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섬 경마장 건설에서 개장까지(1949~1954년)

1957년 안테나가 설치됐던 뚝섬경마장 모습 이 안테나는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전란의 와중에서 개막된 ‘뚝섬경마장시대’

마사회, 숱한 난관·우여곡절 끝에 착공 1954년 개장
경주마 자원 태부족 ‘조랑말경마시대’10년간 시행

■ 건설배경

그동안 마사회는 국방부와 미군당국에 수차 비행장으로 징발 사용중인 신설동경마장에 대해 징발해제 여부를 확인해 보았으나, 전황 중 신설동경마장에 대한 당장의 징발 해제는 어려울 뿐만 아니라 휴전회담성립 이후에도 징발이 쉽게 해제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마사회로서는 새로운 부지에 경마장을 신설하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농림부 역시 비공식적으로 새 경마장의 건설에 동의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이 무렵 판문점에서는 휴전협정이 계속되면서도 중부전장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으나, 국제정세는 전쟁을 휴전으로 종결짓자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성립될 휴전과 전면적인 수복이 이루어질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도 경마장의 건설은 마사회의 활로를 개척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새 경마장 건설의 필요성을 느낀 마사회는 뚝섬 일대 지역에 건설을 추진하기로 하였다. 뚝섬은 이미 경마장 건설예정지로 결정이 되어 있던 장소였다.
마사회의 전신인 조선경마구락부는 1930년대 말 신설동경마장을 이전하기 위하여 서울 성동구 성수동 1가 일대에 경마장 후보지를 매입하였고, 1940년대 초에는 매입지에 새 경마장을 건설할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이전추진 당시 지역소작농인 반발이 극심하였을 뿐 아니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구락부가 해산, 조선마사회가 이를 승계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계획이 무산된 상태로 1953년까지 이어져 왔다.

■ 착공에서 개장까지

주로 채소밭이었던 경마장 이전 후보지는 광복 후 1949년에 공포된 토지개혁법에 따라 3년 이내에 토지사용 목적을 변경하지 않으면 다시 분배농지가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당시 전쟁 중에 있던 마사회의 경마장 이전은 사실상 불가능했을 뿐 아니라, 시가지에 먼거리에 있는 뚝섬으로의 경마장 이전을 꺼리는 경향도 있어 그동안 토지 이전에 대한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
그 사이 소작농민들은 이 토지가 귀속농지라고 주장하고 줄기차게 분배를 요구하였고, 수차례 서울시에 농지사용 목적변경 연기신청을 낸 마사회는 경마장 개설공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마사회는 1953년 2월 26일 제35차 이사회의 결의를 거쳐 ‘뚝섬 서울경마장 시공에 관한 인가신청서’를 농림부에 제출하였다. 농림부는 이를 즉시 인가하였을 뿐 아니라 환도에 대비하여 1953년 가을부터 경마시행이 가능하도록 서두르라고 격려하였다.
농림부의 인가를 받아 뚝섬경마장의 건설을 서두른 한국마사회는 그 해 여름까지 43만여㎡(약 13만평)에 달하는 뚝섬의 경마장부지 중 11만 9,000㎡(약 3만 6,000평) 정도를 정지하여 주로와 관람대, 매표소, 사무실, 수도, 전기 등의 시설공사를 마무리 지어 가을까지 경마를 시행하겠다는 의지에 차 있었다. 연차계획으로는 시설을 보충하고 골프장과 수영장, 소공원 등을 갖추어 뚝섬유원지와 연결되는 종합 레저타운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착공까지는 몇 가지 선결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경작권 해약통지를 받은 소작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를 무마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공사비의 조달이었다.
가을에 개장을 하기 위해서는 정지공사비와 가건물, 수도, 전기, 전화시설비 및 종마구입금 등으로 약 1,000만환의 소요자금이 필요했으나 6·25 이후 장기 공백기를 거쳤던 마사회로서는 약간의 토지임대료가 수익의 전부였을 뿐 가용자금은 전무한 상태였다. 당장 정지공사나 가건축물을 시설할 자금도 확보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라 공사착수금을 확보하는 문제에서부터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우선 마사회는 이 해의 보리수확이 끝나는 대로 공사에 착수하기로 하고 1953년 3월 1일자로 소작농민들에게 경작권 해약통지서를 발송하였다. 소작농민들의 반대가 극심해지자 5월초에는 소작인대표 7명을 소집하여 경마장 건설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한편, 1차로 11만 9,000㎡(3만 6,000평)의 정지가 끝나는 대로 나머지 토지와 주로 내부는 다시 연고자에게 평균 1,652㎡(500평) 규모로 임대하겠다는 안을 내놓아 소작인들을 설득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마사회는 1952년 말 농림부에 불용토지와 불용건물의 매각승인신청을 제출하였다. 불용토지는 부산경마장 부지에서 미군이 사용하지 않고 있는 장외토지 약 2.862㎡(866평)와 서울 상왕십리에 사택건립부지로 확보되어 있던 약 1만52㎡(3,041평)의 토지 및 신당동 소재 사택 6동을 포함해 모두 8동의 건물을 매각한다는 것이었다.
이들 불용토지와 사택은 1953년 1월 15일 농림부의 인가를 받아 그 중 부산경마장 토지 2,862㎡(866평)를 마사회 부산임시사무소에서 공매에 붙여 16만4,540환에 매각하였다. 이것이 8·15후 마사회 재산의 첫 매각이었다.
나머지 서울의 사택과 상왕십리 토지는 1953년 5월 3일 서울 기도훈련소내 마사회 임시사무실에서 공매되었는데, 당시 농림부는 서울 소재 재산은 완전 수복 후에 매각할 것을 조건부로 승인하였다. 그러나 재정난에 허덕이던 마사회는 완전 수복을 기다리지 못하고 공매를 단행하게 되었다. 게다가 공매 후 상왕십리 토지 3,041평 중 2,621평이 마사회도 모르게 이미 농지로 분배되어 등기이전까지 완료돼 부동산소유권이전등기 말소청구소송을 제기하는가 하면, 매수자로부터는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당하는 등 후유증을 남겼다.
게다가 이 해 2월과 5월에 공매한 토지와 사택 매각대금은 183만여 환이었으나 그 중에는 계약만 하고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해약, 재공매, 소송 등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동안 마사회에 입금된 금액마저 임직원의 체불급료를 지불하고 임시사무실인 기도사무실의 시설수리 등에 이용되어 경마장건설에 투입할 자금은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마사회는 신규경마장 건설의 자금 확보를 위해 농림부를 통하여 정부보증융자 또는 산업자금융자를 신청하고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제출하기까지 하였으나, 정부 역시 전재복구에 다급한 때여서 경마장건설자금을 융자받기는 쉽지 않았다. 더욱이 1953년 2월 15일에 단행도니 통화개혁(원에서 환으로 100대 1 절하)으로 시중의 자금난 역시 심각한 상태였다.
결국 마사회는 사택매각대금 일부를 공사비로 삼아 1953년 7월 28일, 휴전회담이 조인된 바로 다음날 주로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른 새벽 불도저를 뚝섬벌에 진입시키면서 시작된 주로정지공사는 예상대로 소작농민들의 반대가 극심하여 아침마다 불도저 앞에 소작민들이 수십명씩 드러누워 정지작업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풍경이 연출되었다. 마사회 임직원이 총동원되었고 무장경찰과 상이용사까지 나서 소작민들과 공방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성동구 출신 국회의원까지 앞장서서 주로공사에 반대하고 매스컴에서는 소작농민들의 젖줄을 끊는다고 보도하는 등 정지작업을 진행하는 데에는 많은 애로사항이 뒤따랐다.
이러한 난관과 잡음 끝에 정지공사는 시작된 지 한 달 뒤인 8월 29일에 대체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관람대와 마사 등의 시설물은 여전히 은행융자를 받지 못하여 건설할 수 없었고, 결국 환도 수복기념으로 가을에 경마장을 개장하려던 계획은 해를 넘기게 되었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마사회는 1954년 1월이 되어서야 겨우 한국상공은행에서 우선 산업자금 200만환을 대출받게 되었다. 그러나 견적상 관람대, 사무실, 마사 등의 가건물에만 550만환이 소요돼 산업자금 200만환은 실제 시설 건립에 있어서 부족한 금액이었다. 마사회는 1차로 72만환에 가건축물 공사계약을 맺고 경찰에 건축허가원을 냈으나 지나치게 안전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허가가 나지 않아, 다시 보완하여 2차로 겨우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가건물공사로 목조가건물 관람대(65평)와 마권발매소(43평), 마사(165.5평) 등 최소한의 시설이 구비되어 비로소 뚝섬벌은 경마장의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조기단에서는 자력으로 또는 마주를 유치하여 경주마를 조달키로 약속하고 제주마 30두를 현지에서 구입해 해상운송한 것을 비롯해 광주·목포·전주 등지에서 재래마(복종마) 47두, 개량마 9두 등 모두 86두를 조달하였다.
이러한 난관을 거친 끝에 뚝섬 서울경마장은 1954년 5월 8일 개장하였다. 이로써 마사회는 만 3년 11개월 만에 6·25전쟁으로 중단된 한국경마의 맥을 다시 이을 수 있게 되었다.

