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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군의 책과 여행 이야기]
2019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 선생을 만나다.
'만해 한용운', 나라와 민족의 자존감을 지키다
2019. 05. 31 by 권용 전문기자

다시 경기도 광주를 찾았다. 지난번 남한산성 길을 오르며 조선의 인조, 충신 김상헌과 최명길을 생각했다. 이번에는 다른 분을 만나러 왔다. 2019년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만해 한용운 선생. '님의 침묵'을 온몸으로 느끼기 위해, 그리고 선생의 고귀한 업적을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남한산성 행궁 가까운 곳에 만해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으로 가는 길 주변 풍경 역시 뛰어나며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가 눈길을 끈다.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한용운 선생도 만나고, 남한산성 행궁까지 돌아보면 좋을 듯싶다.

 

2019년 시작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 만연한 봄을 넘어 여름의 문턱까지 온 듯하다. 만해기념관으로 가는 발걸음은 기대로 가득차 있다. 학창시절 좋아했던 시 '님의 침묵'을 온 몸으로 맞이하러 가는 기분이다. 분위기 좋은 카페가 바쁜 내 발걸음을 잡는다. 덕분에 시원한 커피 한 잔을 들고 기분 좋게 기념관으로 향한다.

만해기념관은 말그대로 만해 한용운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민족의 자존감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워진 곳이다. 선생께서는 일제강점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민족을 위해 싸우신 분이다.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이자 종교인으로 3·1만세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었다. 이후 3년 징역이라는 최고형을 선고받으면서도 옥중투쟁 3대 원칙을 강조하며 일제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9년 만해기념관에서 한용운 선생 말고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다양한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전국 다양한 곳에서 관련된 행사를 많이 하고 있다. 뜻깊은 한해가 돌아온 만큼, 특별히 역사와 관련된 주제를 접하며 많은 분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귀여운 동자승이 어서오라며 고사리 같은 손짓으로 맞아준다. 기념관 옆 잔디밭도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다. 그리고 동자승 뒤로 근엄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한용운 선생의 동상도 보인다. 생전 선생의 사진, 강직했던 일화로 들어봤을 때 동상의 모습처럼 강인하면서도 옳은 길에 대한 고집스러운 모습이 느껴지는 듯하다.

 

 더 일찍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이곳에 찾아왔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선생에 대해서는 문학 시간, 역사 수업 시간에 짧게 들어봤을 뿐이다. 많은 분들에게 '님의 침묵'이라는 시로 알려져 있고, 독립운동가로도 알려져 있을 것이다. 시 한 편과 짧은 역사적 사실 한 줄로만 알고 있었을 뿐, 더 자세히 알기 위해 특별히 노력했던 적은 없었다.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필진으로 활동하게 된 2019년은 내게 특별한 한 해가 될 수밖에 없다. 민족을 위해 고군분투하신 영웅들을 소개하기 위해 두발로 찾아다니고 있다. 몸과 머리, 온몸으로 공부하고 많은 분들께 알릴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더없이 큰 영광이다.

 

선생은 기념관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독자들에게 새벽종을 기다리며 붓을 던진다고 하셨다. 시를 쓰는 도구인 붓은 선생 그 자체, 그리고 새벽종을 기다리는 건 나라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진한 먹물을 흠뻑 몸에 적시며 온몸을 불사르고, 나라를 위해 한 몸 아끼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던지겠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민족의 치열한 역사가 숨 쉬는 남한산성을 축조할 당시 많은 수의 승려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병자호란때 마지막까지 항전을 주정하다 순절한 삼학사(혹익한, 윤집, 오달제)의 영혼을 모신 조선 선비들의 영원한 고향땅 남한산성! 그러한 민족의 얼과 정신이 담겨져 있는 남한산성과 함께 우리 겨레의 큰 스승인 만해 선생의 기념관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다.

선생의 고향은 충남 홍성, 정신적인 고향은 내설악 백담사, 마지막 삶의 현장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이다. 이 모든 장소가 한용운 선생의 얼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원래 만해기념관은 1981년 성북동 심우장에서 시작되어 1990년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다. 호국정신의 상징적 장소 남한산성과 함께 만해기념관이 설립되어 민족자존의 정신이 빛나는 곳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선생의 모든 일대기는 오직 나라와 민족을 위한 행보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말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가던 1879년 만해 한용운 선생은 홍성군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어릴 적 이름은 '유천', 충훈부도사였던 선친은 어린 선생에게 역사, 세상 이야기, 국내외 정세 등을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은 선생으로 하여금 시대정신과 역사의식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근대 격량의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서 휘청하는 나라의 운명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발견, 27살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었다. 스승 김연곡 스님의 도움으로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과 쉬지위의 <영환지략> 등을 읽고 세계정세와 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 후 국외를 유랍하며 일본의 신문물도 견학한다. 그리고 1910년 인간 정신의 유신을 위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한다. 또한 만주 일대의 독립군을 격려하는 한편 임제종 운동을 통하여 한·일 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하여 1912년 '한문독본', 1913년 '조선불교유신론', 1914년 '불교대전', 1917년 '정선강의 채근담'을 내놓으며 민족계몽운동에 힘쓰셨다.

 

1919년에는 3·1운동 선봉에 서서 민족대표로 연설,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또한 자유·평등·평화의 대강령을 밝힌 독립선언서(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옥중에서 집필하셨고 옥중투쟁 3대 원칙(1. 변호사를 대지 말 것, 2. 사식을 취하지 말 것, 3. 보석을 신청하지 말 것)을 정하여 몸소 실천하셨다. 독립선언 후 "이제 내 나라에서 죽으니 한이 없다"는 생사를 초월한 정신으로 자신이 직접 추가한 공약삼장 그대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굳세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셨다.

