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회 리영희상 수상자 선정, 권력과 거짓에 맞서온 위대한 진실정신

 

양심의 힘은 어떤 것일까? 어떤 거짓과 왜곡, 권력의 억압과 탄압에도 진실의 길을 가는 것일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하의 숱한 역사왜곡과 탄압들, 군사독재 정권 시기의 무차별적이고 폭압적인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 국정농단 시기 블랙리스트 탄압과 여론 조작 등 무수한 일이 한반도에서 벌어져왔다. 그런 억압과 거짓의 역사를 극복해온 중요한 힘은 진실을 추구하고, 권력의 무자비한 탄압과 거짓 여론조작과 같은 데 맞서온 도전정신일 것이다.

 

거짓말 마녀사냥, 졸라의 고발정신진실을 밝히다

양심의 힘을 보여준 사례로 흔히 드는 것이 드레퓌스 사건이다. 18941222일 적국인 독일에 군사 기밀을 팔아넘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프랑스의 유대계 육군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 사건은 당시 프랑스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제시된 증거는 범인의 필체가 드레퓌스의 것과 비슷하다는 점과 범인의 암호명이 드레퓌스 이름의 첫 글자인 'D'라는 것이 전부였으며 드레퓌스 본인이 혐의를 극구 부인했지만, ()유대주의 여론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하고 마녀사냥에 나섰다. 언론을 포함해 수많은 여론은 진실을 규명하기는커녕 법원의 판결을 일제히 환영하고 나서는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

그때 나선 양심적 지식인이 바로 프랑스의 문호 에밀 졸라였다. 그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글을 통해 군부가 자신들의 조작과 실수를 숨기고 있으며 드레퓌스가 명백한 무죄라고 주장했다. 졸라는 1898113일 클레망소가 펴내는 <오로르>(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공개서한을 발표했고, 이 신문은 그날 저녁까지에만 20만 부가 팔릴 정도로 폭발적인 반응을 받았다. 졸라는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부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주었다고 고발했고, 이를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크게 끌기 시작했다. 졸라에 대한 공격도 거세져 민족주의자들은 정부에 졸라를 재판에 회부하라는 압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졸라에 대한 재판은 189827일 시작되었고, 명예훼손죄로 1년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되었다. 드레퓌스 사건을 두고 극심한 대립과 갈등은 더욱 거세졌고, 무죄와 유죄를 주장하는 진영은 집회와 시위를 반복하며 사회적 갈등과 대립은 심화됐다. 결국 사건의 증거가 조작됐음이 밝혀지기 시작했고, 8년만인 19067월 법원은 이전의 판결을 뒤집고 드레퓌스의 무죄를 선고했다. 졸라와 같은 양심적 지식인이 없었다면 역사는 엄청난 과오를 저지른 채, 양심적인 군인을 사형에 처하는 죄업을 쌓았을 것이다. 진실을 추구하는 양심적인 이들의 존재가 왜 필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진실을 밝히는 정의의 힘을 믿고 실천하며, 무수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작가정신과 언론정신을 구현했던 작가 에밀 졸라(왼쪽)와 리영희 교수
진실을 밝히는 정의의 힘을 믿고 실천하며, 무수한 고난과 탄압 속에서도 작가정신과 언론정신을 구현했던 작가 에밀 졸라(왼쪽)와 리영희 교수

 

독재정권 맞선 민주언론 정신 리영희 선생의 기개

우리 대한민국을 빛낸 그런 양심과 진실의 인물을 꼽는다면 고 리영희 교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리영희는 6·25전쟁 당시 연락장교로서 7년간의 군복무를 마치고, 1957년부터 1971년까지 15년 동안 합동통신조선일보에서 일했으며, 1972년부터 1995년까지 한양대학교의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재직한 정통 언론인이자 언론학자다. 늘 진실보도와 실사구시의 철학을 중시했던 그는 1964년 아시아-아프리카(AA) 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조선일보에 썼다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면서 첫 번째 시련을 겪었다. 이후 3선 개헌 및 10월유신 등 박정희의 영구집권 음모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베트남 전쟁 파병과 국내의 민주헌정 파괴 및 사회정의 후퇴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는 한편 지식인의 집단적 선언활동에 참여하는 언론인의 기개를 보였다. 1971년의 위수령 발동 항의 시국선언’, 1974년의 민주회복 국민선언등이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대표적 선언활동으로, 그는 늘 진실보도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담은 민주언론의 가치를 중시했다.

늘 진실을 추구했던 언론인의 대표성을 가진 탓에 그는 정권의 탄압 아래 여러 차례 옥고를 치뤄야했다. 리영희와 시인 김지하의 투옥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가 더욱 거세지면서 1970년대 한국의 인권상황을 상징적으로 가리키는 사건으로 국제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는 1977년 자신의 저서인 전환시대의 논리, 8억인과의 대화, 우상과 이성이 반공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2년 동안 금고형을 받았고, 1984'국정교과서 내용 중 민족분열-반통일 지향 부분을 분석 조사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또 민주화운동 열기가 뜨거웠던 1989한겨레신문의 방북취재 기획에 참여했다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반년간 투옥되었다.

