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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 스마트 소설]

하여간 나타샤는 양성애자였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낯선 자가 되는 걸 나는 더 견딜 수 없어. 말한 순간 주먹이 날아왔고 나는 잠깐 혼절했다.

[박인 스마트 소설] 그날의 나타샤

2019. 05. 31 by 박인 작가
▲『Free SoulⅠ』 890×1300㎜, Acrylic ⓒ박인
▲『Free SoulⅠ』 890×1300㎜, Acrylic ⓒ박인

겨울 눈바람이 옆구리를 파고드는 저녁 무렵, 나는 홀로 섬에 갔다. 추위를 녹일 한 잔 술과 따뜻한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나의 반쪽인 나타샤가 사라지자 나는 황량한 이 툰드라 동토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비장했다. 외로움은 느낄수록 커지고 참을수록 작아지는 것. 낮에는 미친 사람처럼 그녀를 찾아다니다가 밤이 오면 작은 골방에 처박혀 지낸 지 한 달이 흘렀다. 사라진 나타샤를 수소문하다 지쳐서 마지막 등불이라도 들고 뭍에 오른 심정으로 섬에 들른 것이다. 섬은 나타샤가 자주 가는 술집이었다.

지상의 섬은 물 위에 있으나 그곳 섬은 지하에 가라앉아 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주인장이 펑키 음악을 듣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은 미망인 여주인은 파리해진 나를 보며 다가왔다. 안면이 있는 술꾼 두 명이 손을 들고 인사를 했으나 나는 건성으로 웃어주었다.

나는 섬 주인에게 물었다.

"나타샤 여기 왔었어요?"

"아니 왜? 그녀가 또 도망이라도 갔니?"

나는 검은 외투를 벗고 구석 자리에 앉아 보드카 한 병을 시켰다. 점심식사 반주로 소주 한 병을 마신 후라 독주 몇 잔에 취기가 올라왔다.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상념에 빠졌다.

보이는 것과 실제는 너무 다를 수 있었다. 나타샤가 그랬다. 겉은 멀쩡한데 속은 곪아 터지기 직전이거나 겉은 후줄근해도 속이 알차거나. 하여간 나타샤는 양성애자였다. 나는 직관을 믿지 않았지만, 눈을 돌릴 때마다 내 동공에 보이는 그 세계가 돌아갔다. 눈을 내리깔면 그 세계가 내려갔다.

그녀와 동거하는 동안 내 동공에서 지진이 일어나기도 했다. 매초 수십 번씩 일어나는 지질학적 지진과는 다른 마음의 흔들림, 질투였다. 그 질투는 호수의 파문처럼 잔잔하게 일기도하고 격렬한 불꽃처럼 타오르기도 했다. 나타샤를 사랑하기 위하여 양성애를 인정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녀가 사랑한 다른 여자나 남자가 그녀 주위를 감싸고 소용돌이치는 꿈을 꾸면 나는 질투에 눈이 멀 지경이었던가. 아니면 그녀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지만 나만 흔들리는 것은 아니었던가. 당신의 시신경 세포와 뇌 속 신경세포 다발들의 정보처리가 미숙한 것은 아니었던가. 사실 나타샤가 다른 여자를 나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했을 때 나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시기와 질투 어린 눈을 감아버리고 아기가 처음 빛을 보듯이 나타샤를 보아야 한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으로 두 여자의 사랑을 인정하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나타샤는 나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걸 더 원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실수를 반복하는 게 싫어. 똑같은 사랑을 고백하고 내가 좋아하는 똑같은 음식, 음악, 영화, 미술작품, 여행과 모든 자질구레한 똑같은 이야기를 매번 말해야 하나? 나에 대해 반복적으로 까발리고 상대가 나를 이해하고 사랑해주기를 기다려야 하나? 사실 여자가 더 좋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와 입맛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내가 행복에 겨운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알겠지. 내가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고 있는 사람과 가족이 되고 싶어. 나의 일부분 또는 전부를 다시 이방인이 될 사람에게 줄 수는 없잖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가장 낯선 자가 되는 걸 나는 더 견딜 수 없어."

나타샤는 메모를 남기고 떠났다.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박인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눈발은 점점 푹푹 깊어지고 나타샤는 그녀의 새로운 애인 델마와 검은 가죽 코트를 펄럭이며 섬으로 왔다. 나타샤를 보고 나는 자릴 박차고 일어섰다. 나타샤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이내 덩치 큰 여자가 앞으로 나섰다. 코걸이와 귀걸이가 동시에 흔들렸다. 팔뚝 문신을 흔들며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여기서 한 판 뜰까? 밖으로 나갈까?"

나는 기가 막혀 실실 웃음이 나오면서도 나타샤를 살폈다. 그녀는 델마 뒤에 숨어있었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의 눈빛으로 나타샤는 나를 바라보았다.

"이보세요. 남자가 여자하고 무슨 싸움입니까. 다치기 전에 비켜요. 나타샤와 할 말이 있으니까."

나는 가죽 코트를 밀치고 나타샤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무릎을 꿇고 돌아와달라고 애걸복걸이라도 해야 했다. 그 순간 섬의 문이 열리면서 열 명은 족히 넘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하나같이 스모키 메이크업에 코걸이를 하고 가죽점퍼를 입었다. 더러는 군화를 신고 야구방망이와 체인을 들고 있었다.

팔에 문신을 한 델마는 그들 무리의 우두머리였다.

"오빠 도망쳐!"

나타샤가 내게 속삭이듯 말했다. 실연의 아픔으로 몸무게가 십여 킬로 줄어든 나는 싸울 기력이 없었다. 모든 유행가가 나의 신세를 한탄하는 노래처럼 들렸다.

"여기서 다투면 안 돼."

"사람들끼리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이건 아닙니다."

말한 순간 주먹이 날아왔고 나는 잠깐 혼절했다. 나타샤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녀는 다시 사라졌다.

그 섬에 들어가면 모두 가라앉았다. 심연의 늪이 섬 안에 있었다. 발이 빠지면 손이 나와 발목을 거머쥐었다. 사랑이 아니라 그 뭐라도 섬에 빠지면 살아나오기 힘들었다. 손아귀를 뿌리치고 빠져나오려면 술이 필요했다. 현실을 잊어버리기에 독주만 한 것이 있던가. 한 병이면 흠뻑 취해 날아오를 수 있다. 상실감에 포획된 그 날 이후 나는 유령처럼 나타샤를 찾아 섬으로 갔다. <끝>

박인 작가의 스마트 소설을 연재합니다. 스마트 소설은 빠르게 변하는 일상에서 짧은 시간에 읽을 수 있는 초단편 분량의 소설을 말합니다. 『문학나무』 신인상을 수상한 박인 작가는 단편소설집 『말이라 불린 남자』 스마트 소설집 『네 여자 세 남자』(공저)를 펴냈습니다. 또한 다수의 개인전을 연 화가이기도 합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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