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8일 뚝섬경마장을 방문한 故 박정희 대통령이 경마를 관람하고 있는 모습
최현우 마주 기고문

원래가 진지한 사람이다. 춤을 춰도 진지하고, 노래를 불러도 진지하​고, 연기를 해도 진지하다. 공부도 진지하게 한다. 유명대학 교수다. 그런 그가, 내가 승마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조심스럽게 경마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경마에 입문하기 전이다. 재미있게 들었다. 말미에 더 진지해지더니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경마 이야기를 오해 없이 들어주시고, 이해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동안 아무에게도 이야기 못 했어요"
이게 뭔 소린지 당시엔 몰랐다. 그는 대학 ​다닐 때부터 경마를 했단다. 미친 듯이 공부했고, 지금은 우승확률과 상관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말만 응원한단다. 베팅으로 잃는 건 개의치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경주마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대학 다니는 우리 둘째도 경마한다. 그 대학 다니며 학생회장에 입후보했던 그의 선배도 경마를 즐긴다. 이 교수처럼, 둘째도, 둘째의 선배도, 나도 어디 가서 경마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이젠 이런 상황이 낯설지 않다. 내가 경마에 빠져 있다는 걸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알고 있는 사람은 동성애자 커밍아웃하듯 자신의 경마이야기를 꺼낸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내밀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말미에 진지하게 말한다.
"경마 이야기를 마음 놓고 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고맙습니다." ​

용산 화상경마장이 지역주민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화제가 되었을 때, 유명 일간지에 눈에 띄는 칼럼이 있었다. 화상경마장의 법적 지위와 도박피해자 모임의 입장, 화상경마장 승인과정, 도박에 빠진 서민의 모습, 용산 화상경마장 개장과 관련한 각계의 의견을 정리하고 우려를 표명했다. 학생들이 최악의 환경에서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학교 가는 길`은 `경마장 가는 길`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마무리 했다. `경마장 가는 길`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나쁜 길이라는 취지다.

그분께 편지를 썼다. 내게는 아들이 둘 있고, 주말이면 아들과 아들의 여자친구를 경마장으로 초대한다는 것, 내가 아는 지인들도 경마장에 초대하고 그분들의 어린 자녀도 초대한다는 것, 모두들 즐거워하고, 경마를 즐기는 법을 배운다는 것, 도박중독을 걱정하는 부모님은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는 것, 칼럼을 쓴 분과 다른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경마는 죄악`이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어서 드리는 말씀이며 장황하게 설명 드리는 것보다, 제가 보내드리는 사진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봐 주셨으면 한다는 내용이다. 사실로는 인식을 대항할 수 없는 법이지만, 사진이 주는 인상은 강렬했고, 칼럼을 쓴 이는 마음이 열린 분이었다. 경마를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경마를 바로 보고 이해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경마에 대한 홍보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조언을 해주셨다.

내가 그에게 보낸 사진이 뭐였냐고? 여러분도 같이 보시기 바란다. 첫 번째 사진은 2013년 6월 런던에서 있었던 로얄에스콧 골드컵 경마장 사진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너무 좋아하신다. 입이 귀에 걸렸다고 외신은 전한다. 경마장의 로얄박스에 계신다. 여왕의 말 `에스티메이트`가 이 경주에서 우승했다. 시상식을 하면서, 여왕은 기수를 졸졸 따라다니며 경기에 대해 묻는다.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영국의 귀족, 정치인, 기업인이 모두 경마장에 모였다. 경마장에는 관중이 꽉 찼다. 모두들 정성껏 차려입고, 특색있는 모자를 쓰고 경마장에 나왔다. 유서 깊은 앱섭더비는 여왕 내외의 경마장 입장과 함께 시작된다. 여왕 재위 60주년 기념행사의 하이라이트도 경마 경주였다. 영국 여왕은, 영국의 정치인은 국민 모두를, 영국의 모든 길을 경마장 가는 길로 만들고 있다.

두 번째 사진은 우리의 을지로쯤 되는 일본 동경의 유라쿠쵸역 광장이다. 우리로 치면 `을지로 기념 경주`를 홍보하는 행사다. 거리를 8만 5천 개의 녹색 LED로 장식했다. 경마를 홍보하는 전광판으로 덮었다. 젊은이들, 학생들은 모형 경주마에 올라서 기수가 되는 체험을 한다. 재팬더비가 열리는 시즌이면 이들이, 경마장 입장권을 사기 위해 수 킬로의 텐트촌을 만든다. `만난 지 1,000일 기념으로 여자친구에게 더비 경주를 보여주려고`, 또는 `아들이 기말고사에서 성적이 오르면 더비 경주를 보여준다고 약속했다`는게 이유다. 천황배경주는 천황 내외가 직접 참관하고, 우승한 말과 기수의 하례를 받는다. 경주 때는 경마장에 발디딜 틈이 없다. 일본의 학부모, 천황은 전국민을 `경마장 가는 길`로 내몰고 있다.

