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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여기 젊은 년 하나 들어오지 않았나?” “얘, 너는 싸움도 못 하니? 그러면서도 남자니?”

[박인 스마트 소설] 봄날 오 분

2019. 04. 08 by 박인 작가
▲ 『Tweet』 1120×1620㎜, Mixed media. 박인作
▲ 『Tweet』 1120×1620㎜, Mixed media. 박인作

 

개나리가 활짝 핀 봄날 오후였다. 군대 가려고 휴학하고 입영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자 시집간 누이는 저녁이나 먹자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누이 집은 도시개발이 막 시작되던 서울 변두리 단독주택이었다.

누이는 저녁거리를 사러 시장에 가고, 나 혼자 안방에 누워 빈집을 지키며 빈둥거렸다. 봄기운이 뻗치는 날, 애인 하나 없이 방구들을 지고 있자니 옆구리가 허전하고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이런 날은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추거나 공상에 빠져야 제격이었다. 나는 비틀즈와 퀸 음악을 졸면서 들었다.

갑자기 현관문을 다급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여니 화사한 원피스 차림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삼십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무슨 화급한 일이라도 닥친 것처럼 문안으로 뛰어들었다.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잘 빠진 여자가 내게 말했다.

“동생, 저 좀 숨겨줘요. 내가 이 집 지하에 살아요. 나쁜 놈들이 지금 쫓아오고 있어요. 묻거든 그런 여자 없다고 말해요.”

그녀는 내가 누웠던 방안으로 급히 숨어버렸다. 한순간 나는 멍한 얼굴로 서 있었다. 뒤이어 다시 현관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사내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사내는 덩치가 곰처럼 크고 다른 사내는 어깨가 다부지고 살쾡이처럼 몸이 날렵했다. 주먹깨나 쓰면서 살아온 듯 험악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여기 젊은 년 하나 들어오지 않았나?”

팔뚝에 용 문신을 새긴 곰이 주먹을 흔들며 반말을 했다.

"무슨 일입니까. 여기 그런 사람 살지 않아요."

나는 어느새 그녀를 보호하고 숨겨줄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없던 의협심도 불러와야 했다. 햇살은 내리고 아지랑이는 어지럽게 피어오르는 봄날이었다.

“아 제기랄, 이 집 지하에 살고 있다던데. 당신 거짓말하면 다쳐. 난 성질이 더럽거든, 퉤.”

다부진 사내가 침을 뱉고 나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벌건 대낮에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무슨 행팹니까?”

무단 침입한 주제에 하는 수작들이라니. 나는 드세게 나갔다. 이번 기회에 두들겨 맞아서 진단서 끊고 병원에 누워있는 게 하릴없이 군대에 끌려가는 것보다 훨씬 낫지 싶었다. 그렇지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법.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시간을 벌기로 했다. 남는 건 시간이었고,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시간뿐이었다. 오 분 정도 두들겨 맞거나 오 분 정도 시간을 벌어서 아름다운 그녀에게 바치는 것은 어떨까.

오 분 안에 사내들을 호기롭게 때려눕히고 그녀에게 개선장군처럼 다가가는 나를 상상했다. 내 일생에서 오 분이 아니라 오십 년을 그녀에게 바쳐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오 분이면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만약 그녀가 시간이 있냐고 물어온다면 나는 원하는 만큼 드리겠다고 답하리라. 봄꿈이라도 꾸는 걸까.

“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기둥서방인가. 너 오늘 임잘 만났다. 그년이 떼먹은 천만 원 네가 갚을래 말래.”

나는 곰의 완력에 떠밀려 멱살을 잡히고 담벼락에 오징어포처럼 눌어붙었다. 발길질했으나 허사였다. 곰의 주먹을 명치에 맞은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정의감 불타는 청춘이 주먹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제압당한 꼴이라니. 내가 곰에게 눌려 버둥거릴 때, 날렵한 살쾡이는 지하실 문을 따고 들어가서 그녀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여우가 발랐네, 살쾡이가 소리쳤다.

그녀는 지금 누이 방에 꼭꼭 숨어있을 터였다. 부엌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그녀에게 알려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잠시 후 살쾡이는 노트북과 큰 가방 하나를 챙겨 곰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바닥에서 일어나 구겨진 옷매무새를 바로잡았다. 물론 바지춤을 올리며 땅에 떨어진 체면을 바로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녀를 위해 두 사내를 쫓아 내보낸 게 그나마 천만다행임을 위안으로 삼았다.

여자를 살피기 위해 누이 집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기 없었다. 여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건넌방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 그녀가 서럽게 울자 나는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여자는 나를 흘겨보더니 매몰찬 손길로 내가 건넸던 손수건을 집어 던졌다. 그리고는 작은 주먹을 흔들면서 내게 말했다.

“얘, 너는 싸움도 못 하니? 그러면서도 남자니? 태권도 안 배웠어? 이단옆차기 돌려차기로 놈들을 밟았어야지.”

“조…. 조폭들이랑 싸…. 싸워봐야 승산이 어디 있나요.”

나는 수치심에 말을 더듬었다.

“내가 남자라면 그 새끼들을 죽일 듯이 패서 골로 보냈을 거야. 허우대만 멀쩡해서 꼴에 남자라고 말대답은 제법 하네. 여자 하나 지키지도 못하면서.”

여자는 나를 타박하더니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나가버렸다. 이 모든 게 오 분 동안에 벌어졌다. 따스한 봄볕이 나를 어루만진 오 분 사이에 말이다. 나는 억울해하며 거실에 멍하니 서 있었다. 위장에서 무언가 비릿한 것이 역류했다. 나는 변기에 머리를 박고 토하기 시작했다. 까닭 모를 눈물이 흘렀다.

어느 연놈이라도 오늘 잘못 걸리면 바로 제삿날이다. 나는 주먹을 쥐고 눈물을 닦았다. <끝>
 

박인 작가의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스마트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을 말합니다. 『문학나무』 신인상을 수상한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한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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