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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협군의 책과 여행 이야기]

그가 꿈꿨던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나라와 민족의 희망이 담긴 보창학교의 모습. 강화도 '양도초등학교'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교육을 통해 품었던 독립의 꿈, '양도초등학교'를 찾다

2019. 07. 22 by 권용 전문기자

 

서둘러 강화도로 향한다. 역사적 장소와 볼거리가 많은 곳,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신 이동휘 선생의 흔적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한다. 오래간만에 미세먼지 없는 파란 하늘을 마주한다. 선생이 강화도를 지키던 시절에도 이런 모습이었을까?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많은 분들의 희생으로 이룩한 오늘의 대한민국, 이 땅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자동차를 타고 먼 길을 달려온 곳은 바로 강화도에 있는 '양도초등학교'이다. 강화도 양도면에 위치한 작은 학교이다. 이곳에 무슨 이동휘 선생의 흔적이 남아있을까? 특별한 무언가가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이 학교 자체가 우리 역사의 살아있는 흔적이다. 1904년 육영학원으로 개교하여 1905년 봄, 선생께서 덕수궁으로 가서 고종을 알현하고 '보창'이라는 학교 이름을 하사받았다. 강제병합 이후 폐교되었다가 사립흥천학교, 1929년 2월 23일 양도보통학교, 1943년 4월 1일 양도국민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이동휘 선생께서는 강화도로 전출될 때까지 궁중에서 근무했다. 특히 고종의 총애를 받아 삼남검사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후 육군 참령으로 강화진위 대장이 되었고, 강화도 군민들에게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강화도로 부임하고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었다. 결국 선생은 군직을 사임하고 보창학교의 교육내실화를 도모하는 등 교육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당시 보창학교에서 선생의 훈도를 받았던 고택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보창학교를 설립한 성재 이동휘 선생의 열성은 마른 나무에 불을 붙인 격이었고, 그 마른 나무는 강화도민의 열성이었다. 성재 선생은 특히 언변에 능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의 언변은 청산유수 같은 능변이나 달변이 아니라 그대로 웅변이요 열변이었다. 그 웅변으로 한자리에서 청중들을 울리기도 하고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금방 폭소를 터뜨리게 했다. 말마다 애국이요, 나라 걱정뿐이었다."

