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남자들의 압도적인 카리스마: Men of Steel

음악회 전 카운터 건너편 가판대에서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 전주곡집과 드뷔시 전주곡집 CD를 각각 2만 원에 판매하고 있었다. 살까 말까 망설이다 그냥 입장했다. 그리고 시작한 1부의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프로코피에프 피아노협주곡 2번은 마치 한 마리의 맹수가 포효하는 줄 알았다. 코뿔소 한 마리가 저돌적으로 달려오는지 알았다. 잔잔한 호수에 마치 토르(Thor)가 망치를 내려치며 천둥이 울리는 줄 알았다.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조성음악과 피아노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내몬 표현주의 양식의 최정점이었으며 그걸 연주한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압도적이었다. 실로 강철같은 타건과 야성미를 뽐냈다. 마치 루간스키를 위해 작곡된 곡처럼 완벽에 가까운 연주를 펼쳤다.

맹수의 포효와 같았던 강렬한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프로코피예프 연주
맹수의 포효와 같았던 강렬한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프로코피예프 연주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날카롭고 격렬했으며 급진적이었다. 1913년 초연 이후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도 날이 새파랗게 서 있다. 무섭고 저돌적인 곡이다. 협주곡이야 어려운 게 당연하겠지만 아마 브람스의 2번이나 라흐마니노프의 3번 협주곡만큼이나 또한 군데군데 보이는 리스트의 '초절기교연습곡'과 같은 류의 고난도 테크닉이 감히 범접하지 못하게 만든다. 니콜라이 루간스키는 견고한 강철을 녹이는 초인처럼 자유자재로 강철을 녹이고 포개고 부수면서 입체적인 프로코피예프를 만들어냈다. 1악장의 카덴차와 4악장의 카덴차에서는 '능숙'하다는 것이 어떤 건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본이었다. 듣는 내내 과연 루간스키 말고 이 곡을 이처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는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강철의 연금술사였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마치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마치고

1부의 프로코피예프가 너무 압도적이어서였지는지 쇼스타코비치는 악장이 거듭될수록 응집력과 긴장이 풀려갔다. 1악장이 가장 밀도 깊었다. 각 파트 주자들의 섬세한 음색과 기량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로 촘촘하다 섬세한 전개였다. 스탈린과 공산당으로부터 '민중을 저버린 버터 냄새나는 부르주아'라는 비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숙청의 위협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신념과 현실과의 아슬아슬한 타협이 1악장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에서 살아있다. 마치 조선시대 말기, 안동 김시 권문세족 일가에게 살아남기 위해 광인같이 살았던 흥선대원군의 모습과 와신상담이 느껴지는 다큐멘터리 같은 악장이었다. 10월의 같은 장소에서 티에리 피셔가 지휘한 생상스 3번 교향곡에서 스펙터클한 응집력을 선보인 서울 시향이었기에 그때에 비하면 서울 시향답지 않게 지나치게 금관 파트에서의 미스가 많고 악장 뒤로 갈수록 집중력이 떨어졌다. 타악에서도 실수가 나왔고 임계점에 도달하는데 추진력도 미진했다.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는 시대의 영겁을 끊어버린 쇼스타코비치의 강렬한 외침이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시대에 굴복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건 사소한 위장이다. 붉은색의 물결이 취주악과 함께 행진하지만 그건 죽은 자들의 허깨비에 불과하다. 아무리 강력하고 질긴 강철로 묶어버리려고 해도 쇼스타코비치는 끊어버리고 자신의 자유를 외친다. 그래서 오늘 음악회의 한 줄 평은 Men of steel, 즉 강철의 남자들이다. 그건 1부에서 시대를 앞서간 호전적인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작곡한 프로코피예프도, 고난도 협주곡의 견고함을 보란 듯이 풀어버리는 러시아 피아니즘의 정통파 루간스키도, 마지막의 세월의 풍파를 온몸으로 맞서며 시대의 소음을 뚫고 자기만의 목소리를 낸 쇼스타코비치 모두 강한 남자들이며 거인이다.

11월 23, 24일 양일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포스터
11월 23, 24일 양일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향 정기연주회 포스터

음악회를 마치고 루간스키에 감복해서 미뤘던 시디 구입을 위해 가판대로 갔더니 텅텅 비어있었다. 절판이었다. 강철의 연금술사에 압도당한 이가 어찌 나 혼자였으리.... 오늘(24일) 가시는 분들에게 귀띔한다. 필자를 전적으로 믿으시고 미리 시디를 구매하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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