리영희는 늘 거센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진실의 길을 추구한 용감한 언론인이었다. 그는 늘 가장 존경받는 기자로 후배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당당하게 양심과 진실을 길을 평생 걸어갔다. 리영희는 저널리즘, 대학 강단, 저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와 저널리즘의 가치를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역사에 자리매김했다. 동굴 속의 독백(1999), 반세기의 신화(2000), 대화(2005), 리영희저작집(12, 2006) 등 수많은 저작과 글을 남겼으며, 늦봄통일상(1999), 만해상(2000), 심산상(2006), 단재언론상(2006), 한겨레통일문화상(2007) 등을 수상했다. 사후에는 그의 진실추구의 삶을 기리는 리영희상이 제정되어, 민주주의와 정의, 자유와 진실을 향한 투쟁과 도전을 해온 언론인들에게 수여되고 있다.

 

극우집단의 왜곡과 공격에 맞선 우에무라 기자의 진실 추구

리영희재단이 최근 제7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우에무라 다카시 전 아사히신문 기자를 선정한 것은 에밀 졸라와 리영희가 추구했던 진실추구의 정신과 양심의 힘이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녹음을 확보해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함으로써, 역사 속에 잠겨있던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국가적 반인도 범죄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이 공로로 제7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녹음을 확보해 위안부 문제를 최초로 보도함으로써, 역사 속에 잠겨있던 일본정부와 일본군의 국가적 반인도 범죄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다. 이 공로로 제7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사진: 기자협회보

 

우에무라 기자가 보도를 한 지 3일 후 용기를 낸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개최했고, 이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국내외 운동이 거세게 펼쳐졌다.

리영희재단은 수상자 발표를 통해 우에무라 기자는 1991년 군대위안부 출신인 김학순 할머니의 육성녹음을 확보해 일본제국의 군대위안부 실태를 확인하고 이 문제를 최초로 보도했다하지만, 1992년부터 그의 기사를 문제 삼기 시작한 일본의 우익집단은 2012년 아베총리의 집권을 계기로 그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높여왔다. 평화헌법을 부정하고 일본을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려는 일본 우익세력들은 위안부 문제를 통해 일본제국주의의 역사에 드리운 어둠을 드러내고,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반성을 촉구한 그를 2014년부터 날조기자라고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재단은 그가 전직하기로 한 대학에 압력을 가해 그의 취업을 막고 강사로 강의하고 있는 대학에 협박편지를 보내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딸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리고 비방 중상하는 등 가족에 대한 위협까지 가해 왔다그는 이러한 위협에 굴하지 않고 본격적인 싸움에 나섰다. 나는 날조기자가 아니다라는 책을 발간해 우익의 부당한 공격을 반박하고, 그를 비방하는 인사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도 전개하고 있다. 또 그에 대한 부당한 비방에 앞장서고 있는 우익언론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등 거대언론과도 다양한 언론매체에 대한 기고 등을 통해 줄기차게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재단은 또 최근에는 경영난에 처한 일본의 진보적 주간지 <주간금요일>의 발행인 직을 맡아, 우경화하는 일본에서 균형 잡힌 인식을 확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스스로를 평사원에 준하는 평사장으로 칭하는 그는 자원봉사 수준의 급여를 받고 매주 서울과 도쿄를 오가며 <주간 금요일>을 지키기 위한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재단은 리영희상 심사위원회는 그의 이러한 투쟁과 노력이 단순히 그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것을 넘어, 진실을 수호하고, 그 진실 수호에 불가결한 언론의 자유를 지켜내려는 노력이라고 판단했다역사 수정주의를 내세운 아베정부의 일본이 군대위안부 문제와 강제징용 문제 등 과거사에 대한 일체의 반성을 거부하면서 한일 간의 갈등이 고조시키고 있는 이 때, 우익의 폭력적 위협에 굴하지 않고, 역사의 진실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는 우에무라 기자를 성원하는 것은 리영희 선생이 평생을 바쳐 추구해온 동북아 평화를 위한 길이기도 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밝혔다.

우에무라 기자는 위원회에 보낸 감사인사를 통해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 수정주의자들이 마음대로 날뛰고 행동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려는 여러 가지 움직임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이런 와중에 리영희상을 받게 된 것은 지지 말고 힘내라는 한국 저널리즘계의 큰 격려라고 생각한다. 저를 응원해주시는 한국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린다고 밝혔다.

한편 리영희재단은 한평생 우리 사회의 거짓과 가면을 벗기고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혼신을 다했던리영희 선생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리영희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이나 단체를 가려 뽑아 리영희상을 시상해왔다. 시상식은 다음 달 4일 오후 630분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리영희 선생 9주기 추모행사와 함께 열린다.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상금 1천만원을 준다.

