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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등을 타고 흘러내리다 허리에서 사라진 달빛이 엉덩이에 걸려있었다. 펄의 작은 몸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엉덩이는 방안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박인 스마트 소설] 그날의 흑진주

2019. 04. 22 by 박인 작가
▲『The Tree of Karma-Night』 1120×1450㎜,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The Tree of Karma-Night』 1120×1450㎜, Acrylic & Mixed media. 박인作

그날 이후 나는 금발 머리가 무서웠다. 풍만한 리즈의 가슴은 내 결핍된 모성애를 자극했지만 살찐 엉덩이는 느낌이 달랐다. 금발이 매력적이어서 그녀 방으로 따라갔었다. 그녀와 나는 서둘러 옷을 벗었다. 침대에 누운 여자 넓적다리에 붙어있는 하얀 살이 보였다. 그녀 허리에 삼겹살로 접힌 비곗덩어리가 마치 목구멍에라도 걸린 것처럼 내 가슴은 체증으로 타올랐다. 침대에 눕자 살덩어리에 짓눌려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남겨온 와인 반병을 들고 전부 마셔버렸다. 다리와 다리 사이 계곡이 금빛으로 접혀있었다. 거대한 엉덩이에 기죽은 내 성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고백하건대 당시 나는 백색에 주눅이 들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맨체스터시티 위성도시에 있는 지방대학에서 계절학기 수업을 받으려고 대학기숙사에 일주일 정도 지냈을 무렵이었다.

원래 나는 마른 여자의 갈비뼈를 좋아했다. 갈비뼈의 수평 구조는 어깨 빗장뼈와 더불어 인간의 직립보행을 더 완벽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뼈를 드러낸 마른 여자는 겨울나무 골격을 바라보는 것처럼 아름다우면서 쓸쓸한 느낌이 들었다.

수강생 중 내 마음에 들어온 그녀 이름은 펄이었다. 흰색은 크게 보이고 검은색은 작아 보이는 착시 때문이랄까. 펄은 북아프리카 모로코가 고향인 작고 쾌활한 여자였다. 작은 나무 실루엣 같은 그녀는 내게 친절하기까지 했다. 검은 마스크 안에 백인이 숨어있다고 믿고 싶을 정도였다. 펄의 얼굴은 검은색을 지우면 당장 백인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와 나는 과제를 함께 준비하느라 금방 가까워졌다.

그날은 겨울방학이라서 기숙사는 거의 비어있었다. 추운 겨울 캠퍼스, 나는 유일한 황인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오는데 리즈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하루 아홉 시간씩 모두 9학점을 이수하느라 녹초가 된 늦은 오후였다. 수업이 끝난 후 마시는 흑맥주 한잔에 천국이 보일 정도였다.

“오늘 나랑 저녁 먹을래?”

금발이 내게 물었지만 나는 뒤를 둘러보았다. 주변에 잘 생긴 백인 남자를 찾기라도 하는 걸까. 그녀는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래 너, 너라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웃었다.

“그래 먹자. 뭐든.”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리즈가 왜 저녁을 먹자는 걸까. 임상 실습을 나간 병원에서 교수 몰래 술을 마시고 취한 척 금발을 끌어안고 춤을 춘 적은 있었다. 사실 나는 유일하게 시드니에서 유학 온 동양인이라서 그런지 기숙사도 냉장고가 있는 삼층 방을 따로 썼다. 삼백 년 묵은 기숙사 회랑을 나 혼자 독차지했다.

밤마다 나는 백인 유령들의 방문을 받았다. 밤 열두 시가 넘으면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복도를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는 어둠이 앞을 가로막았다. 방문을 닫고 침대에 누우면 다시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잠을 제대로 못 자고 레인지에 돌려먹는 즉석식품에 물릴 무렵이었다.

“어디서 무얼 먹을까?”

허기진 나는 물었다. 리즈는 더블린에서 왔지만 셀포드에 친구를 만나러 온 적이 있다고 했다.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고 선술집에 들러 맥주를 마시며 그녀와 잡담을 나누었다. 한쪽 구석에서 볼멘소리가 들렸다.

“세상 좋아졌네. 눈 찢어진 놈이 블론드와 기니스도 마시고.”

기름에 튀긴 음식을 먹고 맥주 배가 나온 동네 아저씨들이었다.

“고개 돌리지 마. 나만 보고 있어. 정말 쓰레기들이야.”

리즈가 내 눈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키가 큰 금발여자에게 보호받으며 앉아있자니 편치가 않았다. 리즈와 나는 거리로 나왔다. 펄은 그 많은 참고문헌을 혼자 읽고 있을까. 과제 준비에 급한 내 마음은 펄에게 가고 있었다. 캠퍼스로 올라가는 도중 리즈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영국식으로 말하자면 여자가 남자에게 저녁 식사를 둘이서 하자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야.”

“특별한 의미?”

나는 심장이 요동쳤지만, 부러 딴청을 피웠다.

“사실 난 한국 남자하고는 자본 적이 없거든.”

생각하니 나도 금발여자와 잠을 잔 적이 없었다. 그믐달 아래서 나는 리즈에게 키스를 하고 그녀 방으로 갔다. 맹세컨대 그날 금발 머리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신이 떠나버린 지구, 이 지구의 영국 맨체스터, 지방대학 기숙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들 누가 과연 콧방귀나 뀌겠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그날 밤 열두 시경. 방으로 돌아와 곯아떨어진 나는 건장한 백인 남자 귀신에게 폭행을 당했다. 목이 졸리고 숨이 끊어질 찰나, 깨어났다.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 삼층 회랑을 울리며 내 방문을 다시 두드리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 펄이었다. 나는 불이 꺼진 방을 기어가서 문을 열었다. 어둠에 익은 내 눈은 검은 그녀를 찾고 있었다. 달빛이 창문을 타고 들어와 내 어깨를 짚고 펄의 눈으로 흘러갔다. 별빛으로 변한 그녀의 두 눈이 깜박거렸다.

“오늘 리즈와 즐거웠어?”

펄은 화가 난 듯 내게 물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거짓말!”

펄은 웃었지만 두 눈 속 별들이 흔들렸다.

“펄, 내 말 믿어. 여자와 좋은 일이 생겼다면 바로 너 때문일 거야.”

그녀는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는 그녀 눈 안에서 별들이 난동을 부리기 전에 방안으로 그녀를 잡아당기고 서둘러 문을 닫았다. 달이 구름에 숨어버린 사위는 조용해졌다. 나는 어둠 속에서 그녀를 찾았다. 흐린 달빛이 서리가 앉은 창문으로 들어왔다.

펄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나는 침대로 걸어가다가 화들짝 놀랐다. 이불을 걷어낸 자리에 알몸인 그녀가 엎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온 달빛이 그녀 왼쪽 어깨에 내려앉아 보석처럼 반짝였다. 등을 타고 흘러내리다 허리에서 사라진 달빛이 엉덩이에 걸려있었다. 펄의 작은 몸에서 힘차게 솟아오른 엉덩이는 방안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순간 기숙사에 사는 일주일간 내가 만났던 모든 유령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마른 나무줄기 몸에 생명을 키워낸 튼실한 검은 엉덩이가 흰색에 주눅 들린 내 황토색 성기에 닿자 나는 사시나무처럼 떨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생명을 기리는 흑진주였다. <끝>

박인 작가의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스마트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을 말합니다. 『문학나무』 신인상을 수상한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한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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