■ 조랑말 시대와 외국산경주마 도입

뚝섬경마장이 새로이 개장하면서 우리 경마는 제주마가 경주마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다. 이른바 ‘조랑말시대’는 1965년까지 약 10년간 계속되었다.
전쟁으로 경주마(당시 200두 가량)가 대부분 도태되자 1954년 뚝섬경마장 개장 이후부터는 국내에서 조달 가능한 제주조랑말 등 국내산 재래종마를 경주마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1955년~1958년에 홍콩과 일본에서 개량마 200여두가 수입되면서 일부 개량마에 의한 경주가 시행되기는 하였으나, 조랑말이 경주마의 주종을 이루었으며 조랑말 경주는 개량마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시작한 6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54년 5월, 전쟁 중 미군이 일부 점용하고 있었던 경주목장이 종마 9도를 수용하면서 재개장하였으나 목장경영과 마필생산은 재정난과 부실한 운영관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뚝섬 개장초기에는 호주마 수입을 추진하기도 하였지만 원거리 수송난으로 실패하고, 1957년과 1958년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까운 일본에서 170두를 수입함으로써 최초의 수입개량마를 접하게 되었다.
당시 경주마는 변칙적인 개인마주제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마사회가 마필구입자금을 전혀 확보하지 못한 탓으로, 경마시행 시설은 마사회에서 책임지고 경주마는 조교사와 기수의 책임 하에 조달하는 형식이었다. 이 때문에 조교사·기수들은 외부에서 마주를 유치하거나 자기자금으로 마필을 구입, 타인의 명의로 등록하여 조교사·기수가 마주를 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1957년과 1958년 2차에 걸친 일본산 개량마 도입으로 마사회는 회마제(會馬制)와 개인마주제를 병행하게 되었다. 마사회는 일본산 개량마 170두를 도입하면서 고마(古馬)는 대부분 개인에게 매각하고 신마는 회마로서 마사회가 소유·관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후속도입이 이루어지지 않아 개량마 경주는 얼마 지속되지 못하고 닷 조랑말 위주의 경주로 돌아가게 되었다.

말산업저널기획취재팀

작 성 자 : 이용준 cromlee21@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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