 

기레기 비판받는 한국언론, 반성과 성찰 통해 거듭나야

한국언론계는 갈수록 커지는 국민적 불신과 급변하는 언론환경으로 인해 대대적인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보도태도로 인해 기레기 파문이 커졌고, 주요한 사회 현안마다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진실을 외면한 속보경쟁과 인권을 무시한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보도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에 굴종하면서도 사회적 약자나 국민의 기본권은 외면하는 보도행태로 갈수록 불신이 커지고 있다. 우에무라 기자가 추구한 것처럼 또다른 진실이 문이 열리고, 정론직필의 길을 따르는 언론인들이 많아질 때 한국언론계는 새롭게 도약할 것이다. 우에무라 기자에게 뜨거운 축하를 전한다.

 

다음은 우에무라 기자가 밝힌 수상소감 전문

 

7회 리영희상 수상소감

-우에무라 다카시

 이번에 영예롭게도 리영희상을 수상하게 된 데 깊은 감명을 얻고 있습니다. 감사를 드립니다. 리영희 선생님께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저널리스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저는 생전에 리영희 선생님을 직접 만나 뵙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26개월 전인 20176, 리영희 선생님의 업적에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임재경 전 한겨레신문 부사장께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1977년 겨울, 리영희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됐을 때 한국에서는 언론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에 일체 기사가 안 나왔다. 나는 부끄러웠지만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을 찾아가 아사히신문 특파원에게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기사를 써달라고 부탁한 바가 있다.” 당시 임재경 선생님은 한국일보 논설위원이었답니다.

저는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조사를 해봤습니다. 당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은 오구리 게이타로라는 분이었습니다. 그는 임 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기사를 썼습니다. 1977210일자 아사히신문 국제면에 리영희 전 교수가 반공법으로 신병 송청(身柄 送廳)”이라는 제목의 3단 기사로 게재되었던 것입니다.“ 심각한 사상사건의 발생은 지식층에 충격의 파문을 확산시키고 있으며, 언론 자유 투쟁으로 대학과 언론계에서 추방당한 멤버들이 잇달아 항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 기사를 즉시 복사해서 임 선생님께 전달했습니다. 임 선생님은 40년 전의 기사를 보고 감개무량한 표정이었습니다.

저의 연구실 벽에는 리영희 선생님에 대한 언론탄압사건을 특집으로 다룬 경향신문(2017428일호)이 붙어있습니다. 기사가 나오자마자 그것을 벽에 붙여두었습니다. 기사 한복판에 1980년 석방 당시 사진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사모님께서 리영희 선생님을 껴안고 있는 모습을 한승헌 변호사가 웃으면서 지켜보는 사진입니다. 암흑의 시대에 양심을 지켜 글을 계속 쓰신 리영희 선생님의 모습은 저를 격려해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생전에 뵙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지만, 지금은 이렇게 연구실에 있을 때엔 매일 리영희 선생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저는 아사히신문 오사카 사회부 시기인 1991, 전 일본군 위안부가 증언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썼습니다. 전후 오랜 침묵을 지켜온 전시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올리기 시작한 사실을 한국언론에 앞서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들이 20여년 뒤인 2014, 저의 기사를 날조기사라고 비방중상 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우에무라 맹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전직이 결정된 대학에 날조기자를 고용하지 마라는 맹렬한 항의를 하고 인터넷상에서 저에 대한 비방중상을 반복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교수직을 잃었습니다. 심지어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장까지 대학에 송부되어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굴하지 않고 역사수정주의자를 상대로 법정투쟁과 언론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이 마음대로 날뛰고 행동하고 있으며 위안부 문제를 직시하려는 여러 가지 움직임에 대한 공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에무라에 대한 공격은 저의 문제만은 아닌 것입니다. 아베 정권하에서 고노담화가 무력화되고 일본의 침략전쟁에 따른 피해의 기억 계승작업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이런 위험한 풍조를 바꿔 나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서울에 있는 위안부문제를 전하는 광장 기억의 터모뉴멘트에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저도 이 말을 가슴에 새겨 행동할 것을 맹세하고 있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한 가지 보고 드리려고 합니다. 2017년 가을, 저는 신문노동조합연합과 일본저널리스트회의(JCJ) 동료들과 함께 저널리스트를 지망하는 일한 학생포럼을 시작했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학생들이 같은 곳에서 합숙을 하고 함께 취재도 하면서 서로 논의하는 시도입니다. 1차는 같은 해 11월 서울에서 진행했으며, 나눔의 집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차는 20188월 히로시마에서, 히라오카 게이 전 히로시마시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히라오카 전 시장은 신문기자 시절에 한국/조선인 피폭자문제를 기사로 하신 분입니다. 3차는 20192월 오키나와 나하에서 진행했으며, 올해 5월에는 광주 등을 방문해서 민주화의 역사를 배웠습니다.

내년 1월에는 규슈에서 조선인강제연행 문제를 배울 예정입니다. 동아시아에 친구를 가지고 기억을 계승하며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일본의 젊은 저널리스트들을 키우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일본은 매우 험난한 시기가 계속돼 있습니다. 재판은 삿포로와 도쿄에서 진행하고 있지만 1심은 모두 패소였습니다. 부당한 판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리영희 상을 받게 된 것은 지지 말고 힘내라는 한국 저널리즘계의 큰 격려라고 생각합니다. 저를 응원해주시는 한국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수상을 계기로 일본과 한국의 리버럴 세력의 교류가 한층 깊어지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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