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로

다 털어먹은 듯이 말아먹은 듯이
보면 볼수록 나 같다가 나 같잖고
너 같고 그눔 같다가
너 같잖고 그눔 같잖고
시무룩, 마침내 우리 본연에 다다른 듯
아주 하잘 것 없어라
멋들어진 녀석
구죽죽 비는 오고
마루 밑창 속
죽치는 날이구나
컹컹 짖을 염도 없이
저 고뇌에 빠진
고민에 가득 찬
그리움에 사무친
진지한 절실한 열렬한 치열한
실의에 빠진
허랑방탕한 모조리 탕진한 듯한
수염 난 녀석이여
시인 박사 교수 기사님 같고
농부 어부 술꾼 투사 배달부 같고
사무원 약초꾼 양봉업자 같고
중학생 대학원생 문학지망생도 같고
연인 노숙자 큰처남 작은처남도 같고
진종일 뺑이 친 듯한
실연당한 듯한
빵에 갔다 온 듯한
좀 불완전한 듯이
좀 부도덕한 듯이

 


시작 메모
계속 비가 온다. 구죽죽. 백석 시 비가 생각난다. <아카시아들이 언제 흰 두레 방석을 깔았나 어디서 물쿤 개비린내가 온다.> 짧고 좋다. 비에 대해서, 녀석 개에 대해서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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