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초동과 광화문으로 나뉘어 세 대결을 펼치면서 한쪽이 150만에서 2백만 명이 운집했다고 주장하자 상대편은 5만명설을 주장하고 우리 쪽이 더 많이 모였다고 반박한다. 경찰이 쓰는 '페르미 기법'까지 동원하고 과거 집회 장면을 짜집기하면서 뻥튀기라고 비난한다. 본인이 속한 집단의 많은 인원수를 이용해 힘을 과시하려는 작태는 참으로 유아적인 작태지만 원초적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흥분한다. 모인 사람들은 같은 철학과 가치관을 공유한 우리 편이다. 가족이나 친지, 친구들하고도 소통하지 못하고 어디서도 공감 받지 못한 사람들이 무리에 속하기만 하면 다 내 편이고 든든하며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을 거 같은 호승심에 빠지고 동지애를 느낀다. 집단 카타르시스를 맛보고 황홀해진다. 마치 부흥회와 기도회에 참석해서 종교적 위안과 집단 카타르시를 맛보는 거 같이 황홀해진다. 딱 홀리건이 그런 식이다. 이런 일은 우리 역사에서도 흔하게 발견된다. 6.29 선언 이후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가 보라매 공원에서 연설을 하면서 100만을 모았다고 큰 소리를 치니 김영삼 후보가 당시 허허벌판이었던 부산의 수영만(현재는 벡스코가 위치한)에서 200만이 집결해 지지했다고 반격했으며 그러다 보니 그들의 주장대로 모인 사람 수를 세면 당시 유권자 수보다 많았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도 유생들이 틈만 나면 만민소네 뭐네 하면서 압박용 카드로 연명을 하고 집단행동을 일삼았으니 그런 '패거리 문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진제공: 정치평론가 김홍국
사진제공: 정치평론가 김홍국

크고 많은 걸 선호하는 경향은 '소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어디 가나 스피커 소리 때문에 시끄러워 조용한데 찾아 도망가고 싶을 정도며 산에 가도 그놈의 트랜지스터라디오에 국적불명의 뽕짝이요 명승고적지라고 가면 첫번째로 반기는 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품바 타령류의 요란하고 괴상한 음악 일색이다. 필자의 집 앞 서울교육대학교에서는 점심시간과 하교 시간에 맞춰 교내방송을 트는데 학교 안에서 충분히 들을 수 있을 볼륨을 넘어 온 서초동이 떠나가라 크게 튼다. 학교라면 좀 차분하고 조용한 학풍이어야 할 건데 20대 초반 학생들의 취향에 맞춘 대중음악이 교내 담장을 타고 넘을 정도다. 다들 귓구멍이 막혔는지 그 안에 있으면 둔감한 건지 볼륨 좀 낮추라고 해도 요지부동이다. 사람들이 모이는 스포츠 경기장이든 집회 현장이든 어디 가나 인공적인 음향증폭기인 스피커와 마이크로 상대방과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런 큰 소리는 사람들을 선동시키고 흥분시킨다. 운집한 대중들에 귀청을 때리는 연설 소리 그리고 선동적인 행진곡 또는 민중가요 풍의 음악들.

그건 우리네 기호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정적이고 음미하면서도 사색할 수 있는 요소는 대번에 지루하고 따분하다로 폄하되어 크고 거대하고 화려한 것만 추구한다. 건물도 크고 웅장하고 경쟁하듯이 높게 지어야 하고 인구 60만도 안되는 지방의 도시에 140층짜리 타워를 짓는다고 선전하고 거기에 부화뇌동한다. 허풍쟁이 천지다. 작은 거짓말엔 분노하면서 큰 거짓과 거악에는 쉽게 편승되어 동조하고 추앙하면서 도리어 부러워하고 끼고 싶어 안달이다.

사진제공: 연합뉴스
사진제공: 연합뉴스

자연스러움을 추구했던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이런 인공적인 것에 길들여져 점점 난폭해지고 과격해지면서 한편에서는 정서가 메말랐네 하면서 한탄하는지 이율배반적이다. 언제부터인가 클래식 음악회에도 마이크와 스피커가 자연스레 사용되면서 음향감독들은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국악이든 별 상관없이 야외 공연이라면 무조건 우선은 크게 틀어놓은 게 일인가 보다. 성악가는 일단 목청이 커야 하고 소리를 잘 질러야 한다. 성량이 크고 볼륨이 크면 잘 부른다고 손뼉을 쳐대고 좋아한다. 음악회 프로필을 보면 가관이다. 전부 수석입학에 수석 졸업이요 다 장학금 받고 공부했으며 서로 경쟁하듯이 자신의 학벌과 스펙을 내세운다. 더 싫은 건 그게 그 사람의 본 모습인지 알고 이미지에, 학력에, 번드르르한 감언이설에, 잘생기고 이쁜 외모에 속아 환상에 빠져 맹목적인 추종을 하는 거다.

이런 모든 건 허상이다. 음악회에 사람이 100명이 오든 천명이 오든 별 감흥이 없다. 숫자에 집착하지 않고 대중들의 집결에 관심이 없고 태연 작약하다. 왜? 그렇게 많이 와봤자 진심이 통하고 음악을 음악 자체로 제대로 듣고 작곡가의 의도를 알면서 예술을 감상할 사람은 한 줌도 안될게 뻔하니까... 그래서 좋다느니 어떻다느니 하는 평가와 악플에도 무신경하다. 왜? 알지도 모르는 사람의 그냥 싸지르는 소리에 불과하니 왜 거기에 연연하는가.... 진정성을 담아 서로 소통하고 숫자놀음과 행위 이면에 있는 본질을 알아주는 사람과 같이 하고 싶다.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잡고 연설하면서 환호를 유도하고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천명, 만 명보다 진정 음악을 들어주고 알아주는 사람 한 명이 수십만 어중이떠중이 보다 낫다. 스포트라이트 받고 카메라 플래시에 취하고 칭찬과 박수 그리고 본질과 진실을 더욱 멀게 하는 괴성과 갈채는 정말 질색이다.

오늘도 교대에서는 담을 넘어 인공적인 스피커 소리가 고적한 가을의 정취를 방해하고 있다. 편의점에 모여 녹색파라솔 밑에서 소주를 까면서 밤늦게까지 술에 취해 온갖 욕설을 하면서 싸우는 사람과 자정이 넘어도 농구를 하면서 시끌벅적 악을 쓰는 재수생, 학원생들이 클래식과 예술을 알기나 할까? 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나를 낮추고 그들의 취향과 수준에 맞추면서 날 도륙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좋아하고 원하는 거 채워주면서 광장에 머릿수만 채워 넣으면 성공과 행복에 도달할 것일까? 그냥 베토벤 현악4중주 듣고 황병기 가야금 산조 들으면서 세속의 모든 번잡함을 끊고 법열에 취해 홀로 은둔하리.

사진제공: 시인 박시우
사진제공: 시인 박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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