름처럼 돌아간다.

 

내 기억의 가평 할머니는 늘 화로불 앞에 앉아 있다. 풀색 군용 담요로 만든 바지저고리 차림이고, 쪽진 머리에 백동비녀를 꼽았다. 그리고 봉초 담배를 말아 피운다. 나는 할머니의 화로 곁에서 군밤을 얻어먹으며 옛날이야기를 조른다. 듣고 또 들었던 옛날이야기 중 하나는 된장 이야기다.

 

옛 날 옛 날 한 옛 날에

할머니하고 할아버지가 사셨는데

할아버지는 산에 나무하러 가고

할머니는 개울에 빨래하러 갔더란다.

 

할머니가 타령조로 읊으시는 이야기는 으레 이렇게 시작된다. 그리고 아래와 같이 끝난다.

 

어허, 이 된장찌개 참 맛있네,

할멈, 이 된장 어디서 났소?

개울에 떠내려 오는 걸 빨래 방망이로 건졌소.

뭐라고? 예끼, 이 할망구야, 이건 내 똥이야. 내가 산에 가서 싼 똥이야.

 

우리 아이들은 그때 왜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어 했는지 모르겠다. 동네를 휘감아 도는 개울 앞산 꼭대기에 있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 이름도 똥통 바위였다. 가평 할머니에 의하면, 옛날 옛적의 마고 할머니가 그 바위를 딛고 앉아서 똥을 눴기 때문에 똥통 바위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똥통 바위 아래 개울가에 쌓여 있는 바위들은 마고 할머니가 눈 똥이 굳은 것이라고 했다.

 

우리 어린 시절의 부모님은 무척 바빴다. 아버지는 인근 야전병원의 군의관이었는데 퇴근 후에는 마을에서 야간진료를 했다. 어머니는 그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간호사 역할을 했다. 그래서 가평 할머니가 친할머니처럼 우리 형제들을 돌보면서 살림을 했다.

 

부모님은 환자를 보느라 늦도록 병원에 있고, 동생들은 벌써 잠든 밤이면 나는 슬그머니 할머니 방으로 건너가 옛날이야기를 조르곤 했는데, 어느 날은 할머니를 졸라서 할머니의 봉초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보기도 했다. 신문종이로, 침 발라서 만 봉초 담배는 무척 독한 것이었다. 머리가 팽 돌면서 아득해지던 기억을 끝으로 할머니는 퇴장한다. 그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의 커다란 느티나무가 등장한다.

 

느티나무 아래서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419 학생 혁명이 났던 그 해에 1학년이었던 나는 학급 대표로 글짓기 대회에 나갔다. 선생님이 내 짝이었던 아이에게 내 필통의 연필 몇 자루를 깎아 주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예쁜 얼굴에 노래도 잘 불렀던 그 애가 연필을 예쁘게 깎아준 덕분인지 내 글이 뽑혔다.

 

가평 할머니라는 제목의 그 글은 북한에 남았다는 친할머니에게 안부를 묻고, 우리에게는 할머니 대신 가평 할머니가 함께 살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라는 편지 형식이었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기 전인 1960년이었으며, 우리 학교는 휴전선이 멀지 않은 전방의 기지촌에 있었으니 친할머니의 사진도 못 보고 자라는 어린이의 할머니 이야기가 돋보였나 보았다.

 

전교생이 모인 조회 시간에 나는 운동장 단상에 올라가 내 글을 읽었다. 단상에 올라서니 단상 아래 서있는 아이들은 물론 선생님들도 모두 조그맣게 보였다. 그렇게 가슴이 크게 부풀어 본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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