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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낮에는 공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밤에는 택시 운전사로 뛰었다. 백인 요리사들에게 수잔은 우아하고 상냥한 여자였다. 아름다운 그녀의 벗은 몸 위에 제임스의 건장한 알몸이 겹쳐있었다.

[박인 스마트 소설] 호텔 파라마타

2019. 05. 17 by 박인 작가
▲『An imaginary town』 1120×1620㎜, Acrylic&Mixed media 박인作
▲『An imaginary town』 1120×1620㎜, Acrylic&Mixed media 박인作

“냉장실 바닥이 엉망이야. 도대체 주방 위생 상태는 왜 이 모양이지?”

금발 머리카락 사이 수잔의 푸른 두 눈이 찌푸려있다. 수습 기간 중인 보조 매니저 제임스를 야단치는 중이었다. 호텔 직영 레스토랑 매니저인 그녀는 특히 나 같은 검은 머리 아시안 유색인종들에게 말을 섞지 않았다. 되도록 멀리 떨어져서 대화했다. 그런데도 멀리서 본 그녀는 원색적으로 아름다웠다. 호텔 사장이 숨겨놓은 애인이라고 마오리족 접시닦이 제이컵이 비웃었다. 하여튼 대학을 졸업한 지 3년 만에 수잔은 레스토랑 수석매니저가 되었다. 제이컵은 대걸레와 물통을 들고 냉장실 바닥을 청소하러 갔다. 분사기 호수를 힘껏 당긴 나는 접시에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씻었다.

접시와 식기와 온갖 그릇들이 조리실로 밀려들어 왔다. 연회용 테이블보 위에 먹다 남은 음식과 술과 음료들이 수십 개 가득 실려 왔다. 땀과 물기에 젖어 축축 늘어진 작업복은 상체와 넓적다리에 달라붙었다. 고무장갑 속 손은 불어 있었다. 하얗게 허물이 이는 손가락을 닦을 틈새도 없이 요리사들의 크고 작은 냄비, 주철로 만든 팬과 조리 도구들이 밀려와 자동 식기 세척기 앞에 언덕처럼 쌓였다.

내가 처음 시드니로 가서 한 일이 파라마타 호텔 주방 일용직 접시닦이였다. 한때 한국인에게 호주는 천국으로 보였다. 실업수당이나 타면서 누드 해변에 누워 열대과일이나 먹을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국은 가 본 사람만이 안다. 호주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디에도 원래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은 없다.

서울을 떠난 후, 매우 심한 문화충격에 휩싸인 초보 이민자인 내게 시드니는 이방의 땅일 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1년 동안 먹고살기 위해 일을 해야 했다. 낮에는 공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밤에는 택시 운전사로 뛰었다. 목구멍 포도청에 사식 넣을 돈도 벌고 이 모든 것이 소설적 경험에 살점을 붙이는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세상에 천국이란 애초에 없듯이 죽어서나 가는 천국이 나는 당장 필요하지 않았다. 혹여 천국에서 시인 패터슨처럼 버스운전이나 하면서 시를 쓰면 좋겠지만 말이다.

낮에는 대학교에 다니느라 저녁 5시경에 엔진이 덜덜거리는 고물차를 끌고 호텔 근처에 도착했다. 나는 되도록 호텔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 공원 후미진 곳에 차를 대고 걸었다. 주차위반 벌금 딱지를 떼면 하루치 일당을 날려야 했다.

약혼녀를 서울에 두고 온 나는 시드니 외곽에서 혼자 살았다. 살을 비비며 사랑해야 할 사람이 밤마다 가슴에서 깨어날 때 절절한 아픔이 느껴졌다. 약혼녀 초청은 거의 10개월이 걸렸다. 꿈과 가슴에만 새겨진 사람과 한집에 같이 살기 위해 나는 죽기 살기로 일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수잔의 잘록한 허리와 아름다운 몸매를 보면 약혼녀 생각이 났고 새벽에 돌아와 수음했다.

백인 요리사들에게 수잔은 우아하고 상냥한 여자였다. 그런 그녀는 손가락 끝을 까닥거리며 제임스를 불렀다. 아버지가 이탈리아 출신인 제임스는 대학에서 호텔경영학과를 갓 졸업한 백인 청년이었다. 잘생긴 외모로 인해 젊은 여종업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유머 감각이 좋은 그도 상사인 수잔 앞에서는 발아래 쥐 신세였다. 무슨 지시사항을 여겼는지 면박을 당하기 일쑤였다. 제임스는 뒷짐을 진 자세로 수잔의 비난을 들었다. 수잔은 정색하다가도 가끔 옅은 미소를 지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제임스는 야단을 맞고 식기 세척기 앞을 지나가면서 나와 제이컵을 보고 혀를 내밀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여느 날과 다르지 않은 그 날 밤 12시 무렵, 어느 정도 그릇과 냄비 정리가 끝내고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요리사가 20명인 제법 큰 호텔 레스토랑에는 주말마다 결혼식 파티가 열렸다. 나는 밀려드는 접시와 그릇들을 닦아서 상자에 종류별로 넣고 자동 세척기에 차례로 밀어 넣었다. 동시에 기계에서 빠져나오는 그릇들을 종류별로 말리고 분류해서 선반에 정리해야 했다. 고된 노동이었다. 제이컵은 야간 당직이 보이는 않는 곳에서 쉬기 위해 사라졌다. 나는 직원식당에 가서 질긴 스테이크 조각을 씹고 앉아서 잠깐 공상에 빠졌다. 부엌 바닥만 청소하면 늙은 차를 끌고 피곤한 몸을 쉬게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프란시스, 내 말 들어 봐. 비품창고 안에서 내가 뭘 보았는지 알아? 수잔을 보았어.”

쌍꺼풀 짙은 눈을 크게 뜨고 제이컵이 말했다. 매일 8시면 퇴근하는 수잔이 창고에 있다니. 유령을 본 것인가. 식자재와 비품을 보관하는 제법 큰 창고 안에는 사무실이 있고 구석에 수석요리사가 쉬기 위한 간이침대가 놓여있었다. 그 침대에서 제이컵이 본 것은 분명 수잔이었다. 치명적으로 아름다운 그녀의 벗은 몸 위에 제임스의 건장한 알몸이 겹쳐있었다.

제이컵이 내게 그 생생한 장면을 실연을 곁들여 상세하게 묘사하기 시작했을까. 식당 안으로 옷매무새가 흐트러진 수잔이 정색을 하고 들어와서 제이컵을 불러냈다. 나는 수잔의 뒤를 따라가는 제이컵의 구부정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닥청소를 마무리하기 위해 부엌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제이슨을 보았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황급히 직원용 후문 쪽으로 달려갔다.

내가 호텔에서 마지막으로 본 그들의 뒷모습이었다. <끝>

박인 작가의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스마트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을 말합니다. 『문학나무』 신인상을 수상한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한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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