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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나는 카드를 내밀었다. 잔액 부족이라고 결제가 나질 않았다. 얼굴이 붉게 물든 주인 사내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나는 똥물에 젖은 돈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공손하게 내밀었다.

[박인 스마트 소설] 한국은행권 수난사

2019. 04. 29 by 박인 작가
▲지리산 골짜기에서 서울로 가는 여비를 마련해야 했다. ⓒ박시우
▲지리산 골짜기에서 서울로 가는 여비를 마련해야 했다. ⓒ박시우

산은 깊을수록 푸르다. 깊고 푸른 산골로 들어가 세상을 등지고 홀로 살던 나는 어느 날 문득 사람이 그리웠다. 지리산 골짜기에서 서울로 가는 여비를 마련해야 했다. 태어나서 처음 소설을 써서 원고료를 받았다. 부지런히 써도 한 달 수입이 10만 원을 겨우 넘었다. 지인들이 보내주는 쌀과 지천으로 널린 나물과 약초를 캐서 근근이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사실 돈이 필요 없었다. 내가 돈을 멀리했는지 돈이 나를 피해 달아났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내가 돈보다 더러운 법 없이도 살 수 있으니 돈이 무슨 대수라, 했다. 가끔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는 사람처럼 한국은행권이 절실하기도 했다마는 뜬구름과 산바람에 잡념을 흘려보내면 그뿐이었다. 은하수 아래 벌거벗고 서면 빈부귀천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한 달 동안 단편소설 한 편을 겨우 써서 받은 돈이 30만원. 정승처럼 쓰리라 마음을 먹고 서울로 가는 버스 안에서 머리로 가계부를 쓴다. 10만원을 여비와 식비로 책정하고 10만원으로는 그동안 친구들이 치른 술값을 이번에는 기필코 내가 갚으리라 다짐했다. 그러고도 남은 10만원을 가지고 청계천에 가서 중고 음반 몇 장을 사고 밑반찬도 사기로 하였다.

나름대로 청산에 살던 나는 서울의 인파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도망간 여자나 처절한 시인 몇이 보고 싶어서 올라왔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과 차와 건물과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 인해 골머리가 지끈거렸다. 매캐한 미세먼지를 마시며 청계천과 낙원상가에 들러 조앤 바에즈와 요절한 가수 음반 몇 장을 샀다. 이 세상을 건너가는 동안 음악이 나를 위로해 주지만 술보다 더 나은 친구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서둘러 마포로 가서 작가들 회의를 구경했다. 나처럼 하릴없이 강 건너 불구경하는 술친구 둘을 불러냈다. 해가 떨어지자 오늘 받은 따끈한 원고료로 소주 한 잔을 사겠노라 큰소릴 쳤다. 원고료로 술을 마신다는 오래된 전설을 듣자 작자 4명이 내게 달라붙었다. 허름한 횟집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풀만 먹다가 오랜만에 먹는 광어회와 소주는 혀에 착착 달라붙었다. 에라 모르겠다, 술이 들어가자 한층 기운이 오른 나는 회 한 접시를 더 시키고 술을 마구 시켰다. 먹다 죽은 귀신이 되고 싶었다. 배부른 귀신은 때깔도 곱다지 않은가.

“맘껏 먹어라.”

나는 호기롭게 소릴 질렀다. 내일이나 언젠가는 손에 쥘 원고료를 미리 당겨서 먹자는 심보였다. 취한 시인 친구가 술집 주인과 서비스가 엉망이라고 말싸움을 하는 사이 한 작자는 한오백년을 불렀다. 술집 주인 사내는, 젊을 때는 주먹깨나 썼는데 이젠 참는다 참아, 구시렁대며 이빨을 내보였다. 위생 관념이 없는지 콧구멍을 후빈다.

배탈이 난 나는 화장실로 갔다.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기 전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비상금 5만원을 꺼내다 변기에 빠뜨렸다. 물을 내림과 동시에 손을 넣어 돈을 꺼냈다. 물에 대충 씻어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친구들이 집으로 가고 혀가 꼬부라진 시인과 내가 남았다. 근황은 물어보나마나 전업 시인은 차비조차 없어 보였다. 안 받겠다는 손사래에 우선 만 원짜리 두 장을 쥐어주고 남은 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셨다.

나를 버리고 도망간 여자를 용서했지만, 술을 남기고 사라지는 작자들은 용서할 수가 없다. 생활력이 떨어진 남자를 두고 돈벌이에 능한 사내를 따라가는 여자를 욕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혼식 날짜까지 잡고 방송국 작가 생활을 하며 꿈을 키워가던 시절이었다. 술은 여자처럼 나를 아직 버리지 않았다.

“김유신은 천관녀를 찾아간 자신의 애마를 왜 죽였을까?”

시인이 말했다.

“대의를 위해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게 사내의 모습이니까.”

내가 말했다.

“아니야. 그놈의 백마가 암말인데 천관녀의 발정 난 수놈 말에게 넘어간 게야.”

시인이 말했고 나는 허전한 듯 웃었다.

▲청산은 나더러 푸르게 살라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마냥 푸르게 있겠는가. ⓒ박시우
▲청산은 나더러 푸르게 살라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마냥 푸르게 있겠는가. ⓒ박시우

시인마저 집에 가고 나는 계산을 해야 했다. 20만원이 넘게 나왔다. 나는 카드를 내밀었다. 잔액 부족이라고 결제가 나질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얼굴이 붉게 물든 주인 사내가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글을 쓰고 뭐고 개나발을 불더니 겨우 이 꼴이냐. 하여간 말 많은 새끼들 치고 제대로 정신이 박힌 놈을 보질 못했다니까.”

기어코 나는 멱살을 잡혔다. 여기서 행패를 부리다 장렬하게 전사할까 하는 생각은 잠시였다. 오래지 않아 건장한 청년 둘이 들이닥쳤다. 다짜고짜 허리춤을 양쪽에서 잡고 여차하면 날아올 주먹을 흔들었다.

“카드 비밀번호 대. 이런 놈은 경찰에 넘겨봤자 무전취식으로 금방 풀려나지. 순순히 말로 할 때 불어. 죽기 전에.”

“살려주세요.”

나는 카드 비밀번호를 불었다. 그중 하나가 은행단말기를 찾아 술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무슨 계산 착오란 말인가. 분명 은행에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을 찾으러 간 청년이 의기양양 돌아왔다.

“1800원 남기고 겨우 18만원 찾았어요. 나머지 오만원 정도 어디 있어? 주머니 까봐”

“네. 여기 있어요.”

나는 똥물에 젖은 돈을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 공손하게 내밀었다.

“아, 진즉 이렇게 해결했으면 오죽 좋아. 잘해 드릴게 다음에 또 오세요.”

술집을 나와서 노숙자 몰골로 지하철 입구로 걸어가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청산별곡 노래가 흘러나왔다.

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셩.

얇디얇은 빈 지갑을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을 헤아려보았다. 청산은 나더러 푸르게 살라고 하지만 과연 어디까지 마냥 푸르게 있겠는가. 당장 나는 지하도에 사는 천관녀를 찾아 하룻밤을 구걸해 보리라.

얄리얄리얄리 얄라셩 얄리얄리 얄라리얄라. <끝>

박인 작가의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스마트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을 말합니다. 『문학나무』 신인상을 수상한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한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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