세번째 사진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이다. 1966년 뚝섬경마장을 찾았다.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베팅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이후 경마장을 찾는 대통령은 없었다. 이전에는 김구 선생이 매주 경마장을 찾았다. 열렬한 경마팬이었다. 김구 선생도, 박정희 대통령도 국민을 `경마장 가는 길`로 인도했다.

한해 경마공원과 화상중계소를 찾는 경마인구는 연인원 2,000만명에 가깝다. 2,000만명이다. 주말 하루 평균 20만명이 즐긴다. 프로 야구, 프로 축구와 비교할 수 없다. 주 5일 25경기가 열리는 프로야구가 연인원 700만 명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경마를 King of Sports라고 부른다. 스포츠의 왕이다. 월드컵이 생기기 전에는 그랬다. 관중 숫자에서 다른 스포츠를 압도한다. 20만 명의 국민이, 연인원 2,000만 명이 즐기는 스포츠를 범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 세수 기여도에서도 압도적이다. 연 8조 원의 매출 중, 적게는 22%에서 많게는 40%의 세금을 낸다. 한해 경마팬이 납부하는 지방세만 1조 976억 원이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다음으로 많은 세금을 낸다. 이 돈이 축산발전과 지방재정, 불우이웃을 위한 봉사자금으로 쓰인다. 그러고도 경마하는 사람들은 범죄인 취급을 당한다.

도박이니 그렇다고? 1만 원 이하로 경마를 즐기는 사람이 71.2%다. 나도 한 경주에 2,000원, 하루 2만 원 내에서 베팅한다. 로또 4장 값이다. 문제가 되는 10만 원 이상 베팅꾼은 백 명 가운데 세 명이다. 이 3%의 도박꾼이 97%의 경마팬에게 도박꾼 딱지를 쓰게 만든다. 경마하다 파탄이 난 사람을 주위에서 여럿 봤다고? 합법적인 도박을 못하게 하면 이들이 도박을 포기할 것 같은가? 화상경마장, 서울경마공원에서는 10만 원 이상 베팅하지 못하게 되어있다. 파탄이 날 경마는 불법사설도박판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경마는 베팅이 주가 되는 것 아니냐고? 맞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비난할 수 없다. 현대 대중이 즐기는 스포츠 가운데 베팅에서, 도박에서 자유로운 스포츠는 없다. 월드컵이 그렇고, 프로 야구가 그렇고, 프로 축구가 그렇고, 프로 농구가 그렇고, 프로복싱이 그렇다. 베팅과 보여 주는 프로스포츠의 속성이 혼재해 있다. 유럽의 축구와 미국의 프로 복싱은 어느 것이 우선인지 구분이 어렵다. 다른 스포츠는 즐기는 것이 먼저이고, 베팅은 부차적인 것 아니냐고? 경마도 초기에는 그랬다. 즐기는 것이 먼저였다. 그걸 보는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내기를 시작했다. 지금도 세계 최고의 경마대회, 두바이 월드컵은 베팅을 하지 않고 경주만 즐긴다. 그럼 재미가 있냐고? 전 국민이 즐기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들은 말한다.
"베팅해야 경주가 재미있다고 하죠? 베팅하지 않고 봐도 정말 재미있어요."

이 땅에서는 가장 많은 사람이 즐기고, 가장 많은 세금을 내면서, 건전하게 즐기는 경마팬이 성적소수자보다 못한 대접을 받고 산다. 해외에서는 왕들의 스포츠, 귀족들의 스포츠, `경마의 격이 국가의 격`이라고 평가받는 경마를 사회악의 총합으로 간주한다. 텔레비전 중계도, 광고도 금지되어 있다. 규제로 2중, 3중으로 철벽을 쌓아 놓았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경마팬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다. 경마를 즐기지 않는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음에도, 기피와 비하의 대상이 된다. 20만 경마팬은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음지에서 남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한다. 이 땅에서 경마하며 사는 죄다. 그게 싫으면, 그게 참지 못할 것이라면 그만두면 되지, 왜 하지 말라는 걸 꾸역꾸역 하느냐고?

"재밌어서 그런다. 너무 재밌어서....."



작 성 자 : 권순옥 margo@krj.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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