 

선생은 설악산 오세암에서 상찰선사의 선화게송인 십현담에 주·해를 달았다. 선의 오묘한 이치에 이해가 깊었으며 선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솟아 나와야 함을 강조하셨다. 1926년 사랑의 증도가 '님의 침묵'에서 우리의 모국어로 깨달음의 경지를 담았다. '님의 침묵'에서 자유·평등·평화의 사상을 침묵 속에 담고, 그 노래를 상징적 '님'을 향하여 투영하였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1927년 신간회를 발기, 중앙집행위원과 서울시(당시 경성) 지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 민족의 정통성을 찾기 위해 민족이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의거를 민중대회로 지원, '여성의 자각', '전문지식을 갖추자', '소작농민의 자각', '자립역행의 정신을 보급시키라'는 글들을 차례로 발표하며 범민족적 표현단체 건설을 주장하였다. 또한 나병구제연구회를 조직하며 간이수용소를 설치를 경의하는 등 대사회 활동에 박차를 가하셨다. 

 

선생은 말년(1933년,55세)에 이르러 성북동 집 한 칸을 갖게 되었다.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를 거부하여 남향의 집을 북향으로 고쳐 지은 것으로 유명한 심우장이다. 심우는 선생이 손수 지은 택호로 소를 찾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는 소를 마음에 비유하여 "마음자리 바로 찾아 무상대도를 깨치기 위한 집"이라는 뜻이다. 심우장에서 선생은 비밀결사인 만당의 영수로 추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애국지사 묘비명을 손수 쓰셨으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독립운동의 선구자 일송 김동삼 선생의 시신을 모셔 장례를 치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 곳이다. 일제의 황민화정책, 창씨개명, 조선인 학병출정 등을 반대하던 북향집 심우장은 선생이 손수 심은 향나무 한 그루와 함께 민족의 얼을 지키고자 했던 만해의 의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다행히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적 연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기념관 내 선생과 관련된 서적, 연구에 대한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생이 밟아오신 발자취를 따르자면 이마저도 부족하겠지만, 그나마 대한민국에서 관련 자료와 유적 등 다양한 흔적을 마주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할 따름이다.

민족운동가, 불교사상가, 근대 시인으로 집약되는 만해 한용운 선생은 66세를 일기로 심우장에서 입적(1944년 6월 29일)하였다. 학병·징병을 거부하고 일제의 배급을 거부하며 영양실조가 되었던 선생의 육신은 민족의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영원히 잠들었다. 비록 나라의 독립을 몸소 보시지는 못했지만 고귀한 정신은 여전히 이땅에 남아 민족의 앞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고 있다. 민족의 갈망을 절실히 노래했던 시인, 구국 일념으로 살아온 독립투사, 가혹한 고난과 탄압에도 의연함을 보이며 불굴의 투지로 겨레를 이끌었던 만해 한용운 선생.

대한민국 건국공로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은 물론, 선생의 기념주화도 있다. 한국조폐공사 한국의 인물로 선정되어 만들어진 메달은 선생의 초상을 기초로 제작되었고, 뒷면은 1917년 설악산 오세암에서 선생이 남긴 친필 오도송이다. 한국의 인물 메달은 다양한 분야에서 후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을 문화관광부에서 지정한 '선현의 표준영정' 및 '이달의 문화인물' 등 한국조폐공사가 메달의 적성을 고려하여 제작한다고 한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될 당시의 모습, 그리고 사진 위 독립운동가 신하수 선생의 채근담 서문 친필이 있다. 일강 신하수 선생은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정선강의 채근담'에 부친 서문 한 구절을 읽고 일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고 한다. 신하수 선생은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채근담 서문의 일부를 친필로 남겼다.

 

기념관 내 한쪽에서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구국시인 3인(한용운, 이육사, 윤동주) 특별기획전을 하고 있다. 민족시인 3인의 작품을 함께 살펴보며 이들이 지향했던 것들을 기억하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시인의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르며 지금 내가 살아가는 삶을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얼을 기리며 함께 일제강점기 시대 문학과 민족시인들의 삶 역시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조종현 선생이 이야기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이야기이다. 민족의 중이기도 했고, 민족투사이기도 했고,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그리고 이 땅 민족의 한 사람으로 만해에 대해 풀어가는 이야기를 감동스러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글 전문을 사진으로 옮기니 많은 분들이 한 번쯤 읽어보았으면 한다. 이글만 읽어보아도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해 공부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아쉽지만 만해 한용운 선생의 정신을 온전히 담지 못하고 기념관을 나선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개와 지조를 지켰던 선생의 강인한 모습을 죽는 순간까지 우러러볼 것이다. 한 사람의 시인으로 남긴 '님의 친묵'은 작품성은 물론 우리 민족의 정신과 지조를 그대로 담아냈고, 옥중투쟁 3대 원칙 역시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심우정을 만들며 조선총독부를 쳐다보기도 싫다는 강인한 의지 역시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준 의미가 매우 클 것이다. 6월이 되기 전 심우정에도 다녀올 예정이다. 머지 않은 때 선생의 생가지 역시 돌아봐야 할 것이다.

항상 마음에 큰 부담을 지고 독립운동가분들을 소개하고 있다. 감히 보잘 것 없는 내가 그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글을 쓰는 것이 못내 부끄럽다. 나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민족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생각한다. 고심하며 정리를 해보아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일부분이다.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런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들에게 늘 감사할 따름이다. 4월 안창호 선생, 5월 김순애 선생, 6월 만해 한용운 선생까지 나의 무거운 발걸음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받아주신 듯 하여 더 열심히 해야지 마음을 다잡고는 한다. 2019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분들을 많은 분들께 알리기 위해, 지금 내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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