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의 태동에서 시작된 부정적 인식

경마가 우리나라에서 시작된 것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정책에 의해서였다. 기미독립운동 이후 일제가 한반도 강점 정책을 강압정치에서 문화정치(우민화정치)로 전환하면서 시작되었다. 1922년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가 설립인가를 받으면서 그해 5월 20일 한강철교 밑의 백사장에서 새끼줄을 쳐놓고 경마를 시행함으로써 현대경마가 시작되었다. 현재와 같이 마권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은 1923년으로 당시 경성 춘계 경마대회에서 마권판매를 공인하여 경마에 돈을 걸 수 있게 되었다.

일본은 한반도에 경마를 접목시키면서 2가지 목적을 노렸다. 그 하나는 경마를 통해 국민들을 우민화시켜 독립운동을 말살하려는 것이었고 또 다른 목적은 만주 등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병참기지화로 군용마를 생산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후 일제 강점에 신음하던 국민들은 경마에 열의를 보임으로써 전국적으로 경마구락부가 활화산처럼 생겨나게 되었다. 1924년 평남레이스 구락부가 설립인가를 받은 것을 시작으로 대구경마구락부, 국경(신의주)경마구락부, 부산경마구락부, 군산경마부락부 등이 속속 생겨나 전국적인 경마시행이 이루어졌다.

1928년에는 신설동경마장(경성경마회)이 준공되면서 신설동경마장 시대가 개막되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각 지방의 경마구락부를 한데 묶어 조선경마회가 1933년 1월1일부터 활동을 했고, 1942년 조선마사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초대회장으로 일본인 시뢰원조가 임명되었다.

이 시기가 한국경마의 외형적 중흥을 이룬 시기로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일본인이 주도한 경마는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다. 1941년 군산 경마장이 운영난으로 폐쇄된 것을 계기로 신의주, 웅기, 함흥, 청진 경마장이 3년 사이에 폐쇄되었고, 45년 춘계까지 경성, 평양, 부산, 대구만이 경마를 시행하였다.
1945년 해방을 맞이하면서 조선마사회가 일본인 손에서 한국으로 인수되면서 그해 11월 조선마사회를 한국마사회로 임의 개칭하고 초대 한국마사회장에 나명균씨가 임명되며 드디어 한국경마가 시작되었다.

1949년 9월 28일 농림부에서 조선마사회 회명 변경을 인가하면서 현재의 한국마사회가 태어났다. 본격적인 틀을 갖춘 한국마사회는 이전에 시행되던 조선마권세령을 폐지하고 새로운 마권세법을 공포하였으나 6.25동란 발발로 인해 경마를 중단하게 되었다. 동란으로 중단되었던 경마는 1954년 5월 5일 뚝섬 서울경마장이 개장되면서 만 3년11개월 만에 재개되었다.

그동안 시행되었던 지방경마(부산, 대구)는 1961년 지방경마장을 매각함으로써 종말을 고하면서 한국경마는 뚝섬경마장만이 남게 되었다. 한국마사회는 1966년 민간자본(덕마흥업과 시설투자 계약)을 유치하는 등 성장을 위한 발판들을 마련하였다. 1968년에는 국지적인 경마에서 탈피해 한국, 미국, 일본, 호주, 필리핀, 말레이지아 등 6개국이 참가하는 제1회 아시아국제 친선경마대회를 개최하였고, 1970년에는 아시아경마협회(ARC)에 가입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경마를 시행할 수 있게 됐다.

한국경마가 부정적 편견에 갇혀 헤어나지 못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모순에서 원초적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처음 태동부터 일본이 식민지를 강점하기 위한 정책으로 경마를 접목시켰고 여기에 지식인들의 반발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으며 잦은 부정경마가 발생하는데다 언론의 왜곡 과장보도가 이어지면서 편견은 심화되었다. 한국에서는 경마가 사행산업의 대표주자로 지탄을 받고 있는 가운데서도 세계적으로 120여 국가에서 경마를 시행하면서 중요한 국가의 산업으로 육성하고 있다. 현대경마의 특징은 서러브레드(Throughbred)라는 단일혈통의 경주마로 경마를 시행하기 때문에 세계와 경쟁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우수한 경주마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경마산업 정책이다.




작 성 자 : 김문영 kmyoung@krj.co.kr
저작권자 © 말산업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