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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군의 책과 여행 이야기]

잊을 수 없는 47일 간의 기록, 남한산성을 걷다.

[대한민국기행]민족의 고난이 서려있는 남한산성과 수어장대

2019. 05. 29 by 권용 전문기자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조선의 임금이 머물던 곳, 드디어 남한산성을 찾아오게 되었다. 김훈 작가님의 소설 '남한산성'을 읽으며 꼭 가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가 이제서야 방문을 하게 되었다. 임금을 위해 준비된 곳이지만 임금이 있어서는 안되었던 그곳, 우리 역사의 잊을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있는 흔적에 드디어 발을 내딛는다. 소설로 몇 번, 영화와 병자호란 전시까지 다녀올 정도로 관심 있었던 남한산성을 돌아보며 지난 역사의 기억을 다시 한 번 다듬어 본다.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내리면 바로 행궁이 보인다. 행궁에 먼저 들를까, 아니면 수어장대에 올라 서울의 전경까지 보고 올까 순간 고민이 된다.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가며 경계를 서던 병사들의 모습이 떠올라 수어장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곳에 오르면 그때 그 순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을까? 당시 치열했던 생생한 모습을 느낄 수 있을까 기대하며 산길을 오른다.

남한산성 로터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수어장대에 다다른다. ⓒ권용

살짝 경사진 길도 있지만 대체로 평탄하다.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올라올 수 있는 정도이다. 로터리에서 수어장대까지 걸어서 15분 정도 걸렸다. 걸음이 급해 산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빨리 오르는 편이다. 급히 올라온다 하여 특별히 좋은 점은 없다. 가볍게 등산하는 기분으로 충분히 주변을 만끽하며 오르길 추천한다. 오래 머물며 천천히 느낄수록 가슴에 남는 것도 많을 것이다.

아주 오래전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이다. 병자호란은 물론이며 일제의 강제 치하 속에서도 꿋꿋이 버티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비록 왕의 항복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기는 했으나, 20만 대군의 포위 속에서도 끝까지 버티며 강제로 문을 열지 않던 천하의 요새였다. 조선 말기 의병들의 거점으로도 활용되었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과거 많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우리 민족은 남한산성에게 많은 시간 기대고 있다.

땀이 조금 나올라 하니 산성의 성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멀리 서울의 상징 롯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산성의 높은 곳에서 서울 전경의 모습을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 이 날 미세먼지가 서울의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다. 넓게 펼쳐진 멋들어진 서울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상상으로나마 맑은 날씨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렇게 멀리 서울과 성남까지 한눈에 볼 수 있기에 군사적으로 당연히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이다. 영화 속 성벽과 산등선을 넘어 요란스럽게 올라오던 청나라 병사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과거의 모습과 현재 서울의 모습이 공존하는 남한산성 성벽에서 바라본 모습. ⓒ권용

 사적 57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남한산성이다.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지키는 역할을 하였다.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의 옛 터를 활용하여 조선시대(인조 2년)에 축성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인조 왕은 자신이 겪어야 할 고난의 길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것일까? 당연히 아니었겠지만 남한산성을 잘 구축해둔 덕분에 47일간 청나라로부터 항전할 수 있었다. 청나라 대군이 포위하고 있는 남한산성 안에서 인조 왕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산성 길을 조금 걸으면 수어장대를 볼 수 있다. 산성 내 현존하고 있는 조선 후기 목조건물이다. 인조가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지은 4개의 수어장대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축물이다. 수어청의 장관들이 군사를 지휘하던 곳으로 병사들이 사열해 있는 당시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듯하다. 실제 영화 '남한산성'에서도 수어장대에서 병사들을 사열하던 장군, 인조 왕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주 오래전 수어장대의 사진도 남아있다. 1892년 프랑스 영사 이폴리트 프랑뎅이 찍은 사진으로, 실제 파리 만국 박람회 공식 엽서로 사용된 사진이다. 당시 많은 유럽 열강들은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우리에겐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역사의 일부분이지만, 그들에게는 빠른 시간 차지하여 수탈해야 하는 대상으로 비쳤을 것이다. 지금은 유지 보수를 통해 깔끔하고 멋진 외관을 보여주지만, 사진 속 모습은 무너져가는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당시 조선의 국력이 그대로 드러난 듯한 사진, 우리 조상들이 겪어야 했던 민족의 상처를 생각하면 과거의 모습이 마냥 달갑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비록 아픈 역사의 자취가 남아있지만,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이다. 나쁘고 안 좋은 기억이라 하여 다른 이들에게 넘길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이전에 누군가 겪어야 했던 시련들을 통해 지금 우리는 살아간다.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게 된 역사의 숨결이 아직 이곳에 남아있다. 이미 임진왜란을 겪으며 큰 고난을 겪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피해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한나라의 국왕이 성에 숨어 47일을 지냈다. 힘겹게 성 밖을 빠져나와 세 번 머리를 숙여 이마에 피가 흘렀다. 그렇다면 그 백성들이 겪어야 할 고충은 어떠했을까? 이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흔히 듣던 '화냥년'이라는 단어 역시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인들이 감수해야 할 민족의 수난이었다.

수어장대의 과거 모습, 그리고 깔끔하게 보존 유지되고 있는 현재의 모습. ⓒ권용

 수어장대 옆으로 작게 '무망루'가 자리하고 있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왔던 효종대왕의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영조대왕이 직접 지은 이름이다. 효종대왕에 대해서 흥미가 있었지만 깊게 알지는 못하였다. 좋은 기회를 찾아 잘 알아본 후 다시 이야기를 해야겠다.

효종대왕의 원한이 서려있는 무망루. ⓒ권용

수어장대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시 내려간다. 남한산성은 수어장대뿐만 아니라 행궁, '님의 침묵'으로 알려진 만해 한용운 선생님의 기념관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과거의 역사와 현재 서울의 모습이 공존하는 곳 남한산성. 수어장대에 이어 행궁을 돌아보기로 한다. 산성에서는 무능한 지배층에 의해 고난을 겪어야 했던 백성들의 한이 어려있었다. 반면 행궁에서는 한반도 땅을 지배했던 왕, 그리고 지배층들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역사에 있어 다양한 관점으로 보고 생각할 수 있어 의미가 큰 남한산성이다. 이곳을 방문하기 전 소설 남한산성, 그리고 영화까지 보고 실제 역사의 발자취를 돌아본다면 더없이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끝나지 않은 이 이야기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계속>

드넓게 펼쳐진 서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남한산성 행궁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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