아쉽지만 학교 내부에서 선생에 대한 기록이나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다. 다만 양도초등학교 터전 위에 있는 모든 것이 선생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었다. 학습의 터전으로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키고 남아있는 학교, 열성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하고자 하는 선생님들, 그리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까지. 바로 이런 못브이 이동휘 선생이 바라고 원하던 보창학교의 모습, 미래 대한민국의 참된 교육 현장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예의 바른 착한 어린이, 이 교훈 아래에서 배우고 자라는 양도초등학교 학생들이 바로 대한민국의 꿈이자 미래이다. 그것은 곧 성재 이동휘 선생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선생께서 터전을 잡으신 보창학교가 당시 한반도의 미래이자 희망이었다. 그리고 선생이 뿌린 미래를 위한 작은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지금의 대한민국이 되었다. 이동휘 선생을 비롯하여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위해 희생하신 많은 분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교실은 수업에 대한 에너지로 가득했다. 학교 측에 양해를 구하고 내부도 가볍게 돌아볼 수 있었다.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열정,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열망을 복도에서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즐거움으로 가득한 교실, 똘망똘망한 학생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이렇게 즐거운 일이었나? 순간 울컥함이 올라온다. 이동휘 선생께서 지금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실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고 잠드신 모든 독립운동가들의 노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이렇게 남아있는 교육 역사의 흔적이 말해주고 있다.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양도초등학교, 과거 시절의 모습을 잠시나마 돌아볼 수 있는 사진들이 있다. 보창학교는 이동휘 선생의 가르침 아래 교육열에 불타는 강화도 사람들의 향학열을 자극시켰다. 고종은 보창학교에 친필과 함께 5천 원을 하사했다고 한다. 이렇게 선생이 보창학교를 세우고 '훈맹정음'을 창시한 박두선 선생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해 힘쓴 인재들을 다수 배출하게 된다.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면 양 옆으로 꽂혀있는 많은 책들을 만나게 된다. 꿈과 희망, 배우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한 학교, 그것이 바로 선생께서 꿈꾸었던 교육의 현장이었다. 선생께서는 아전인 빈농의 아들로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나셨다. 부친은 독립심을 심어주기 위해 아들의 이름을 '독립'이라 짓고 스스로 국문과 한문을 가르치셨다. 또한 일찍이 선생을 군청의 아전이 되기 위한 예의와 법도를 가르치는데 전혀 소홀하지 않았다.  부친 이승교는 백암 박은식 선생과 함께 독립 운동계의 원로로 존경을 받았다. 이러한 부친의 애국정신을 이어받아 이동휘 선생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유난히 맑았던 강화도 하늘의 모습이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웠으나 선생께서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무리 날씨가 흐려도 언젠가는 맑은 하늘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대한민국 미래를 위한 반석을 이 땅에 세우며 분명 언젠가 밝아질 미래를 꿈꾸셨을 것이다. 보창학교를 졸업한 많은 학생들이 나라를 위하는 선생의 정신을 평생 가슴에 품고 성장하였을 것이다. 지금 양도초등학교를 다니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이런 마음이 깃들여있으리라 믿는다.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 주변을 돌아보았다. 예쁜 꽃을 바라보며 주변의 숨결을 느껴본다. 보창학교 당시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이동휘 선생의 꿈과 희망은 여전히 이 땅에 살아있다. 음악 수업을 듣고 있는 학생들의 울창한 목소리가 교정 뒤편까지 울려온다. 이 목소리가 바로 선생께서 그려보았을 한반도 미래의 아름다운 울림이었을 것이다.

현재 우리는 성재 이동휘 선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셨음에도, 많은 분들이 선생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더 열심히 선생에 대해 공부하고, 열심히 글을 써야할 것이다.

선생께서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대한광복군정부 부도령과 정도령, 한인사회당 위원장,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 등을 지낸 독립운동의 거목이셨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병사하는 순간까지 항일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을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광복 후 50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독립이 되는 순간 선생의 모든 공로가 인정받고 많은 국민들에게 알려졌어야 했다. 광복 직후 이념적인 갈등과 분단으로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의 많은 국민들이 나라를 위해 마지막까지 투쟁한 이동휘 선생의 공로와 이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2019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성재 이동휘 ⓒ권용

"이천만 동포는 다 최후의 일인이 필사하기까지 최후의 일인의 혈점이 필적하기까지 독립을 필성코야 말 줄로 확신하노라. 나는 우리 독립을 단순한 외인의 찬조에 의뢰함보다도, 내가 내 혈로써 우리 자손 억만대의 광영이고, 행복되는 완전무결한 독립을 사려 하는 마음, 다시 말하면 최후의 혈전이라야, 반드시 영원한 독립을 성공하리라 하노라. 독립기념관 이동휘 애국어록비 '독립전쟁'"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 민족적 수난으로 인한 사상적 문제, 이동휘 선생에 적대적이었던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왜곡된 소문과 기록들, 그로인해 일방적으로 과소평가되고 왜곡되었던 선생의 업적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선생게서 오로지 독립을 위해 싸워왔다는 것이다. 아직은 우리가 남북으로 갈라져 총구를 겨누고 있는 현실이지만,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는 부강한 나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통일의 길을 거쳐야 한다. 지금의 대한민국 역시 많은 나라가 부러워하는 강인한 나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 땅위에 뿌려진 많은 희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동휘 선생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바라던 후손들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일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강화도 한 편에 자리 잡은 보창학교의 흔적, 단순히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 의미를 넘어,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들고자 했던 성재 이동휘 선생의 살아있는 정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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